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연 May 22. 2024

제정신이란 현실을 알아보는 능력이야 - <핀처 마틴>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419번.






   핀처 마틴은 이미 죽었음에도 자신의 죽음을 필사적으로 속이고 있는 인물입니다.  작가는 죽음으로 인해 주인공의 의식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담아냅니다.  이 작품은 평론가들로부터  "읽을 수 없다."는 평을 받기까지 했지만,  골딩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는 소설입니다.  핀처 마틴이라는 인물은 골딩의 생애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 작가의 시선 >> - 강간, 살인 등 못된 짓을 일삼다 해군에 징집되지만, 그곳에서도 동료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 합니다. 배가 난파되어 바다 한가운데에 고립된 후 온갖 상상의 세계를 만들며 살아남으려 발버둥 칩니다.  결국 자신의 악행을 후회하게 되지만, 상상의 세계는 깨지고 맙니다.


  *  머지않아 날이 밝을 거다.  난파선의 잔해가 보일 거다.  난 죽지 않을 거다.  내가 죽을 리 없다.  나만큼은······.  귀중하니까.  바다의 감촉과는 아무 상관이 없던 감정이 불현듯 치밀어 오르면서 그는 기운을 차렸다.  소금물이 그의 눈에서 줄줄 나오고 있었다.  그는 훌쩍거리며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살려 줘,  누구라도······  살려 주세요!"









*  그는 얼굴을 뒤튼 채 물속에서 아치를 그렸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살려 달라고, 이 우라질 것들아, 망할 놈의 것들아, 빌어먹을 것들아······.  살려 달라고!"  (···)  그를 처음 소생시킨 것은 통증도 아니고 흑백의 패턴도 아닌,  소음들이었다.  바다는 그를 매우 조심스레 다룬 바였으나 다른 곳에서는 계속해서 포효하고 쿵쾅대고 제 위로 무너졌다.  바람 역시 비굴한 물 말고 결투할 무언가가 주어진 터라 암석 주위에서 쉭쉭대고 바위틈 속에서 돌풍성으로 호흡하고 있었다. 


  *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 사악한 기운이 스며,  처음 물속에서 고군분투할 때처럼 경련성으로 공황이 오는 게 아니라, 깊숙하고도 광범위한 두려움이 밀려들어 그는 뭉툭한 손가락들로 바위를 집게발처럼 움켜잡게 되었다.


  *  시간이 방울방울 지나갔다.  










*  컴컴한 아치 뒤편의 두개골 속에서 예의 바늘이 그를 쫓아 내뻗었다.  그가 눈알을 움직이면 그 바늘도 움직였다.  눈을 떴더니 눈이 그 즉시 초록 해초 속에서 물로 채워졌다.  (···)  눈 각각에서 소금물이 더 나와서 바다의 흔적들과 그의 뺨에 닿는 용액에 합류했다.  그의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  오한과 탈진은 그에게 뚜렷이 말했다.  포기해,  그것들은 말했다.  가만히 누워 있어.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살아남겠다는 생각을 포기해.  집어치우고 놓아줘.   (···) 이 암석 위에서는 한 시간이 한 세월이지.  네가 잃을 게 뭐가 있어?  여기서는 고문받을 일밖에 없는데.  포기해. 놓아줘. 


  *  그는 통증과 더불어 누워 있으면서 일광과 새로운 하루라는 사실을 숙고했다.  (···) 척박한 암석의 어느 바위틈에 깊숙이 쑤셔 넣어진 한 남자가 되었다.  지식과 기억이 정연하게 잇따라 역류했고,  그는 아까의 깔대기를,  아까의 도랑을 떠올렸다.  그는 백주 대낮의 한 조난자가 되었고 본인 처지의 불가피성이 그에게 닥쳐들었다.  










 *  갈매기들이었다.   (···) 그는 비치적대면서 나무처럼 경직된 양팔로 그들 사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야!  저리들 가!  꺼지라고!"   (···) 그가 덜덜 떨면서 그렇게 누워 있는 동안 초록색 하늘이 청색, 남청색으로 변했고  갈매기들이 떠돌아 내려왔다.  그의 몸은 오한에 굴복했지만 한 바탕씩 오한이 오는 사이사이에는 상당히 가만히 누워 있었다.  입은 벌어져 있었고 눈은 암흑 속을 안절부절 응시했다.  


  *  "난 살아남을 거야!"  그는 자신 아래쪽의 태양과 더불어 그것이 달팽이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고 머릿속으로는 지구의 축에 기반한 공전과 태양 주위를 일 년 내내 도는 지구의 여정에 혼란을 느꼈다.  


  *  그는 본인이 어디 있었는지를,  또 그 시간과 그 말들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훌쩍하고 거미처럼 가늘디가는 사람형상이 반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 "우리를 현재 있는 그대로 상정하면 천국은 완전한 무(無)일 거야.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은. 알겠어?  우리가 생명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일종의 검은 번개일 거라고."  그러나 그는 대답하면서 웃고 있었고 행복해 했다.









