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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Oct 06. 2021

쇼핑

    내 엄마와, 내 아들 주영이와, 나. 

우리 식구 세 사람은 오랜만에 백화점을 향해 집을 나섰다. 쇼핑이라니, 얼마나 화려한 단어인가⋯. 추워지기 전에 엄마는 따뜻한 이불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내가 그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며 혼잣말을 하는 것을 나는 벌써 몇 번 들었다. 그리고 주영이는 청바지를 하나 새로, 그리고 나는 편한 구두 한 켤레 싸게 살 수 있다면 하나 사고 싶다. 얼마 전 큰 세일이 있다는 광고를 보았었다. 물론 세일이라고 해도 세 사람이 다 원하는 것을 살 수는 없다. 지갑을 열 수 있는 한 사람인 내 주머니가 빠듯하기 때문이다. 


돌아올 때 모두 맥이 빠져 오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일단 쇼핑 가자, 하면 모두 신이 난다. 우리 집 식구는 곰돌이까지 넷이지만 곰돌이는 집에 남아야 했다. 잡종 개인 곰돌이는 용케도 주말인 것을 아는지 어디 공원에라도 데리고 가지 않으려나 먼저 설쳐대지만 백화점에는 데리고 갈 수 없다. 문 앞에 바짝 붙어 서서 우리들이 다 나오고 문이 닫힐 때까지 희망에 찬 눈빛을 보내지만 ‘미안해, 너는 집에 있어’ 한마디와 함께 문이 닫혀버리면 고개를 떨구고 그 자리에 앉아서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 개도 사람처럼 철이 들어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곰돌이는 덩치가 열세 살 된 주영이보다 큰데도 철이 없다. 얼마 전 엄마가, 주영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함께 먹으려고 감자 두 개를 삶아서 그릇에 담아 식탁에 놓았는데 곰돌이가 그걸 먹어 버렸다. 주영이가 괜찮다고 아무리 달래도 저녁때 내가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갈 때까지 엄마는 화가 안 풀리고 있었는데, 주영이 말에 의하면 할머니가 분해서 울었다고 했다. 


  “누구 줘버려. 우리 형편에 개 키우는 것도 호강인데 저렇게 철부지가 돼서야⋯.” 


엄마는 집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푸념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주영이도 안다. 내가 곰돌이를 누구 준다고 한다면 제일 펄쩍 뛸 사람이 엄마다. 곰돌이는 감자를 먹어버려 할머니가 화난 것을 안다. 그래서인지 나를 보고도 좋아서 뛰어오르지도 못하고 야단맞을 것이 겁나는지 한 구석에 엎드려 꼬리만 흔들면서, 내가 '괜찮아, 이리 와’ 하기를 기대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나 이 개를 보면 혹시 이 개 이름이 곰돌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얼굴에 이름이 씌어 있기라도 할 만큼 이름에 아주 걸맞은 순한 얼굴이다. 그런데 우리 식구가 된 지 2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이상하게 엄마만 보면 짖어댄다. 우리 집에 처음 오는 그 누구를 보고도 짖기는커녕 꼬리를 흔들며 달려드는 놈이 왜 엄마를 보고 짖는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엄마는 온종일 곰돌이 밥 주는 일과 밥그릇 닦는 일도 하시고, 마주 앉아서 곰돌이와 친구도 해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주면서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온종일 엄마의 시중을 점잖게 받고 나서는 나와 주영이가 집에 들어가면 곰돌이는 그때부터 엄마를 보고 짖기 시작한다. 속상한 엄마가 벌떡 일어나 신문을 돌돌 말아서 몽둥이 같이 눈앞에 대고 위협을 하면 꼬리를 내리고 주저앉지만 엄마가 신문 몽둥이를 내려놓고 앉으면 또 일어나서 짖어댄다. 처음에 엄마는 저놈도 나를 업신여긴다고 화를 냈다가 속상해서 울기도 했다. 어떤 때는 둘이 마주 보고 싸우는 것 같기도 하다. 곰돌이도 엄마도 절대로 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 야단을 치는 엄마를 향해 곰돌이는 반항기 사내 녀석처럼 짖어대는데 그럴 때 주영이가 '그만해' 하면 엄마도 곰돌이도 순식간에 입을 다물어버린다. 


