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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연 May 18. 2024

구원이란 없었다 - <풀잎은 노래한다>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167번. 





     식민지 사회에서의 흑백 간 갈등 문제를 탁월한 언어로 형상화한 소설입니다.  분열된 문명과 약자를 억압하는 폭력을 회의주의적인 시각으로 보는 도덕적 휴머니즘이 작품의 바탕을 이룹니다.  200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도리스 레싱에게 스웨덴 한림원은, "인간성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기본적인 특징들이 좌절과 혼돈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을 그려 보였다." 고 언급합니다.  

 


 << 작가의 시선  >> -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가난을 혐오했던 메리는 리처드와 결혼 후에도 역시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게 됩니다. 도시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무능해진 자신의 모습과 만나게 되고, 내면세계는 붕괴되어갑니다.  메리의 불안감은 원주민 하인들에게로 향하게 되고, 특히 흑인 하인 모세에게는 두려움을 느끼며 기묘한 관계를 이어가다 결국 그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됩니다. 


   *  리처드 터너의 아내인 메리 터너가 어제 아침 그들의 농장 주택 앞 베란다에서 피살된 채 발견되었다.  경찰이 체포한 하인이 범행 일체를 자백했으나 그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  젊은이들은 대부분 (···) 흑인 원주민들이 마치 소나 말처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걸 듣고 보고 느끼면서 그들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경악했다.  흑인 원주민들을 같은 인간으로 대우할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기에 놀라움이 더욱 컸을지도 모른다.    


  *  아무리 죽었다 할지라도, (···)  백인 여자 곁에 흑인 남자를 앉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메리를 찾아갔을 무렵, 리처드는 그녀가 현실적이고 차분하며 적응력이 뛰어난 여자이기에 농장에서 이삼 주만 생활하다 보면 리처드 자신이 원하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자기 나름대로 가정을 세워 놓은 다음,  그 가정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 메리는 구체적으로 자신이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마냥 꿈에 부풀어 있었다.  리처드가 솔직한 심정으로 창피를 무릅쓰고 경고했던 가난은 또 다른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했으며,  메리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  메리는 자신이 보기에는 가슴 아프고 쓰라리게 여겨지는 경험들을 리처드 본인은 고난을 딛고 일어선 성공담처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 자신이 옛날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앉아 있으며,  어머니가 살림을 꾸려 나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메리는 우선 집 안을 샅샅이 둘러보면서 하인이 해 놓지 않은 일을 찾았다.  그리고 옷 서랍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는데 손을 댄 흔적은 없었다.  그러나 깜둥이들이란 교활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이기 때문에 결코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  "나는 외롭지 않아요."  메리가 솔직하게 말했다.  외로움이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고자 하는 바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교제가 없었으므로 외로움이 알게 모르게 정신을 속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메리는 겉잡을 수 없는 혐오감으로 치를 떨었다.  (···)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하루 종일 허드렛일을 하면서 지내는 신세가 되다니······.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불쌍해져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  메리의 얼굴에는 참아야 할 일이 생길때마다 주름이 하나씩 잡혀 갔다.  (···) 어떤 때는 인생에서 최악의 것만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나이 든 꿋꿋한 여인의 닳고 닳은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또 어떤 때는 히스테리가 극에 달해서 구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 버린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  메리는 자신이 흑인들을 지독스럽게 혐오하며 그들에게서 적대적인 따가운 눈총을 받을 때는 정말 속이 뒤집히는 것 같더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리처드는 메리가 화났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이오.  언젠가 샘슨 노인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  '주인님께서는 우리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하시지만요.  백인 몸에서 나는 냄새만큼 참기 어려운 것도 없어요.'라고"









*  국가의 위기도 그렇겠지만 개인의 위기 또한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런 위기가 있었음을 깨닫는다.  안일한 리처드의 입에서 끔찍스러운  '내년'이라는 말이 나오자 메리는 역겨웠다.  (···) '내년'이라는 말에 과연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또 한 번의 실패?  기껏해야 형편이 조금 괜찮아진다는 의미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기적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껏 그래 왔듯이 변화란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  공상을 하면서 만족을 느끼려면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희망이 모두 사라져 버린 메리는 공상마저 할 수 없었다.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미래 속에서 펼쳐 보다가 미래란 없다고 스스로에게 힘없이 말하면서 도중에 그만두곤 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무(無). 공허.









  *  그녀의 시야는 집 안에만 고정되어 폭이 좁아진 지 이미 오래였다.  (···) 그러나 그 원주민에 관해서는 여전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메리의 정신 속에 깨어 있는 부분은 그것밖에 없었다.  


  *  그는 성깔 사나운 백인 여인을 만지기가 죽기보다 싫다는 듯 상당히 머뭇거리면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침실 쪽으로 데려갔다.  메리는 자신의 몸이 방을 가로질러 침실 쪽으로 가볍게 밀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 흑인 남자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는 순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흑인 원주민과 살갗을 닿은 적이 없었다.  


  *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  감정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었다.  지금의 그녀처럼 사람들은 항상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을 내리지 않겠는가.  불쌍하고 추하고 정신마저 이상해진 여자. 










 *  그녀는 그날 밤이 지나기 전에 자신이 최후를 맞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날 밤에 최후를 맞이해야 한단 말인가?  자기 자신의 판단과, 죄가 없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에게 쫓기는 듯한 느낌 사이의 갈등으로 생각은 방향을 잃고 말았다. 


  *  구원이란 없었다.  (···) 그녀는 궁금한 마음에 과거를 더듬어 보았다.  아, 기억나는 것이 있었다.  아주아주 오래전에 메리는 어려움에 처해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괴로워할 때,  농장을 경영한다는 한 청년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때는 그와 결혼하면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침내 구원이란 없으며 죽을 때까지 농장에서 살게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닫자 지금과 같은 공허감을 느꼈다.  













                                                            <페이지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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