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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연 May 29. 2024

그것은 아름답고도 음란했다 - <달과 6펜스>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38번.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한 소설입니다.  한 중년의 사내가 달빛 세계의 마력에 끌려 6펜스의 세계를 탈출하는 과정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세계를 의미합니다.  이 둘은 동그랗고 은빛으로 빛나지만, '달'은 영혼과 관능의 세계, 감성의 삶에 대한 지향을,  '6펜스'는 돈과 물질의 세계, 세속적 가치를 의미합니다. 서머싯 몸은 세상의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예술가의 삶을 선택한 중년 가장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  '나' 의 시선 >> - 나레이터인 '나'를 통해 한 남자의 전기가 펼쳐집니다.  중년의 증권 중개인인 스트릭랜드는 어느 날 갑자기 안락과 명예를 버리고 화가가 되겠다고 맨 몸으로 집을 나갑니다.  파리 뒷골목을 떠돌던 이 남자는 태평양의 한 외딴 섬, 깊은 숲 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다 문둥병에 걸리고 맙니다. 그러나 장님이 된 상태에서도 신비로운 그림을 완성하면서 죽어갑니다. 


  *  화가이든 시인이든 음악가이든,  예술가는 숭엄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장식물로써 우리의 심미감을 만족시켜 준다.  하지만 심미감이란 성 본능과 비슷해서 일종의 야만성을 띠게 마련이다. 










 *  스트릭랜드의 그림은, 가장 대수롭지 않은 것조차 기이하고,  복잡하고,  고뇌에 가득 찬 개성을 보여준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 그림들에 전혀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의 인생과 성격에 대해 강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켜 온 것도 바로 그 개성이었다. 


  *  모리스 위레가 <메르퀴르 드 프랑스>지에 글을 한 편 기고하여 스트릭랜드라는 무명 화가를 망각으로부터 구해 낸 것은 그가 죽고 사 년이 지난 뒤였다.  (···) 런던에서 그를 알았던 작가들이나 몽마르트의 카페에서 그를 만났던 화가들은 자신들이 보잘것 없게 여겼던 화가가 진짜 천재였고,  그 천재가 자신들과 어깨를 맞대고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  쉽게 얻을 수 있는 기쁨에는 무엇인가 경계해야 할 욕망이 있었다.  변화를,  그리고 미지의 세계가 주는 흥분을 체험할 수만 있다면 험한 암초와 무서운 여울도 헤쳐나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 어렸을 적에는 화가가 되고 싶었소.  하지만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면 가난하게 산다고 하면서 장사일을 하게 만들었지.  일년 전부터 조금씩 그리기 시작했소.  한 일 년 야간반에 나가 그림을 배웠어요.  (···)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진실한 열정이 담겨 있었다. 


  *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 어떤  창조의 본능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 하지만 창조 본능이 하필이면 이 우둔한 중권 중개인을 사로잡아 파멸시키고,  그를 의지해 사는 사람들마저 불행에 빠뜨린다는 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  삶의 전환은 여러 모양을  취할 수 있고,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 스트릭랜드의 경우는 그 전환이 광신자에게처럼 단숨에,  사도들에게처럼 광포하게 왔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를 사로잡은 열정이 그것의 결과물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내 현실적인 감각으로 볼 때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 "그림 선생 말이오.  내 그림을 보고는 눈썹을 쓱 치켜올리더니 아무말 없이 가버리더군."  스트릭랜드는 낄낄 웃었다.  기가 죽은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남들의 평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  그 사람 정말 천재일세. 확실해.  지금부터 백 년 후에 말일세.  (···) 난 그 사람이 위대한 화가라는 걸 알아.  (···)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름다움이 해변가 조약돌처럼 그냥 버려져 있다고 생각해?  무심한 행인이 아무 생각 없이 주워 갈 수 있도록?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에서 만들어냈다고 해서 아무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아냐."


  *  스트릭랜드는 (···)  관능적인 사람이면서도 관능적인 일에는 무관심했다.  (···) 오직 마음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붙잡으려는 일념에 다른 것은 다 잊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격렬한 개성을 캔버스에 쏟아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미 자기가 아니다.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고 하나의 사물,  말하자면 자기 자아에게는 낯선, 어떤 목적의 도구가 되고 만다.  사랑에 감상이 전혀 배제된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어느 누구보다 그런 약점에 빠질 위인이 아니었다.  사랑이란 무엇에 사로잡혀 꼼짝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그런 상태를 견뎌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사용한다. 말에 대한 감각이 없어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함으로써 그 말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별것 아닌 것들을 기술하면서 온갖 것에 그 말을 갖다 쓰기 때문에 그 이름에 값하는 진정한 대상은 위엄을 상실하고 만다. 그저 아무것이나 아름답다고 말한다.  옷도 아름답고, 강아지도 아름답고, 설교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아름다움 자체를 만나게 되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 사람들은 가진 것을 남용함으로써 힘을 잃고 마는 것이다. 


  *  여자는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의 정신을 소유하기 전까지는 만족하지 못해.  약해서 지배욕이 강하지.  지배하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못해.  (···) 남자의 정신은 우주의 저 머나먼 곳에서 방황하는데 여자는 그걸 자기 가계부 안에다 가둬두려고  하는 거요.


