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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영 Apr 08. 2022

고향을 그리며

    환자는 응급실 침대에 똑바로 누워 있지를 못했다. 응급실에는 누가 모시고 왔는지, 내가 갔을 때는 혼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앉아 있다가 잠시 후 누웠다가 옆으로 몸을 젖히기도 하고 엉덩이를 일으키기도 하면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몸이 불편하세요?”

  “아이고, 어깻죽지부터 엉덩이까지 뼈마디가 쑤셔서 견딜 수가 없어요.”


앙상하게 마른 손으로 흰머리가 성성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환자는 고통에 찬 얼굴로 간신히 대답했다. 환자 차트를 보니 68세.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것은 고통에 찡그린 얼굴이 그대로 주름살로 변해서였을 까.... 깊은 주름살이 이마와 얼굴 가득히 골처럼 패어 있었다.


  “앉으면 아파서 눕고 싶고 누우면 아파서 일어나 앉아있고 싶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얼굴에는 열이 있는 듯 의심스러운 홍조가 떠올라 있었는데 나를 바라보는 눈이 애처로웠다. 목소리에도 힘이 없어 내가 한껏 허리를 구부리고 말하는 입 가까이 내 귀를 갖다 대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옆에 아무도 없이 깊은 병을 혼자 앓고 있는 것이 가엾어, 자녀들이 가까이 살고 있느냐고 물으니 조카딸이 가까이 산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된 것은, 이 환자는 12년 전 그의 언니로부터 '초청 방문'으로 미국에 들어와 그냥 눌러앉아 버린 후 이 집, 저 집을 돌며 아기들을 봐주면서 살아왔다. 불법체류자가 된 후, 주중에는 아이들 봐주는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주말에는 조카딸 집에서 잠자리를 해결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사는 길이려니 하며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 한국에서 남편과 이혼하고 자녀들과도 소식이 끊긴 채 미국에 와서 가까운 친구도 없고 의논 대상도 없이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 이따금 조카딸이 나가는 교회에 따라 가보기는 했지만, 마음에 와닿지도 않았고 마음이 열리지도 않아 아무하고도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3개월쯤 전부터 몸이 아파서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물론 보험도 없고 소셜 시큐리티 넘버(사회 보장 번호)도 없고 10년 전에 만기 된 여권은 어딘가에 있다고 했다. 많은 한국인이 이렇게 산다.


  “병원에는 한 번도 안 가셨었나요?”

  “김 내과에 한번 갔었어요. 거기서 피를 뽑고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뭐 더 검사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어쩔까, 하는 차에 도와주겠다는 변호사를 소개받아서 이 병원에 들어왔지요.”

  “어떻게 도와준다고 해요?”


환자는 아무 대답도 안 했다. 무언가 내게 말하고 싶지 않은 사연이 있는 듯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눈빛은 어쩐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는 다짐이라도 받은 듯 못내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도와준다는 변호사가 있다니 신통하다.


  “그 변호사가 아주머니 병원에 들어오신 것 알아요?”

  “예, 조카가 연락했대요. 병원 입원비 가지고 오기로 했어요.” 

  “입원비를 가지고 와요?”


변호사가 입원비를 가지고 온다니... 무언가 이야기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반쯤 누워있는 그녀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주머니. 저는 이 병원에서 한국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에요. 어떻게 된 사정인지 말해주셔야 도와드리지요. 변호사에게 돈을 주셨어요?”


환자는 여전히 불안스러운 눈빛을 내게 던졌다. 아마도 병원 입원비를 받아내려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망설이더니, 어차피 병원비는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지 말을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병원에 들어가면 돈이 엄청나게 드는데, 현찰로 7천 달러만 주면 병을 깨끗이 고칠 수 있도록 해결해 준다고 그래서 지난 목요일에 4천 달러 줬어요. 그리고 목 수술은 또 다른 전문 병원에 가야 한다고 

3천 달러를 달라는데, 너무 몸도 아프고 힘들어서 지난 일요일에 또 3천 달러를 줬어요. 오늘 그 돈 가지고 온다고 그랬어요.”


아주머니는 단숨에 말하고는 그 돈으로 병원비가 해결되기 바라는 듯 내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많은 돈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줄 수가 있어요? 아주머니는 부자이신가 봐요.”


놀라는 내게 환자는 한숨을 깊이 내쉬며 대답한다.


  “남의 집에서 일하며 받은 돈, 1달러도 안 쓰고 모아 두었던 돈이에요.”


사회 보장 번호가 없어 은행에 예금할 수는 없었을 터이니 현찰로 받아 어딘가에 깊숙이 숨겨 두었던 돈일 것이다.


