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연 May 25. 2024

행복은 끝이 없을 터였다 - <체호프 단편선>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70번.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어네스트 헤밍웨이 등에게 영감을 준  작가입니다.  현대 단편소설의 형식을 확립한 중요한 작가로 평가되며,  톨스토이는  "체호프는 세계 최고의 단편 작가."라고 극찬합니다.  아홉편의 단편에서 작가는 사소한 인물 군상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를 포착해냅니다. 



 【 공포 - 한 친구의 이야기 -  불륜이라는 사건이 배경역할을 하고,  주인공의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전면으로 부각되는 구성의 단편입니다.  실린은 삶의 불가해성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를 안고 살아갑니다.  때문에 친구가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실린은 대학 과정을 마치고 페테르부르크에서 근무하다가 서른 살에 직장을 버리고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  내가 보기에 그에게 필요한 것은 결코 농장의 성공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하루가 무사히 가기를 바랄 따름이었던 것이다. 










 *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예의 기도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  "햄릿 왕자가 자살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혹시라도 죽음 뒤의 꿈속에서 망령들이 나타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오.  (···) 나는 공상 속에서 암울하기 그지없는 수천 개의 장면을 만들어냈고,  이것들이 나를 고통스러운 광란으로,  한마디로 말해 지옥으로 이끈 적도 있어요. 하지만 단언컨대 그것이 현실보다 더 무섭지는 않았어요.  (···) 나의 병은 삶에 대한 공포지요.  (···) 사는 데 방해만 되는 불필요하고 시시한 짓거리들에 우리는 자신의 힘을 소진합니다. 이것이 무섭습니다."


  *  '그는 삶이 무섭다고 말했지.'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삶에 대해 격식을 차리지 말라고,  삶이 나를 짓누르기 전에 네가 먼저 삶을 부숴버려.  삶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취하란 말이야.'  테라스에는 마리야 세르게예브나가 서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껴안고 탐욕스럽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썹에,  볼에, 목에······.  


  *  드미트리 페트로비치의 공포는 나에게도 옮겨졌다.  (···)  '나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나는 자괴감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 그날 나는 페테르부르크를 떠났다.  그리고 그 이후로 다시는 드미트리 페트로비치와 그의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  사람들 말로는 그들이 지금도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 베짱이 】 - 한 여자가 이솝우화의 베짱이처럼 인생의 겨울이 다가온 뒤에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올가는 선량하고 고상한 의학도인 남편에게 예술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던 중 남편을 속이며  화가와 불륜에 빠집니다. 그러나 화가에게서도 버림받고,  아내의 허영심을 채워주려 밤낮으로 일하던 남편도 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  그는 겸손하게 말했다.  (···)  "당신 친구들은 자연과학도 의학도 몰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들을 비난하지는 않잖아.  모두에게는 각자의 일이 있어.  나는 풍경화나 오페라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런 생각은 해.  (···) 나는 이해를 못해. 하지만 이해를 못한다고 해서 거부한다는 건 아니잖아."


  *  슬픔도 걱정도 없는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이 흘러갔다. 현재는 멋졌다.  그리고 진작에 천 개의 행복을 약속한 봄이 미소를 지으며 저 너머로 다가오고 있었다.  행복은 끝이 없을 터였다!  


  *  고요한 칠월의 달밤,  올가 이바노브나는 강물과 아름다운 강변을 둘러보면서 볼가 강 여객선의 갑판 위에 서 있었다.  랴보프스키는 물위에 드리워진 검은 그늘이 차라리 꿈이라 말하고 있었다.  (···)  그는 그녀의 뺨에 입김을 불며 속삭였다.  "한마디만 해줘요.  그러면 난 목숨도 예술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는 심한 흥분 때문에 말을 더듬었다.









*  한겨울 무렵부터는 드이모프도 자신이 속고 있음을 눈치 챈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자기 양심이 찔리기라도 한 듯 아내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으며 그녀와 마주치고도 행복한 미소를 짓지 않았다. 