  *  스트릭랜드의 그림이 내게 주었던 인상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느 그림 하나 사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항상 후회하고 있지만 말이다. 아주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만 셈이다.  이제 그 그림들의 대부분은 박물관에 들어가 있고 나머지는 돈 많은 아마추어 소장가들의 애장품이 되어 있다.  










 *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  내가 우연히 타히티를 여행하지 않았던들, 결코 이  책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이곳이 바로 찰스 스트릭랜드가 오랜 방황 끝에 이른 곳이었으며,  이곳이 바로 그가 자신의 명성을 확립시켜준 그림들을 그려낸 곳이었다.  (···) 타히티에서는 사정이 그에게 유리했다. 그는 자신의 영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 필요한 소재들을 사방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  스트릭랜드는 타히티에서 접촉한 사람들에게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들이 보기에 그는 늘 돈에 쪼들린 부둣가의 떠돌이에 지나지 않았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림을 그린다는 것뿐이었는데,  그 그림이라는 게 그들에게는 돼먹지 않아 보였다.  그가 죽고 나서 몇 해가 지나,  파리와 베를린 화상의 대리인들이 이 섬에 그림이 좀 남아 있지 않나 하고 찾아다녔을 때에야 그들은 비로소 자기들 가까이 대단한 인물이 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제야 이제 엄청난 값이 나가는 그림들을 자기들은 헐값으로 살 수 있었음을 깨닫고 안타까워했다. 











 *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  "스트릭랜드가 살던 곳에는 뭐랄까요, 에덴 동산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어요. (···) 이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외진 곳에,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  사방에는 울울창창 나무만 우거진 곳이죠  그야말로 색채의 향연 같았어요."  (···)  그는 다시 스트릭랜드를 찾아갔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스트릭랜드를 사로잡은 열정은 미를 창조하려는 열정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마음이 한시도 평안하지 않았지요. 그 열정이 그 사람을 이리저리 휘몰고 다녔으니까요."


  *  의사는 왜들 이렇게 이상스럽게 구나 하고 짜증스럽게 여기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스트릭랜드가 팔레트를 닦고 있었다.  이젤 위에 그림이 하나 놓여 있다.  (···) 그는 뚫어지게 스트릭랜드를 바라보았다.  이 병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의사는 온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 "거울을 들여다봐요.  영락없는 나병 환자 모양 아니오." 










  *  스트릭랜드가 이젤 앞으로 가더니 거기에 놓인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먼 길을 오셨겠소.  중요한 일을 알리러 온 사람에게는 보답이 있어야 마땅한 일이니 이 그림을 가지시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언젠가 이걸 가진 것을 기뻐할 날이 있을지도 모르오." 


  *  닥터 구트라에게 스트릭랜드가 죽어가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 그는 벽에 그려진 그림들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온통 야릇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 그림들엔 이상하게도 그를 감동시키는 무엇이 있었다. 땅바닥에서 천정에 이르기까지 사방의 벽이 기이하고 정교하게 구성된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기이하고 신비로웠다.  그는 숨이 막혔다.  이해할 수도,  분석할 수도 없는 감정이 그를 가득 채웠다. 


  *  그것은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신성한  것을 알아버린 이의 작품이었다. 거기에는 원시적인 무엇,  무서운 어떤 것이 있었다. 인간 세계의 것이 아니었다.  악마의 마법이 어렴풋이 연상되었다.  그것은 아름답고도 음란했다. "맙소사,  이건 천재다."  이 말이 입에서 절로 튀어나왔다.  (···) 그는 한때 인간이었을 주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움찔 놀라 물러섰다.  "아니, 눈이 멀었단 말인가."  "네, 일 년 가까이 앞을 보지 못했어요."









 *  "스트릭랜드가 자기 집의 벽 사방에 꽉 채워 그려넣었던 그 특이한 장식 그림이 오랫동안 내 머리를 떠나질 않더군요."  그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나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 스트릭랜드는 최후의 힘을 내어 거기에다 자신의 온 존재를 표현했던 것만 같았다.  그것이 마지막 기회임을 깨닫고 그는 묵묵히 자신의 삶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것,  자신이 깨달은 모든 것을 그 그림에 표현했음이 틀림없었다. 또한 그는 마침내 거기에서 평온을 발견했을 것이다. 


  *  앞을 못 보기 시작하면서, 그림을 그려놓은 그 두 방에 하루에도 몇 시간이고 앉아 그 그림을 바라보았던가 봐요.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말입니다.  (···) 집은 눈 깜짝할 사이에 타버리고 잿더미만 남더랍니다.  위대한 걸작이 그렇게 해서 사라져버린 거죠.


  *  스트릭랜드 본인도 그게 걸작인 줄 알았을 겁니다.  자기가 바랐던 걸 이룬 셈이죠.  자기 삶이 완성된 거예요.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고,  그것을 바라보니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 다음 자부심과 함께 경멸감을 느끼면서 그걸 파괴해 버린 거죠. 


















                                                            <페이지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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