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방랑자들>

책속 글귀로 명작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399번.

by 이태연














여행, 떠남과 관련된 100여 편이 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패치워크처럼 엮어낸 작품입니다. 어딘가로부터, 무엇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어딘가를, 무엇을, 누군가를, 자신을 향해 다다르려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동하는 방랑자들의 이야기입니다.



【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는 】


* 어딘가로부터 출발해서 어딘가에 도착하기까지의 어느 지점. '틈새'에 해당하는 그런 지점이 과연 존재할까?


* 사라지고 없어지는 사람들. 그러다 갑자기 공항 터미널에 나타나서는 출입국 관리소에서 여권에 도장을 받고서야 다시 존재하기 시작하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매 순간이 서로 다른 것이며, 절대 반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순간을 즐기며 충만한 삶을 살려고 애쓴다.







SE-782364a9-1054-4a65-9854-9b94e0704a9a.jpg








【 적절한 시간과 장소 】 -


* 많은 이들은 세상의 좌표 어딘가에 시간과 공간이 서로 딱 들어맞는 완벽한 지점이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래서 다들 여행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 당신은 어쩌면 위대한 사랑이나 놀라운 행운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복권에 당첨되거나, 오랜 세월 모두가 헛되이 갈구하던 놀라운 신비를 풀 수 있게 되거나, 어쩌면 죽음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오늘 그런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SE-c3d5915d-6d41-43c1-a081-1a7545636ba8.jpg







【 말하라! 말하라! 】 -


*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모든 상황을 일일이 털어놓고 모든 상태를 명명하라. 단어를 찾고 그것들을 입에 올려라. (···)그들이 '말하고, 또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 보라. "나는 말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없는가? 누군가가 말한다. 고로 누군가가 존재한다?


*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라. 은유, 우화, 망설임, 끝맺지 못한 문장들, 동사 바로 뒤에 거대한 심연이 도사리고 있기라도 한 듯 중간에 문장이 끊기더라도 개의치 말라. (···)말로 내뱉어진 생명은 구원을 받는다. (···)성인이 우리에게 이미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항상 덫에 걸리는 법이라고.






SE-79106914-5f33-48e0-a3d1-ae5c766aa05b.jpg








【 방랑자들 】 - 장애인 아들을 둔 아누슈카는, 어느 날 집을 나가 지하철역 노숙자로 살아갑니다.


* 실컷 울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했다. 조용한 곳, 하지만 텅 비어 있지는 않은 곳, 자기보다 더 큰 존재, 삶에 지쳐 떨고 있는 자신을 향해 두 팔을 옆으로 길게 벌려 주는 존재가 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어야 했다.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아누슈카가 갑자기 말을 꺼내면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주소는 알아?" "네." 아누슈카가 대답하고는 자신의 주소를 읊는다. "쿠즈니에츠카 46번길 78호······." "그럼 잊어버려." 노파가 입안에 음식물을 가득 넣은 채로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SE-1107a346-7c10-46bf-b166-b4efb494da2a.jpg








* 아누슈카는 지금껏 수없이 많은 흥정을 시도했다. 신과 성모 마리아, (···)심지어 모호한 세상과 운명을 대상으로도 그녀는 거래를 하고자 했다. 피에티아 대신 저를 데려가세요. 제가 대신 아프겠습니다, 제가 대신 죽을게요. 아들의 병만 낫게 해 주세요.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이들의 목숨도 걸었다. 과묵한 자신의 남편을(그곳에서 총에 맞게 해 주세요) 그리고 시어머니를(뇌졸증에 걸려 쓰러지게 해 주세요) 내세웠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녀의 제안에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 아누슈카는 청년들에게서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청년들의 모습에서 피에티아가 보였다. 자신의 아들과 비슷한 또래였다. 피에티아가 그녀의 몸속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지금껏 한 번도 세상 밖으로 내놓지 않았던 것처럼, 피에티아가 거기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누슈카는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눈물이 계속해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도 울어서 머지않아 눈물이 다 말라 버릴 것 같았다.







SE-d9a10cf1-b3ab-4c8f-9e4c-558a957c32a5.jpg








【 날뛰는 여인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


* 움직여, 몸을 흔들어, 걸어, 뛰어, 도망쳐! 네가 그 사실을 잊고 멈춰 서는 순간, 그의 거대한 손이 너를 낚아채서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 멈추는 자는 화석이 될 거야. 정지하는 자는 곤충처럼 박제될 거야. 심장은 나무 바늘에 찔리고, 손과 발은 핀으로 뚫려서 문지방과 천장에 고정될 거야. (···)움직여, 계속 가.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



【 심지어 】


* 차를 몰면서, 나는 흑백 광고판을 지나친다. 거기에는 영어로 이렇게 적혀 있다. "예수님은 심지어 당신도 사랑하십니다(Jesus loves even you)" 나는 예기치 못한 격려에 고무되었다. 다만 '심지어(even)'이라는 글귀가 살짝 마음에 걸렸다.







SE-d1dd14f0-d18b-4eaf-adb2-6128593592ab.jpg








【 벽 】


* 여기 여행의 끝에 이르렀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주의하라. 표지판을 따라, 역을 따라 복잡한 미로를 통과하라. (···)길은 갑자기 벽 앞에서 끝난다. 도시 전체처럼 새하얗고 높은 그 벽은 도저히 넘을 수 없다. 아마도 이것은 보이지 않는 성전의 벽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일 뿐, 우리는 끝에 이르렀고 거기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 벽 앞에서 놀라는 사람들, 혹은 이마에 맺힌 땀을 식히는 사람들, 피로와 실망에 주저앉았다가 아이들처럼 벽에 바짝 달라붙는 사람들을 보면 절대 놀라지 말 것.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페이지생략>


이전 04화삶은 그 자체로 예술 작품입니다-<인생의 베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