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트 뭉크 <절규>, <태양>
뭉크하면 <절규>죠. 공포에 질린 얼굴을 감싸고 절규하는 사람의 모습은 보는 사람의 몸까지 떨리게 만듭니다. 붉게 일렁이는 하늘과 검푸르게 휘몰아치는 물은 뭉크 내면의 공포를 그려 넣은 것 같습니다. 하늘은 타는 불처럼 일렁거리고 물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일어서 있습니다. 온 자연이 힘을 합쳐 공격합니다. 몸서리치는 공포 앞에 선 한 사람의 비명이 들리는 듯합니다. 이 공포는 전적으로 한 사람의 몫입니다. 다른 두 사람은 평온하게 걷고 있으니 말이죠. 저들은 노을 지는 하늘과 잔잔한 물결이 흐르는 곳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만 했던 공포의 무게입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극심한 불안과 고통의 내면을 감히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뭉크의 내면을 휩쓸며 지나가는 공포는 절규로 쏟아져 나와 작품이 되었습니다.
뭉크가 평생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힘들어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죠. 그래서 절규는 항상 뭉크의 내면을 가장 잘 대변한 그림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저녁노을이 지는 한가한 시간에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뭉크의 내면을 상상하는 것은 마음 아픈 일입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사연으로 상처받은 내면을 지니고 살아갑니다만, 그것을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죠. 내면을 인정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풀어내는 작업은 참 용기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절규>를 대할 때마다 자신의 아픔을 그림으로 꺼내놓은 화가가 부디 자신의 뛰어난 작품으로 마음의 위로와 치유를 받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뭉크에 대한 다큐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이 그림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품명이 무려 <태양>입니다. 뭉크와 태양이라니요.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태양, 그것도 떠오르고 있는 태양, 찬란한 빛을 거침없이 뿜어내는 태양입니다. 절규하는 뭉크와 힘 있게 떠오르는 태양 앞에 선 뭉크는 쉽게 조화되지 않았습니다. 보는 이마저 떨게 만들 만큼 극도의 공포를 가진 사람이 저토록 눈부신 태양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이 어찌나 생경스럽던지요. 그때 알았죠. 내가 알고 있는 뭉크는 전체의 뭉크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일몰이 아니라 일출임을 확신할 수 있는 태양이죠. 바다 위로 떠오르는 태양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의 개선행진처럼 위풍당당합니다.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바다에 모든 적진을 침몰치킨 장군은 영웅처럼 솟아오릅니다. 태양에서 쏟아져 나오는 강력한 빛줄기들은 휘몰아치는 공포를 찔러 쪼개놓았습니다. 물은 정복당했고, 하늘은 태양을 위한 무대가 되었죠. 절규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습니다. 공포는 떠오르는 태양에게 압도당해 버렸습니다. 그림 밖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뻗어 나올 것 같은 햇살은 선명하게 말합니다. 빛이라고, 희망이라고 말이죠.
작은 사람의 몸 안에 이처럼 극명한 두 가지 세계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사람을 우주라고 표현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나의 관념대로라면 뭉크는 일생 우울해야 했습니다. 그 우울로 어둡고 침울함이 가득한 명작을 남기고 젊은 나이에 요절했어야 맞는 겁니다. 하지만 뭉크는 나의 좁은 한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태양>을 그렸습니다. 그는 확실히 비통할 만한 많은 일을 겪었고 그만큼 아팠지만 태양을 보았고, 빛을 비추며 장수하였습니다. 무엇이 우울해야 했던 뭉크에게 <태양>을 그리게 했을까요? 좁은 한계에 갇혀있는 나에게 이 그림은 그래서 한동안 혼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태양>은 조금씩 마음에 더 깊이 그리고 더 크게 들어왔습니다.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연달아 누나와 동생도 병으로 잃은 뭉크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습니다. 가난과 우울은 아주 어릴 때부터 뭉크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었죠. 이러한 일들이 뭉크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틀림없습니다. 마음에서 뻗어낸 불행이라는 줄기를 뭉크는 그림으로 풀어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태양>을 보면서 느꼈습니다. 뭉크의 마음에는 불행이라는 줄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는 분명히 희망이라는 줄기도 뻗어냈습니다. 그 희망은 새싹이 아니었습니다. 강렬하고 솟아오르며 정복하는 희망이었죠. 뭉크는 확실히 풍성한 나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 뭉크에게 희망이라는 줄기를 뻗어내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는 자신의 내면에 많은 길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그의 출생과 성장과 배경은 그를 한계 짓지 못했습니다. 뭉크는 좌절과 혼돈과 아픔 속에서도 내면을 충실히 걸었을 테고, 자유롭게 방향을 바꿨을 겁니다. 그는 한쪽으로는 자신의 배경을 받아들였고 다른 쪽으로는 새로운 것을 탐색하며 걸었겠죠. 그것은 뭉크의 길이 되었을 테고, 거기서 태양을 만났습니다. 태양 역시 뭉크의 내면이었습니다. 태양을 만난 뭉크는 넓어졌고 풍성해졌습니다.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나를 빈약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나의 어린 시절과 배경, 경력 그리고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으로 나를 결정짓는 일은 어쩌면 자신을 가지치기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모르는 나를 탐구하고 나의 내면으로 모험을 떠나 본 적이 있는지, 나의 아픔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상처를 덮고 새살이 돋은 자리에 무엇이 피어났는지를 본 적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한 사람이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깊고 넓은 영역일지도 모릅니다. 읽어보지 못한 수만 권의 책이 있고 가보지 못한 수백 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만나보지 못한 다양한 사람들이 있죠. 그래서 마음이 급해진 적이 있습니다. 이 드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넓어지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시야를 넓히기 위해 더 많이 읽고 여행하고 대화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뭉크의 작품들을 대하면서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가 물질적인 세계만이 아니라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직 내면으로 떠나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아직 나에게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나라는 미지의 세계는 여전히 안갯속에 있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죠. 그 세계에 어떤 단어들이 있는지, 어떤 나라가 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 있는지 나는 아직 모릅니다. 그토록 나를 원하면서도 정작 나라는 미지의 영역을 여행하는 것에는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보고 듣고 읽은 것들은 나를 넓히기도 했지만, 한계 짓기도 했을 겁니다. 넓어지는 일과 한계 짓는 일을 구분하려면 나는 반드시 내 안에 있는 울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를 설명하는 배경들과 상황들은 동시에 나를 한계 짓는 단어들임을 깨닫습니다. 나를 정의하는 것들은 나의 주변으로 결정되고 있었죠. 그것도 진실한 나이겠지만, 나는 가난한 나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에게서 뻗어낼 수 있는 가지가 고작 하나뿐이라면 슬픈 일이겠죠. 상황을 뛰어넘어 한계 밖의 나를 만난 뭉크에게서 배웁니다. 자신이 누구였든 태양을 보았던 뭉크처럼,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든 태양을 그려낸 뭉크처럼 나도 내 안에 다른 가지들을 찾겠습니다. 풍성하고 무성한 나무로 완성될 나를 기대합니다. 절규하는 나를 외면하지 않고 태양처럼 솟아오르는 나를 불가능으로 여기지 않으려고 나는 지금 미지의 세계로 갑니다. 이 미지의 세계에서 만나는 내가 누구든 반갑게 악수하겠습니다. <절규>도 명작이고, <태양>도 명작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