                                                                                *****


내 엄마. 

그냥 알아듣게 표현하면 조금 모자라는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곱상한 외모에 반한 아버지가 까짓 조금 모자라면 어떠냐, 하고 생각했던 듯 한번 보고 소개해 준 사람에게 자신은 마음을 정했다, 고 했다고 한다. 엄마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듯 신랑감의 결정을 따랐는데 그때 신랑 감이던 아버지는 아이 둘이 딸린 홀아비였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다. 나를 낳아준 내 친엄마는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 돌아가셨는데 조금 남은 기억으로는 아랫목에 누워 아플 때마다 나와 동생 종혁이에게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아픈 내 친엄마가 불쌍하기도 했었는데 그때 만 네 살이던 종혁이는 소리만 지르던 무서운 엄마가 죽자 속으로 좋아했다고 조금 큰 다음에 내게 고백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엄마가 약간 모자라는 사람이긴 하지만 친엄마를 어려서 잃은 나와 내 남동생을 키워주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고, 또 사실 큰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그러니까 나와 살고 있는 내 엄마는 엄밀히 따지면 새엄마다. 엄마는 그렇다고 큰 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외모로 어느 부분의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처음 본 사람이나 한동안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도 엄마의 부족함을 모르고 지낼 수도 있다. 한참 지내다가 ‘이 사람 좀 모자라는 사람 아냐?’ 하게 된다. 누군가가 표현하기를 생각하는 능력이 반 박자 모자란다고 했다. 나는 사람의 머릿속도 음악의 오선지처럼 박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단지 남과의 대화, 특히 처음 만난 사람과는 대화를 하지 못한다. 뒤로, 자꾸만 뒤로 숨는다.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같은 식구이면서도 며칠씩 입을 열지 않아 이따금 입을 열면 오히려 내가 깜짝 놀란다. 그러면서도 소외당하는 것을 못 견뎌한다. 어쩌다 우리 집 작은 거실에 목사님이라도 심방을 오시면 꼭 그 옆에 붙어 앉아야 안심한다. 엄마가 먹으려고 남겨 두었던 오렌지 반쪽을 주영이가 먹었다고 한 시간 동안 눈물을 짜기도 했다. 나는 우주를 떠돌던 외로운 별똥별 하나가 그렇게 내 어깨에 떨어져 기대 왔다고 생각한다. 



내 아들 주영이. 

주영이가 강원도 강릉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을 때 공무원으로 대전에 떨어져 살던 남편은 오지 못했다. 그 대신 인천에 사는 큰 딸인 시누이 집에서 손주들을 돌보며 사시는 시어머니가, 친손자를 보았다고 신이 나서 미역이니 아기 옷 등이 든 가방을 들고 찾아오셨다. 그리고 정말 자꾸만 들여다보며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지 아비를 닮아 잘생겼다고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셨다. 시어머니처럼 남편이 잘생겼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정말 갓 태어난 신생아가 주영이만큼 예쁜 아기는 본 적이 없다. 나는 강릉 시내의 초등학교 교사였고 같은 동료의 소개로 대전에 있는 세무서 직원인 총각을 소개받아, 한눈에 반할 것도 없지만 또 구태여 크게 마다할 것도 없어 보이는 남편과 만난 지 석 달 만에 결혼을 했다. 뜨겁게 서로 연애 감정이 생기지 않아서였는지는 모르지만 남편이나 나나 직장을 집어치우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이, 말하자면 주말부부 혹은 격주 주말부부로 별 불편 없이 살면서 임신을 하고 주영이를 낳은 것이다. 아비를 닮아 잘생겼다고 대견히 여기며 손자를 들여다보던 시어머니도 남편 없이 친정부모와 함께 사는 며느리라 눈치가 보였는지 총총히 딸 집으로 떠나버리고 자연히 엄마가 학교에 다시 출근하게 된 나 대신 주영이를 보살펴주게 되었다. 

