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359번.
다자이 오사무가 39세로 생을 마감하기 1년 전에 쓴 작품입니다. 몰락해 가는 상류 계급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사양(斜陽)족'이라는 유행어를 낳았고 드라마와 영화, 연극 등으로 각색되기도 합니다. 다자이의 생가도 '사양관'으로 이름 지어져 기념관이 되었습니다. 나오지의 모습에는 작가의 전기 모습이, 우에하라에게는 후기 모습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가즈코의 모델이자 다자이의 애인이었던 오타 시즈코의 일기에서 부분적으로 에피소드를 차용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 가즈코의 시선 >> - 소설의 화자입니다. 귀족 출신이지만 결혼에 실패하고 시골 산장에서 병약한 어머니와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동생 나오지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술과 마약에 빠져 얼마 남지 않은 집안의 돈마저 탕진합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가즈코는 사랑과 혁명을 쟁취하기 위해 가정이 있는 우에하라의 아이를 갖는데 성공합니다.
* "쉬 했어." 전혀 쪼그리고 앉은 품새가 아니어서 놀라웠지만,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흉내 내기 힘든 참으로 사랑스러운 느낌이었다. (···)어떤 책을 읽다가 루이 왕조 시절의 귀부인들이 궁전 뜰이나 복도의 구석진 데서 아무렇지 않게 소변을 봤다는 사실을 알고 그 순수함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는데, 우리 어머니도 그런 진짜 귀부인의 마지막 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 어머니에겐 이제 돈이 없다. 우리를 위해, 나와 나오지를 위해 한 푼도 아낌없이 죄다 써 버렸다. (···) 돈이 없다는 건 얼마나 두렵고 비참하고 희망 없는 지옥인가, 하고 난생처음 깨달은 양 가슴이 미어지고 너무나 괴로워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다. 인생의 엄숙함이란 이런 느낌을 말하는 걸까. 옴짝달짝도 할 수 없는 심정으로 똑바로 누운 채 나는 돌덩이처럼 가만히 있었다.
* < 작년엔 아무 일도 없었다. 재작년에도 아무 일 없었다. 그 전해에도 아무 일 없었다. > 이런 재미있는 시가 전쟁이 끝난 직후 어느 신문에 실렸는데, (···) 나는 전쟁에 관한 추억은 이야기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싫다. 많은 사람이 죽었음에도 진부하고 지루하다.
* 스스로도 심한 말을 내뱉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 마치 살아 꿈틀거리듯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 (···) "속였어요. 어머니는 날 속이신 거예요. 나오지가 올 때까지 나를 이용했어요. 나는 어머니의 식모, 쓸 데가 없어졌으니 이젠 황족 집으로 가라고, (···) 가난이 뭐예요? 돈이 뭔가요?"
* 중독은 그야말로 정신의 병인지도 모른다. (···) 차라리 큰맘 먹고 본격적으로 불량해지는 건 어떨가. 그러면 동생도 오히려 마음 편하지 않을까. '불량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라고 그 공책에 쓰여 있었는데, 그러고 보면 나도 불량, 삼촌도 불량, 어머니조차 불량하게 여겨진다. 불량하다는 건 상냥하다는 뜻이 아닐까.
* "저는 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낳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에게 의논드리는 거예요. 이해하셨다면, 답장을 주세요. (···) 세상에서 칭찬받고 존경받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이고 가짜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신용하지 않습니다." (···) 나는 올해 여름, 어떤 남자에게 세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었다.
* 행복감이란 비애의 강바닥에 가라앉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사금 같은 것이 아닐까?
* 나는 이제부터 세상과 싸워 나가야만 한다. (···) 죽어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산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 그건 몹시 추하고 피비린내 나는, 추접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 보고 싶으니까 어쩔 수 없어,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어, 그리우니까 어쩔 수 없어. (···)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거야. 신이 벌하실 리가 없어. 난 털끝만큼도 잘못한 게 없어. 진짜 좋아하니까 대놓고 당당하게, 그 사람을 한 번 만날 때까지 이틀 밤이건 사흘 밤이건 들판에서 지새우더라도, 기필코.