  “그럼 그 변호사라는 분에게서 영수증은 받았어요?”


아마 그 변호사라는 사람은 사기꾼일 것이다. 환자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우선 3천 달러를 가지고 와서 병원에 선금으로 낸다고 했어요.”


변호사도 아닌 사람이 변호사라고 칭하고 영수증도 안 주고 현찰을 챙겨가 놓고 공손히 병원으로 그 돈 가지고 찾아오리라고 생각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응급실 담당 의사가 간호사와 함께 들어와 환자의 건강 상태를 묻는다.


  “몸은 어디가 안 좋으세요?” 

  “한, 두어 주부터 어깨뼈와 등허리, 그리고 엉덩이뼈까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밥맛이 없어, 거의 먹지를 못하고 지내서 그러는지 변도 보지를 못 해요.”


몸 전체에, 특히 뼈의 통증으로 인한 고통만 없다면 구태여 병원에 들어오지 않아도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찰을 하는 의사가 배를 누르니 아프다고 신음을 냈다.


  “누르면 아파요?”

  “예...” 


대답하는 환자는 식은땀을 흘렸다. 의사는 피검사와 어깨의 엑스레이 촬영을 지시하고 방을 나갔다. 나는 또다시 돈 7천 달러의 행방에 관해 캐묻기 시작했다.


  “그 변호사 이름을 알아요?”


환자는 고개를 저었다.


  “누가 그 변호사를 소개해 주었어요?”

  “조카딸이 잘 아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이름도 모르는 사람한테 영수증도 받지 않고 그 큰돈을 주었다면, 조카딸이 잘 알아서 병원비를 해

결해 주겠군요.”


나는 시침을 떼고 병원비에 대해 압력을 넣었다.


나는 병원에서 일하며 미국은 참으로 위대한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병원 응급실에 들어온 환자는 불법체류자나 노숙자나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치료를 위한 모든 검사를 받는다. 중환자로 수술을 받아야 하거나 집중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는 입원이 되고 담당자가 이 환자의 신분을 확인하며 도와줄 길을 찾는 일을 한다. 절대 불법 체류자를 이민국에 고발하는 일은 없다. 그런데 불법 체류자들은 그것이 두려워 병원을 찾지 않다가, 더는 견딜 수 없을 때, 대개 너무 늦어 치료를 받을 수 없을 때 병원 응급실에 들어온다.

사실 이 환자의 경우는 만 65세 이상의 불법 체류자로서 응급환자에게 해당하는 이머전시 메디케이드 프로그램(긴급 의료 프로그램)으로 병원비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신청하면 된다. 그런데 신청을 하려면 가족이 신경을 써서 서류를 제대로 작성해 와야 한다. 영어와 서류 작성 등에 익숙지 않은 많은 한국인은 봉사 센터 등에 의뢰하여 서류를 만드는 도움을 받는다. 이때 기부금 형식으로 200달러나 300달러 정도 내야 하는 것은 알고 있으며, 이해도 한다. 그러나 변호사를 사칭하고 몇천 달러를 받아 간다면 절대로 사기꾼이다. 특히 체류 문제가 불투명한 사람들은 어이없이 그들에게 속아 넘어간다. 이 환자도 그런 사기꾼에게 1달러도 안 쓰고 모은 돈 7천 달러를 떼인 것이다.


  “이따가 돈 가지고 온댔어요.”


환자는 자신에게 다짐하듯 힘주어 말했다.


  “예, 알겠어요, 그 사람이 병원비 가지고 오면 제게 연락하세요.”


나는 내 명함을 건네준 후 피검사를 하러 온 간호사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응급실을 나오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 사람이 병원비라고 그 돈을 가지고 와서 받을 수 있다면 이 가엾은 환자에게 돌려줄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그럴 사람이라면 그렇게 돈을 사취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이미 그 돈은 물 건너갔다.



 다음날 출근해보니 이 환자는 3층에 입원해 있었다. 3층은 암 병동이다. 환자는 어제 응급실에서 볼 때보다는 훨씬 편해진 얼굴로 나를 반긴다.


  “많이 편안해지신 것 같아요.”

  “진통제를 먹으면 한동안은 견딜만해요.”

  “어제 그 변호사는 돈 가지고 왔어요?”

  “예. 왔었는데 돈 3천 달러를 더 내놔야 한대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아주머니에게 받은 돈 당장 돌려달라고 하세요. 내가 병원비는 해결해 드릴게요.”


정말 너무하다. 이렇게 가엾게 살아온 병든 노인에게서 돈을 사취한 것뿐만 아니라 더 뜯어내려고 하는 거머리 같은 존재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찌 되었든 병원에 일단 들어오셨으니까 검사받고 치료 잘 받고 나가시도록 하세요.”