아버지 뒤에 숨은 듯 살아오던 엄마에게 아기는 신비한 우주였고 새 세상이었고, 엄마 자신의 생명과도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엄마와 아기를 지킬 수 있어서 나는 마음 놓고 아이를 맡겨놓고 일을 할 수 있었다. 


  “오늘 주영이가 나를 보고 웃었어.” 

  “오늘 주영이가 나를 쳐다보며 옹알옹알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던지⋯.” 


아기의 모든 짓거리가 엄마에게는 신비로움이며 환희였고 빛이었다. 엄마의 가슴속을 헤매던 언어라는 인간의 특권이 주영이로 인해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내 엄마의 세계를 점령했고, 내 엄마는 그렇게 그 세계를 향해 문을 열었다. 주말마다 부지런히 달려오는 남편과, 깨질까 봐, 부서질까 봐 잠시도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엄마와, 아버지와, 그렇게 그 시절은 참으로 좋았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주영이가 9개월 되던 때였다. 정기검진을 하러 소아과 의사를 찾았을 때였다. 


  “주영이가 딴 아기들의 정상치보다 허벅지 길이가 짧은 것 같아요.”

  “아니, 허벅지 길이가 짧으면 주영이가 나중에 큰 다음에 롱다리 축에 끼기는 애초에 틀린 거네요.” 


나는 후후 웃었다. 


  “하필이면 내 짧은 다리를 닮았을 게 뭐람.” 


키가 작은 나 자신을 생각하며 시어머니의 안목대로 이목구비가 잘생긴 남편을 닮았다면 큰 키는 왜 못 닮았을까 얼핏 원망도 했다. 그리고 자라면서 나아지겠지, 하고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그때는 이휘재니 누구니 유명한 사람들의 '롱다리'라는 단어가 유행이었고 화제였고 그 반대인 숏다리는 거의 성공의 반대편 자리에 서게 되는 추세였던 때다. 그렇게 가볍게 넘기고 왔지만 의사의 마지막 하던 말이 목에 걸린 가시가 되어 뱉어지지도 않고 넘어가지도 않고 끈질기게 자꾸만 깊게 깊게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한번 주영이를 전문의에게 보이고 정밀검사를 해보면 좋겠어요.” 


정밀검사라니? 허벅지가 좀 짧다고 정밀검사를 받으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데 그날부터 지 아비를 닮아서 이목구비가 뚜렷하다고 시어머니를 행복하게 하던 주영이의 얼굴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아기의 허벅지를 들여다보고 자를 가져다 재어보고 벌거벗은 딴 아기들의 사진들을 늘어놓고 비교해보는 일로 온 정신을 빼앗기게 됐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에게서 아기를 받아 안는 대로 앉혀놓고 앙증맞은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 자로 재는 일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보면 그런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안 그런 것도 같고⋯⋯. 영문도 모르는 엄마는 그런 나를 놀란 듯 바라보며 불안해했다. 나는 허둥대기 시작했다. 


주영이가 첫 돌을 맞게 됐다. 대전에서 남편이 올라오고 인천에서 시어머니와 시누이 가족들까지 모여 거의 성대하기까지 한 잔치를 했다. 아무도 주영이의 외형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주영이는 딴 아기들처럼 걷기 시작했고, 말하기 시작했고, 기저귀도 딴 아기들보다 일찍 떼어버린 영리한 아이로 건강하게, 개구쟁이로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스물 거리던 의혹과 불안은 거의 확신으로까지 이어져, 곁에 엄마가 없을 때는 아기의 말랑말랑한 다리를 틈만 나면 아기가 놀라서 울 때까지 잡아당기곤 했다. 어찌 사람의 몸뚱이가 당기고 잡아당긴다고 한 치인들 늘이고 줄일 수가 있을 것인가⋯. 


18개월, 소아 뼈 전문의에게 찾아가 엑스레이를 찍었다. 주영이는 역시 확연히 다른 정상아의 기본 체형과 달랐다. 보여주는 엑스레이로도 팔과 다리가 몸통보다 짧은 것이 내 눈에도 선명히 들어왔다. 


  “무언가요?”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모르게 중얼거리는 내게 의사가 대답했다.