* 나는 토방에 서서 죽 둘러보다가, 찾았다.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아니잖아. 6년. 이미 전혀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 누렇게 뜬 얼굴에 눈가가 빨갛게 짓무르고 앞니가 빠진 데다 연신 입을 우물거려 늙은 원숭이 한 마리가 방 한구석에 구부정하니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 살아 있다는 것. 아아, 이 얼마나 버겁고 아슬아슬 숨이 넘어가는 대사업인가!
* 나는 옆에 누운 그 사람의 잠든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죽을 것 같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얼굴이었다. "전 지금 행복해요. 사방의 벽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와도, 지금 제 행복감은 포화점이에요. 재채기가 날 만큼 행복해요."
* 동생 나오지는 그날 아침, 자살했다.
* 나오지가 죽고 뒷마무리를 끝낸 뒤 한 달 동안, 나는 겨울 산장에서 혼자 지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에게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편지를, 물처럼 무덤덤하니 써 보냈다. <어쩐지 당신도 저를 버리신 모양입니다. 아니 차츰 잊어 가는 듯합니다. 하지만 전 행복해요. 제가 바라던 대로 아기가 생긴 것 같아요. 저는 지금 모든 걸 잃어버린 느낌이지만, 그래도 배 속의 작은 생명이 제 고독한 미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 혁명은, 대체 어디서 일어나고 있을까요? 적어도 우리들 주변에서 낡은 도덕은 여전히 그대로 털끝만큼도 바뀌지 않은 채,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 저의 도덕 혁명의 완성입니다.
<< 나오지의 공책 및 유서 >> - 주인공의 남동생으로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입니다. 귀족 출신이라는 우월감과 자괴감을 동시에 품은 채, 현실의 이면에 깃든 위선을 간파하고 절망에 이르게 됩니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채 마약에 빠져 살다 결국 자살하고 맙니다.
* 논리는 결국 논리에 대한 사랑이다.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돈과 여자, 논리는 부끄러워 허겁지겁 사라진다. 역사, 철학, 교육, 종교, 법률, 정치, 경제, 사회, 이런 학문 따위보다 한 처녀의 미소가 숭고하다는 파우스트 박사의 용감한 실증. 학문이란 허영의 또 다른 이름. 인간이 인간답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 내가 조숙한 척하면 사람들은 나를 조숙하다고 수군거렸다. 내가 게으름뱅이인 척하면 사람들은 나를 게으름뱅이라고 수군거렸다. 내가 소설을 못 쓰는 척하면 사람들은 나를 글을 못 쓴다고 수군거렸다. 내가 거짓말쟁이인 척하면 사람들은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수군거렸다. 내가 부자인 척하면 사람들은 나를 부자라고 수군거렸다. 내가 냉담한 척하면 사람들은 나를 냉담한 녀석이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괴로워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을 때, 사람들은 내가 괴로운 척한다고 수군거렸다. 자꾸만, 빗나간다. 결국 자살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 나는 천박해지고 싶었습니다. 강인하게, 아니 난폭해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소위 민중의 벗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술 정도로는 도저히 안 되겠더군요. 늘 어찔어찔 현기증을 느끼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자면 마약 외에는 없었습니다. 나는 집을 잊어야 한다. 아버지의 피에 반항해야 한다. 어머니의 상냥함을 거부해야 한다. 누나에게 차갑게 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중의 방에 들어갈 입장권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누나. 대체 우리에게 죄가 있는 걸까요? 귀족으로 태어난 것은 우리의 죄일까요? (···) 나는 죽는 게 낫습니다. 내겐 소위 생활 능력이 없습니다. 돈 때문에 남과 다툴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남을 우려먹을 수조차 없습니다. (···) 우리는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남을 대접하고 싶었는데, 이제 남한테 대접받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 나는 맨정신으로 죽습니다. 한 번 더, 안녕. 누나. 나는 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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