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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연 May 27. 2024

우리의 정신은 망각의 세계로 스며든다 - <알레프>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281번. 








   알레프는  "다양한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는 장소" 입니다.  이것은 은유적으로 시대를 막론한 모든 작가들의 산물을 한데 모은 유일하고 무한한 공간으로 지칭될 수도 있습니다.  열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 소설집은 환상 문학의 틀 속에 담아낸 현대 사상의 현란한 만화경입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이 안에 문학적 '알레프'를 담아냅니다.    



【 엠마 순스 】 - 살해범이 피해자로 둔갑해 빠져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엠마는 과거에 자신을 강간한 로웬탈에게 복수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웁니다. 난생처음 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 후,  로웬탈을 찾아가 총을 쏴서 죽이고 그에게 강간당해서 죽일수 밖에 없었다고 거짓 진술을 합니다. 


  *  4월이 되면 그녀는 열아홉 살이 될 터였지만,  아직도 남자들은 그녀에게 거의 병적일 정도의 공포를 일으키는 존재였다······.  토요일에 그녀는 조바심에 잠을 깼다.  초조함이 아닌 조바심,  혹은 마침내 기다리던 날이 되었다는 기묘한 안도감이었다.  이제 더 이상 계획을 세우거나 상상할 필요가 없었다.  몇 시간만 지나면 기정사실이라는 간명한 결과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  중대한 사건들은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 사건 속에는 방금 전의 과거가 미래와 단절된 것 같거나,  아니면 그 사건들을 구성하는 부분들은 연속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그녀는 쾌락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고,  그는 정의 구현을 위해 이용되고 있었다.  (···) 슬픔과 역겨움이 그녀를 쇠사슬처럼 얽어맸지만,  엠마는 천천히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  엠마는 자기가 겪었던 모욕에 대해 벌주는 것이 급하다고 느꼈다.  너무나 철저하게 망신을 당했기에 그녀는 그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녀는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상당한 거구의 몸뚱이가 마치 총성과 연기에 의해 분쇄된 듯이 꼬꾸라졌다.  (···) 피가 그의 음탕한 입술로부터 갑작스럽게 솟구쳐 나와 그의 턱수염과 옷을 더럽혔다. 


  *  그녀는 안락의자를 헝클어 놓고,  시체의 재킷 단추를 풀었으며,  피가 튀긴 코안경을 벗겨 서랍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전화기를 들고 수없이 되풀이해 온 말을 반복했다.  "뭔가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로웬탈 씨가 파업을 핑계로 저를 여기 오라고 해서······  그 사람이 저를 강간했고,  제가 그를 죽였어요······."


  *  엠마 순스의 말투는 진실이었고,  그녀가 느낀 수치심도 사실이었고,  그녀의 증오도 진실이었다.  또한 그녀가 겪었던 능욕도 사실이었다.  단지 주변 정황과 시간,  그리고 한두 개의 이름들만이 거짓이었다. 









【 알레프 】 - 죽은 연인의 집을 찾은 주인공은 그녀의 사촌인 카를로스 아르헨티노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정상적이지 않은 정신의 소유자로 지구상의 모든 것을 시로 표현하겠다는 그에 의해 지하실에 감금되어 버리지만, 그곳에서 알레프를 만나게 됩니다. 


  *  2월의 어느 찌는 듯한 아침,  베아트리스 비테르보는 병마와 용감하게 싸우다가 세상을 떠났다.  (···)  "우주는 변할 수 있어도,  나는 그렇지 않을 거야."  라고 나는 다소 감상적인 허세를 부렸다.  나는 언젠가 나의 백해무익한 뜨거운 사랑이 그녀를 화나게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그녀는 죽었고,  그래서 희망도 없이,  하지만 굴욕도 없이 나는 그녀의 기억에 전념할 수 있다. 


  *  카를로스 아르헨티노는 지구의 모든 것을 시로 표현하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 그는 머뭇거리더니, 우리가 어떤 내밀한 것을 털어놓을 때 사용하는 무덤덤하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자기의 시를 끝마치기 위해서는 그 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지하실 한쪽 구석에  '알레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알레프'란 모든 지점들을 포함하는 공간 속의 한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부엌 지하실에 있어."   그는 걱정스러운 탓인지 말을 서둘렀다.  











*  고집스러운 태도에는 진실이 들어설 수 없는 법이지.  만일  '알레프' 속에 지구상의 모든 장소들이 들어 있다면,  거기에는 모든 별들과 모든 등불들,  모든 빛의 원천들도 있겠지."  (···)  카를로스 아르헨티노가 미쳤다는 사실은 나를 악의로 가득한 행복감으로 가득 채워 주었다.  (···) "몇 분만 지나면 자네는 알레프를 보게 될 거야.  연금술사들과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의 소우주이자,  널리 알려진 우리의 친근한 한마디,  '작지만 많은'  이란 말이 구체화된 것을 보게 될 거야."


  *  "자 내려가도록 해.  곧 자네는 베아트리스의 모든 모습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될 거야."  (···) 갑자기 나는 내가 위험에 처했다는사실을 깨달았다.  한 잔의 독을 마신 후,  나는 어느 미치광이에 의해 지하실에 감금되었던 것이었다.  카를로스의 허풍 속에는 내가 그 기적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 못 할 두려움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카를로스는 자신의 정신 착란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기가 미쳤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나를 죽여야만' 했다.  나는 막연한 불안을 느꼈고,  그것을 마약의 효력 때문이 아니라 꼼짝도 못하고 있는 자세 탓으로 여기려고 노력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바로 그때 나는 알레프를 보았다. 










 *  잠시 후 나는 그런 움직임이 그 구체 속에 담긴 현기증 날 정도의 광경들 때문에 생겨난 환영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레프의 직경은 2~3센티미터 정도 되는 것 같았지만,  우주의 공간은 전혀 축소되지 않은 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각각의 사물은 무한히 많은 사물들이었다.  그것은 내가 우주의 모든 지점들에서 그 사물을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 내 어두운 피가 순환하는 것을 보았고,  사랑의 톱니바퀴와 죽음으로 인한 변화 과정을 보았으며,  모든 지점에서 알레프를 보았고,   (···) 내 얼굴과 내장을 보았고,  네 얼굴을 보았으며,  현기증을 느꼈고,  눈물을 흘렸다.


  *  그 알레프는 돌기둥 한가운데 존재할까?  내가 모든 것을 본 순간,  나는 그 알레프를 보았고,  그런 다음 잊어버린 것일까?  우리의 정신은 망각의 세계로 스며든다.  그래서 나 자신도 세월이라는 비극적인 침식 작용 아래서 베아트리스의 모습을 왜곡하면서 잃어버리고 있다. 























                                                          <페이지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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