  “놀라시겠지만 주영이는 에이콘드로플라시아(achondroplasia)라는 의학용어로, 한국어로는 연골무형성증이라는 선천성 질환을 타고났습니다. 100% 유전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의학적 설명으로는 성장판에서 연골이 장골로 바뀌는 과정에 이상이 생겨 성장호르몬의 장애로 뼈의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선천성 질병입니다.”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요?” 

  “성공적인 치료 선례는 아직 없습니다. 그러나 약 10센티 정도는 키를 크게 할 수 있는 수술 방법이 있고 그 방법이 가장 안전하고 성공적입니다. 단지 수술 후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기에는 거의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데 지금 당장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성장 상황을 조금 두고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같은 유전성 특성을 가진 환자에 비해 경미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주영이를 데리고 가까운 곳 먼 곳 가리지 않고 쫓아다니며 문을 두드렸다. 어느 의사가 호르몬 요법을 권유하여 당뇨병 환자가 배에 인슐린 주사를 맞듯 어린아이의 배에 3개월이나 주사를 전쟁 치르듯 놓았는데 다른 의사가 그 요법은 조숙 증세가 어려서부터 시작하는, 몸에 해로운 치료법이라고 하여 중단해버렸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수염이 나고 목소리가 변해서 연애한다고 쫓아다니면 어쩔 것인가⋯. 그 뒤로 찾아간 한의사가 냄새도 역겨운 쓰디쓴 한약을 연골 생성에 특효라고 하여 사다가 죽어라고 입을 열지 않는 아이의 입에 반은 흘려가며 쏟아붓다가 지쳐버려 발을 뻗고 아이를 끌어안고 울어버리기도 했다. 


여전히 주말부부인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흘겨보기 시작했다. 양쪽 집안 그 어느 누구도 현재 살아있는 일가친척 가운데 이 괴상한 이름의 병을 가진 친척이 없으며 조상 중에도 그런 병이 있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 족보에도 없는 일이라고 서로 으르렁거리며 의심해댔다. 유전자 질환은 생물학적으로 모계가 우성이라는 남편의 단언은 나를 기죽게 만들었다. 검증되지 않았지만 엄마를 잘못 만나 괴상한 이름을 가진 병을 타고났을지도 모르는 주영이는 내 몸속을 흐르는 핏속의 어느 성분으로 인해 평생 동안 멍에를 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라서 어른이 되면 결혼은 할 수 있을까... 자식이 생기면 정상일 것인가? 조그만 아이를 들여다보면서 내 머릿속은 아이의 일생을 내달렸다. 병의 특성은 주영이가 만 두 살을 넘기면서 내 눈에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그 진단을 받은 환자로서는 증상이 경미한 것이라고 해야 할는지⋯. 그러나 나 자신을 더 이상 속일 수는 없었다. 정상적인 아이들보다 주영이의 팔다리가 짧은 것이 내 눈에는 확연히 들어왔다. 주영이가 세 살 되던 무렵, 누군가가 미국에 가면 이 병을 치료하는 길이 있다고 귀띔을 해 주었다. 아주 희귀한 유전병도 아니어서 미국에는 이 병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있고 후원도 받을 수 있어서 수술이나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도 했다. 나는 미국으로 갈 길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우선 남편을 설득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았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 이 나이에 미국에 가면 뭘 해서 먹고살겠어?” 

  “우리가 먹고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주영이를 살려 놔야지.” 

  “주영이를 살려 놓으려면 우리가 먹고살면서 살려야지 미국 땅에 납작 떨어지면 누가 기다리다가 냉큼 주영이를 고쳐줄 것 같아?” 


고지식하고 안일한 박봉 생활에 익숙한 남편은 변화를 두려워했다. 결혼 후 수년간 떨어져 살면서도 부부가 합치는 계획은 너무나 큰 모험이라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그 전이나 그 후나 꼼짝 않고 같은 집에서 하숙하며 사는 것에 만족할까⋯. 허기야 갈 곳 없는 내 부모가 내 벌이로 생활해야 하는 처지니 나도 무어라 치고 뛸 틈도 없었고 그 사정을 이해하는 남편이 고맙기까지 했지만⋯. 