  *  요즘 들어 올가 이바노브나의 행동거지는 도무지 조심스럽지 못했다. 매일 아침 그녀는 매우 뒤숭숭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 이런 생각을 했다.  (···)  랴보프스키가 자기 남편을 앗아갔으며 그래서 이제는 자신에게 남편도 랴보프스키도 안 남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  갑자기 가슴이 쓰라릴 정도로 드이모프가 불쌍해졌다.  자신에 대한 그의 끝없는 사랑,  그의 젊은 생명,  (···) 올가 이바노브나는 침실에 앉아서 이것은 남편을 속인 죄로 신이 자신을 벌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 그녀에게는 이미 볼가 강에서 보낸 달빛 어린 저녁도,  사랑의 고백도,  오두막에서의 시적인 생활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로지 생각나는 것은 자신의 공허한 변덕과 어리광 때문에 손발이 온통 더럽고 끈적거리는 무언가로 뒤덮였으며,  그것은 앞으로 결코 씻어낼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  "선하고 순수하고 사랑을 담은 영혼이었지.  (···)  황소처럼 낮이나 밤이나 일했지만 아무도 그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어.  이 젊은 학자가,  미래의 교수가,  과외 진료 일거리를 찾아다니고 밤마다 번역을 해서 돈을 댔던 것이 이 따위······   이 따위 형편없는 넝마 조각이라니!"  코로스텔료프는 증오를 담은 눈으로 올가 이바노브나를 노려보더니 두 손으로 침대 시트를 북 찢어버렸다. 


  *  올가 이바노브나는 그와 함께 했던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돌이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참으로 얼마나 비범하고 드문 인간인지,  자기가 알았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간인지를 문득 깨달았다.   (···) 그녀는 남편에게 설명하고 싶었다.  실수가 있었다고,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고,  인생은 아직도 멋지고 행복할 수 있다고, 그는 드물고 비범하고 위대한 인물이며 자신은 일생 동안 그 앞에서 공경하고 기도하며 성스러운 경외감을 느낄 것이라고······.  "드이모프!"  남편이 이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녀는 그의 어깨를 흔들며 이름을 불렀다. 










【 내기 】 -  감옥에 유폐된 한 인간이 독서와 구도의 노력을 통해 궁극의 진리에 이른다는 내용입니다.  돈 많은 은행가가 젊은 변호사에게 십오 년 동안 독방에 갇혀 있다 나오면 이백만 루블을 주겠다는 내기를 합니다.  약속된 날이 다가오자 그동안 재산을 탕진해버린 은행가는 변호사를 죽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변호사는 편지를 남겨두고 약속 마감 다섯 시간 전에 독방에서 사라집니다. 


  *  그에게는 십오 년 동안 바깥채의 문턱을 넘을 권리,  살아 있는 사람들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을 권리,  그리고 편지나 신문을 받아볼 권리를 박탈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악기를 지니고 있거나 책을 읽고 편지를 쓰는 일,  그리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허용되었다.  (···) 변호사 쪽에서 조금이라도 조건을 위반할 경우에는,  설령 기한을 마치기 이 분 전이라 할지라도 은행가는 그에게 이백만 루블을 지불할 의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  수인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읽었다.  자연과학을 공부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바이런과 셰익스피어를 요구했다.  종종 그로부터 화학,  의학 교과서, 장편소설,  철학이나 신학 논문 따위를 동시에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메모가 오기도 했다. 









 *  노은행가는 이 모든 것을 회상하며 생각했다.  '내일 열두시에 그는 자유를 얻을 것이다.  약속한 대로 나는 그에게 이백만 루블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돈을 주면 모든 게 끝난다. 나는 여지없이 파산할 것이다'  십오 년 전만 해도 그에게는 계산이 안 될 만큼 많은 돈이 있었지만 지금은 스스로에게 묻기가 두려웠다.  자신의 돈과 빚 중에 어느 쪽이 더 많을까? 


  *  노인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 "부도와 파산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인간이 죽어주는 것뿐이야!"


  *  책상 앞에는 여느 인간과는 다른 한 남자가 꼼짝 않고 앉아  (···) 자고 있었다······.  비스듬하게 숙인 그의 머리 앞에 책상 위에는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고 거기에 자잘한 글씨로 무언가 씌어 있었다.  (···) '십오 년 동안 나는 속세의 삶을 면밀하게 연구했다.  (···) 그대들이 아무리 오만하고 현명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죽음은 그대들을 마루 밑의 쥐새끼들처럼 지상에서 쓸어버릴 것이다.  (···) 나는 그대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한때 천국을 꿈꾸듯 갈망했으나 이제는 하찮게 보이는 이백만루블을 거부하겠다.  그 돈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기 위해 나는 약속한 기한이 다 되기 다섯 시간 전에 여기에서 나갈 것이며 그럼으로써 스스로 계약을 위반하는 바이다······.'













                                                           <페이지생략>


이전 05화 제정신이란 현실을 알아보는 능력이야 - <핀처 마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