 *  그는 주저앉았다.  종이들과 소책자는 여전히 축축했지만 그는 소책자를 집어들어 열어 보았다. 표지 안쪽에는 사진 한 장 위에 투명한 보호막이 씌워져 있었다.  그는 보호막을 통해 들여다보고 수증기가 서린 인물 사진을 알아보았다.  정성 들여 매만져 둔 머리털,  강인하고도 미소를 띤 얼굴,  목에 둘린 하얀 실크 스카프가 보였다.  그러나 세부는 영영 사라져 버린 터였다. 수증기와 갈색 이염 사이로 그에게 어렴풋이 미소 짓던 그 청년은 희미한 갈색의 세상 속에서 증조부들이 자세를 잡고 찍은 인물사진들만큼이나 아득했다.   (···) 그는 쉰 목소리를 쓰면서 또 일종의 경악감을 품고 소리 높여 내뱉었다. "크리스토퍼 해들리 마틴.  마틴, 크리스.  나는 언제나의 나 그대로다!"  


  *  "바라야 하는 목표는 구조되는 거야.  그러려면 최소한의 필수 조건은 생존이야. 이 몸이 견뎌 내도록 유지해야 해.   (···) 명줄이 끊기지만 않으면 이렇게 섬뜩한 막간극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대 어떤 미래를 이어 줄 테니까.  (···)  내 정신을 경계해야 한다. 광기가 나한테 슬금슬금 다가와서 불시에 덮치게 두어서는 안 돼. 벌써부터······  환각을 예상해야 한다. 그게 진짜 싸움이야."   (···) 그는 단호하게 바다를 바라보았다. 






 



  *  침대보가 깔린 침대가 그립다. 맥주 1~2파인트랑 더운 밥이 그립다.  뜨끈한 목욕이 그립다.


  *   시간의 원천은 무한했고 이에 처음에는 목적의식이었던 것이 검뿌예지고 끝없어지며 희망 없이 되었다.  그는 마음속에서 희망을 찾아보기 시작했으나, 그 온기는 이미 가셨거나 설사 그가 뭐든 찾아냈다 해도 그것은 지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헛것에 불과했다.  그는 중얼거렸다.  "난 구조될 거야.  난 구조될 거야."  


  *  그는 마치 뭇사람 앞에서 말하려는 참인 양 목청을 가다듬었다.   (···) "한때 나는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을 스무 장은 가진 남자였지······.  이런저런 내 모습이 담기고 확인 도장 및 인장으로 아래쪽 오른편 구석에다 서명을 휘갈겨 둔 그런 사진 말이야.  해군에 입대했을 때조차 내 신분증에는 그 사진이 있어서 이따금씩 내가 누구였는지 들여다보고 확인할 수가 있었어.  (···)  그런데 이제 나는 이 안에서 이런 꼴이 되어, 엄청 여러 군데가 욱신대는 멍든 육신,  누더기 다발에다 암석 위의 그놈의 바닷가재들이나 되어 있잖아. "





 




  *  나는 며칠 사이에 금방 구조될 거야.  걱정해선 안 돼.  과거에서 튀어나오는 예고편들은 괜찮지만,  일어난 적도 없는 것들을 보게 될 경우는 주의해야 해.  예를 들면······.  내게는 물과 식량과 지성과 쉼터가 있잖아.


  *  "살아 있자!"  그의 앞쪽에 있는 양다리는 하얀 반점들이 뒤덮고 있었다.  (···) "내가 너희 염병할 반점들에 붙는 이름을 알지.  두드러기, 식중독이란 거야."  그는 잠시 말없이 누워 있었다.  증기는 피어오르고 하늘거렸다. 반점들은 윤곽이 뚜렷했으며 죽은 백색의 것이었다.  그것들은 부어올라 있어서 부푼 손가락들로도 그것들의 윤곽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  그는 납작한 공기,  흡묵지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  "제정신이란 현실을 알아보는 능력이야.  내가 처한 현실은 무엇이지?  나는 대서양 한복판의 암석 위에 외로이 있어.  내 주위로는 광대한 넓이에 빙빙 도는 물이 있고. 하지만 이 암석은 고체야.  이 암석은 내려가서 해저와 합류하고,  또 그 해저는 내가 알아 왔던 바닥들과,  해안 및 도시들과 합쳐지게 되지.  이 암석은 고체고 움직일 리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해.  이 암석이 움직인다고 하면 그럼 내가 미친 거야.  (···) 그러나 나는 이겨 내고 있어. 이제 삶이 새로이 시작된다는 확실한 직감이 있단 말이야."









 *  한순간 그는 자신이 추락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더니 암흑의 구렁텅이가 찾아왔고 그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 현재가 언제가 되었든지 간에, 현재와 두려움의 순간 사이에는 간격이 있었다. 이런 간격은 그에게 그 두려움을 초래한 게 무엇이었는지를 잊게 해 주었다.  (···)  그것은 비-존재의 구렁텅이,  세상에서 빠져나가도록 열린 우물이었으며 이제는 그저 존재한다는 수고만으로도 너무도 진이 빠진 나머지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겨우 옆으로 누워서 살아남는 게 다였다. 이내 그는 생각했다.  '그때 나는 죽었다.  그것이 죽음이었어.  나는 겁먹어서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이제야 나의 조각들이 한데 모였고 나는 막 되살아난 거지.'


 *  이제 할 만큼 했나,  크리스토퍼?


 *  표류선이 엔진은 멈춘 채, 제 가속도의 끝물과 서풍의 다그침으로 부두를 향해 들어왔다.   (···)  "혹시 마틴을 걱정하시는 걸지요. 마지막에 고생을 했을지 안 했을지.   (···) 그렇다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시신을 보셨잖습니까. 마틴은 심지어 방수 장화를 벗어 던질 짬도 없었습니다."














                                                            <페이지생략>


이전 04화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 <동물농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