  “그럼 나 먼저 주영이 데리고 미국에 가서 자리를 잡을 테니 뒤에 오든 지⋯.” 


내 아이의 병을 고쳐보려는 일념은 미국 아니라 북극에라도 길이 있다면 달려갈 정도의 것이었다. 내 선언에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뜬 남편은 중얼거렸다. 


  “내가 미국에 가서 뭘 하겠어?” 

  “그럼 주영이가 저렇게 태어난 것이 내 탓이기 때문에 나 몰라라 하는 거야? 유전병은 모계가 우성이라서?” 


나는 하면 안 될 모진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 모진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다. 내가 주영이를 데리고 여기저기 전문의를 찾아 쫓아다니는 동안 남편이 우리들을 찾아오는 빈도수가 줄면서 나는 어렴풋이 그가 부부관계를 꺼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다. 주영이 같은 유전성 특성을 가진 아이를 용의자인 나와의 사이에 또 갖게 될까 봐 불안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주영이의 목소리라도 듣겠다고 인천에서 걸려오던 시어머니의 전화도 뜸해졌다. 비정상인 손자는 싫은 것일까⋯⋯. 나는 마치 흉악 사건의 용의자도 아닌, 아예 진범으로 지목된, 확신범이 돼버린 것 같았다. 나는 실망했고 섭섭했고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내가 주영이의 병을 고쳐 주리라. 그래도 모질지 못한 남편이 내가 마음 놓고 떠날 수 있는 한마디를 했다. 


  “그러면 미국에 가서 주영이 치료받고 고쳐서 돌아와. 기다릴게.” 


나는 전셋돈을 빼서 여권수속을 하고 미국 관광비자를 받았다. 수속할 때 비로소 알았지만 서로 떨어져 사느라고 혼인 신고도 안 해놓았던지 나는 미혼모의 신세였다. 


관광객이 참으로 많이 미국에 오던 시절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때 여권 수속할 때처럼 돈을 아낌없이 펑펑 쓰던 때는 내 일생에 처음이었고 또 다시는 없을 것이다. 네 살 된 아이 하나 데리고 부모랑 함께 미국 관광 간다고 비자를 받는다는 일은 누구 말에 의하면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나는 그 별을 따기 위해 전셋집 뺀 돈을 필요하다면 아낌없이 꺼내 주었다. 그리고 내가 떠나 버리면 오갈 곳 없던 아버지와 엄마도 함께 팔자 좋은 부부같이 관광비자를 받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뉴욕 퀸즈에 사는 아는 언니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케네디 공항에 내렸을 때 나는 빈털터리 신세에다가 아무 대책 없는 세 사람의 식구가 딸린 미혼모 신세였다. 세상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지만 나는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용감해지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 관광 가는데 이민 가방을 들고 갈 수는 없다고 해서 당장 각자 입을 옷 몇 개와 당장 쓸 일용품들이 우리의 알량한 여행가방 안의 물품 목록 전부였다. 언니는 수년 전에 가족들과 이민 와서 돈을 모아 퀸즈에 조그만 식당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사는 집 지하실 방을 마침 비워놓고 있어서 우리 네 식구는 긴 비행기 여행 끝에 그래도 두 발 뻗고 누울 장소는 마련한 셈이었다. 게다가 언니의 식당에서 비록 웨이트리스 일이지만 당장 일할 곳까지 주선해놓고 있었다. 겁날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웨이트리스로 일하게 된 곳은 크지 않은 식당이지만 비교적 장사가 짭짤했고 수입도 좋아 지하실 단칸방이지만 내가 일해서 받는 수입으로 월세 내고 먹고사는 데는 충분했다. 빈털터리로 네 식구가 관광을 온 처지로 보면 충분하다는 뜻이다. 한국의 남편은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그리고 석 달에 한 번, 조금씩 보내주던 용돈 비슷한 액수의 송금을 슬며시 끊어버렸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며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어느 여자와 재혼해서 딸을 낳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딸은 아주 멀쩡하고 건강하다는 소문이 뒤따랐다. 병 고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던 남편의 말을 내가 전적으로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아이의 아버지니까⋯. 그래도 나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돈은 일한 만큼 들어왔고 어차피 서로 같이 사는데 익숙하지 않았던 부부여서 그런지 가슴이 아프거나 배신감이 들지도 않았다. 사는 일이 급하다 보니 내 감정에 빠지고 있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했을까? 내게 우선, 무엇보다도 괴로운 것은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이었다. 우리 어른 세 사람은 붙잡히면 쫓겨날 것이 두려워 조심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항상 젖어 있었다. 엄마는 거의 집 밖으로 나가려 하지도 않고 지하실 방에서 땅과 맞붙어있는 유리창 밖의 사람들 오가는 구두와 신발을 내다보며 살았다. 


중요한 것은 주영이를 위해 건강보험을 드는 일이었다. 그것 때문에 미국에 온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아직 그 비싼 건강보험을 들 수 있을 만큼 풍족하지는 않았다. 



주영이가 학교를 가야 했다. 불법 체류자의 아이도 적령기가 되면 학교에 가야 하고 학교에서도 너 불법 체류자 아니냐? 하고 따지지 않는다. 미국은 정말 좋은 나라다. 여섯 살의 주영이는 정상 아이들에 비해 작기는 했지만 병의 특성은 아직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고 있었다. 다행히 주영이는 학교와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렸다. 거의 집안에 갇혀서만 지내왔는데도 순식간에 영어를 재잘거리기 시작했고, 어울려 공도 차고 철봉에 매달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 병은 외모로 나타나는 팔다리가 짧은 증상 이외에는 지능도 정상이고 생식능력도 정상이어서 결혼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 수 있다. 따로 할 일도 별로 없는 아버지와 엄마는 그런 주영이를 눈 끝에 달고 살았다. 나에게는 죽어라고 일해서 돈을 모아 주영이의 병을 고치는 것만이 지상 과제일 뿐이었다. 관광비자를 가지고 미국에 들어와 불법체류자로 지낸 지 5년 만에 나는 영주권자가 되었다. 이렇게 빨리 영주권을 받게 된 데는 그 당시 이민국의 단속이 좀 허술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식당에 늘 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가는 주인의 친구인 이 씨 아저씨가 자신이 시민권자인 독신이니 서류상으로 내가 그와 결혼을 하면 영주권을 빨리 쉽게 딸 수 있다고 제안을 해왔을 때 나는 내 처지가 처지인 만큼 마다할 이유조차 없었는데, 그는 그냥 아무 조건도 필요 없고 열심히 사는 내가 가엾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여 한평생 살면서 한 번쯤은 좋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식당 주인도 그는 믿어도 좋은 사람이니 그렇게 하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조건으로 돈을 요구한다는데 나야 빈털터리일 뿐만 아니라 뒤에 짊어진 짐이 얼마나 무거운가⋯. 내 성이 권 씨에서 이 씨로 바뀌는 서류 등록과 함께 나는 시민권자의 아내가 되었고 그로써 영주권 신청이 재빨리 진행되었다. 그의 식당에서의 저녁식사는 계속되었고 내 웨이트리스 일도 여전히 계속되었는데 정말 우리는 서류상의 부부일 뿐이었다. 내 부모도 알지 못하는 채 나는 ‘미쎄스 리’가 되었다. 영주권이 나왔을 때 나는 안 먹고 안 입으면서 지하실 단칸방에 살며 모은 돈 전부를 그에게 주었다. 전부라고는 하지만 남들처럼 큰돈은 물론 아니다. 단지 나는 내 고마움을 그렇게라도 표시해야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그의 통장번호를 알아내서 내가 '입금해 버리자, 그러면 내가 돈 바라고 해 준 것 같잖아' 했지만 다시 꺼내서 내게 돌려주지는 않았다. 그는 내가 일하던 식당이 문을 닫음과 함께 다른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갔고 지금껏 나는 그를 고맙게 생각한다. 주영이는 건강 보험을 들었다.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너같이 엉뚱하게 일이 잘 풀려 나가는 사람 처음 봤다.” 

  “어느 철학자가 그랬잖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길은 용감한 자에 게만 열린다.” 


우리는 후후, 하고 웃었다. 



주영이는 콜롬비아 대학병원의 소아심장 전문의에게서 합병증 여부의 심장검사를 받았는데 결과는 정상으로 나왔다. 코넬 대학의 유전자 검증의에게서 검진을 받고 성장 호르몬 약 처방을 받았는데 이것은 보험으로 처리되지 않는 데다가 조숙증이 염려되어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새로이 알게 된 것은, 이 연골무형성증이라고 불리는 이 병의 특성은 상염색체 우성으로 유전하지만 약 90%는 새로운 돌연변이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범죄인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지만 생각 안 하기로 했다. 아무려면 어떠냐. 유전성이건 돌연변이건 그걸 따져본들 갑자기 주영이의 다리가 정상 아이처럼 늘어나지는 않을 것을⋯. 좀 더 성장해봐야 알겠지만 비교적 경미한 주영이의 특성으로 보아 아마 연골 저형성증(Hypochondroplasia) 일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그것은 유전자 결함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왜 이 병이 발생하는지 그 원인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영주권자인 나는 훨씬 대우도 좋고 환경도 좋은 사무직에 일자리도 얻어 뉴저지로 이사했다. 물론 주영이의 교육환경도 업그레이드됐다. 그리고 곰돌이도 우리 식구로 입양되면서 개를 키우고 싶어 하던 주영이의 꿈도 이루어졌다. 옆집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그 새끼 강아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주영이를 보고 '네가 키워라'하여 얻어 왔는데 사실 우리 집 처지에 개를 키우는 것은 거의 사치스러운 일과 같았다. 우리 식구는 그런 사치만큼은 조금 누려보고 싶은 열망을 모두 가지고 있었는지 곰돌이로 인해 우리 집에 찾아든 생동감 넘치는 엄청난 변화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동안 이 변화와 함께 우리 집에 찾아든 불행은 몸이 안 좋아 병원을 찾은 아버지에게 담낭암 말기의 진단이 나온 것이다. 내 아들 병 고치는 일에만 정신을 팔고 다닌 나는 내 아버지의 병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무심했었던 것에 아연실색을 했지만 어떻게 손을 써 볼 도리도 없이 진단이 나온 지 꼭 두 달 만에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집 곰돌이까지 다섯 식구는 다시 네 식구가 되었다. 그래도 우리 집에 생동감을 넣어준 곰돌이의 역할이 우리의 비탄을 잠재워 주었다고 하면 주책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렇게 아직 불법 체류자이던 아버지를 영원한 체류지로 떠나보내고 우리는 또 살아야 했다. 나는 낮에는 사무직원으로 여덟 시간을 일하고 저녁에는 식당에서 다섯 시간 동안 계산원 일을 해야 했다. 그렇게 두 직장을 뛰어야만 우리 식구가 빠듯하게, 정말 빠듯하게 살 수 있다. 


지난봄, 주영이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9학년인 고등학생이 되었다. 졸업식 때 친구들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다른 아이들보다 키는 머리 하나가 작은데 얼굴은 제일 크게 웃고 있다. 이제 십 대가 되고 성인의 길로 들어서게 될 주영이가 설혹 체형의 균형이 부족한 청년이 되더라도 밝게 자라주면 내가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내 꿈은 주영이가 전문직을 갖게 되는 것과, 정상 여자와(조금 크더라도) 결혼하여 정상 아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때 내가 해줄 일이 하나 있다. 여자의 건강한 난자에 주영이의 전혀 흠 없는 정자를 선별하여(염색체 검사로 가능하다고 한다) 시험관 아기를 만들어 건강한 정상 손주를 보게 되는 일이다. 이 시술들은 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어 돈을 모아야 한다. 나는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아주 짠, 소금처럼 짠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온 덕에 출입문 가까이에서 자리를 찾아 주차한 후 우리 세 식구는 백화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내가 오후에 일을 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사고 싶은 물건이 진열된 곳으로 흩어지기로 했다. 각자 오랫동안 머릿속에 그려왔던 바로 그 물건을 찾기 위해 서둘러야 한다. 


  “한 시간 후에 여기서 만나.” 


엄마도 주영이도 원하는 물건을 시간 안에 챙기지 못하면 큰일이라는 듯이 올림픽 경주에 출전한 선수처럼 재빨리 흩어져 간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이불 파는 지하실로 달려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여성복 진열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해 스웨터나 코트를 한 번씩 들고 들여다본다. 몸에도 대어보고 한쪽에 있는 거울에도 비춰본다. 그리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내려놓고 또 다른 옷가지들을 들추어본다. 사이즈도 들여다보고 옷감의 질도 검사원처럼 꼼꼼히 살펴본다. 그리고 돈은 얼마든지 있지만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는 듯한 얼굴로 엄마는 그 자리를 떠, 지하실 이불 파는 곳으로 향한다. 


그동안 주영이는 남자아이 용품부에 진열되어 있는 유명 브랜드들의 청바지들을 살펴본다. 주영이는 스스로 입어 볼 수가 없다. 특이 체형의 청바지는 없기 때문이다. 바지를 새로 사면 역시 다리가 짧기 때문에 길이를 줄이는 기본적인 수선도 해야 하고 또 바지의 뒷주머니가 엉덩이 한참 아래에 와 있게 마련이어서 주머니를 뜯어버리거나 아래로 내려 다는 일도 해야 한다. 그나마도 아무리 내가 가위질을 하고 뜯어 붙여도 제대로 뭐가 안 되는 제품도 있다. 그 나이 또래의 최신 머리스타일을 벌써 흉내내기 시작하는 주영이로서는 두리뭉실 내 바느질 솜씨로 억지로 꿰어 맞춘 바지가 싫다. 나는 내가 잘라 붙이지 않은 원래 스타일 그대로의 맵시나는 바지를 입은 주영이의 모습을 꿈꾼다. 내 머릿속에는 성인이 되면 연구해보자는, 다리뼈를 늘리는 수술의 순서가 정형외과 전문의만큼이나 정확히 들어있다. 틈만 나면 웹사이트에 들어가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다행히 구두 세일은 없다. 한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다시 만났다. 엄마도 주영이도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다. 


  “왜, 마음에 드는 것 없어?” 


나는 지갑은 두둑한데 왜 빈손으로 오는가, 고 호기 있게 묻는다. 


  “내가 생각해보니까 이불이 얇기는 하지만 큰 사이즈가 돼서 반으로 접으면 두 겹이 되니 일부러 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엄마는 이불을 사면 고쳐야 할 망정 주영이의 새 바지를 살 돈의 여유가 내게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주영이는 역시 맵시도 안 나는 청바지를 사면 할머니가 이불을 살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쨌든 세일을 한다 해도 아직 내가 새 구두를 살 형편은 아니니까⋯. 모두 씩씩한 척 하지만 맥이 빠져 돌아 나오는데 주영이가 문득 소리친다. 


  “엄마, 저거 우리 곰돌이 사주면 좋겠다.” 


주영이가 손으로 가리킨 그곳에는 애완동물 용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곰돌이가 발 뻗고 누우면 적당할 크기의 매트가 쌓여 있었다. 


  “아이구 그렇지 않아도 곰돌이가 맨바닥에서 자는 걸 싫어하는데 저걸 깔아주면 좋아하겠네.” 


너무너무 폭신하고 감촉도 좋은 데다가 ‘세일, 세일, 또 세일’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좋은 일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지갑을 꺼내 돈을 세어 주었다. 커다란 방석 같은 노란색 매트를 사서 가슴에 안고 날아갈 듯 걸어가는 작은 주영이 뒤로, 기쁨에 가득 찬 얼굴의 엄마가 부지런히 따라갔다. 그들은 우주의 어느 행성에서 돌연변이를 일으켜 헤매다가 내 어깨에 기대온 외로운 별똥별들인가⋯⋯. 우리 집 식구 세 사람은 푹신한 매트에 발을 뻗고 자는 곰돌이의 모습을 그려보며 쇼핑을 마치고 내 주말 오후의 출근에 늦지 않게 부지런히, 행복한 마음으로 백화점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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