  “예. 고마워요. 그런데 언제쯤 퇴원하게 될까요?”

  “아직 검사 중이니까 며칠 계셔야 할 거예요. 빨리 퇴원하고 싶으세요?”

  “그게 아니고, 퇴원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그래요. 몸이 아프니 당분간 일은 못 하겠고, 돈도 없으니....” 

  ”아주머니. 갈 곳도 없고 돈도 없으니 조카딸에게 말해서 돈 돌려받아달라고 하세요.”


환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돈은 이미 물 건너갔다고 체념한 모양인가... 그 속 생각은 알 길이 없었다. 친혈육도 없이 고통스러운 병을 혼자 앓으며 돈 걱정까지 해야 하는 그 처지가 너무나 답답하고 안쓰럽고 짜증스러웠다.


  “그 돈 좀 받아줄 수 없어요?”


갑자기 환자가 내게 물었다.


  “이름이 하 씨예요. 하철오 변호사.”


모른다던 이름은 속에 감추고 있었던가. 그러나 아무리 이름을 잘 알고 있다 한들, 그 속에 들어가 버린 돈을 무슨 재주로 뱉어내게 할 것인가....... 나는 이 가엾은 환자에게 화가 났다. 돈을 받아 갔다는 그 변호사-후에 다시 알아보았는데 역시 그런 이름의 변호사는 없었다-로 속인 사기꾼에게 화가 났어야 마땅하지만, 눈앞의 육신의 고통으로 몸을 뒤트는 이 선량한 환자가 불쌍해서 화가 났다. 집세 나가는 일도 없이 1불도 안 쓰고 모았다면 그동안 꽤 많은 현찰을 모았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불체자라는 약점으로 여기저기에서 그 돈을 꽤 뜯기고 사기당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불쌍해도 사기당한 것까지 내가 해결해주려고 나서서 될 일은 아니다.


다음 날 아침, 내게 두 분의 노인이 찾아왔다. 그중 한 분이 환자의 오빠이며, 또 한 분은 이 오빠가 나가는 교회의 목사라고 소개했다.


  “환자가 그 조카딸 이외에는 친인척이 하나도 없다고 하던데 정말 친오빠세요?”

  “우리가 서로 안 보고 사는지 십 년이 됐어요.”

  “그런데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어요?”

  “딴 조카한테 건너 건너 들었어요. 하도 불쌍해서 와 보고 싶었어요. 환자 상태가 어떻습니까?”

  “아주 안 좋으신 것 같아요. 퇴원하면 갈 곳이 없는 것을 염려하고 있던데. 이제 오빠가 오셨으니 잘 챙겨 주세요.” 

  ”내가 챙겨줄 처지가 못 돼요, 노인 아파트에 사는데 마누라가 풍을 맞아서 거동도 못 하고 나도 부실해요. 그런데 돈도 한 푼 없는데 병원비는 어떻게 하면 좋아요?”

  “걱정부터 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프로그램들이 있으니 길이 있나 찾아보아야지요.”


그 걸음도 잘 옮기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자꾸만 내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환자의 안부보다 걱정되는 돈 걱정...... 그날부터 환자는 광범위한 피검사는 물론, 위내시경과 장 내시경 검사, 뼈 스캔과 캣 스캔 그리고 팻 스캔까지 하는데 굶고 하는 검사, 물 마시고 하는 검사, 주사 맞으면서 하는 검사, 병원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골고루 하나도 빼지 않고 하는 듯했다. 그 모든 검사의 결과는, 뼈를 비롯한 온몸에 암이 퍼진 것으로 의심된다는 추측 진단이 나왔다. 그리고 이어서, 이 암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찾아내는 검사가 계속되었다. 온몸의 세포조직이 암으로 뒤덮인 것이다... 이 모든 검사는 거의 2주 동안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그동안 환자는 마음 놓고 몸 하나 의지할 것 없던 처지에 병원비 걱정은 일단 접었으니, 마음 놓고 누워있을 수 있다는 것에 위로가 되는 듯했다. 이따금 엄습해오는 무서운 고통을, 일정하게 주는 진통제로 겨우 달래고 있는 것 같았다. 조카딸이 있다고는 하지만 일이 끝나고 저녁에나 오는지 한 번도 문병객을 보지 못한 나는 하루에 한두 번씩 이 환자에게 들러 말동무를 하였다. 


어느 날, 환자가 옆 침대의 환자를 둘러보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런데요, 내가 영주권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고 쫓아내지 않을까요?”


자신이 불법 체류자인 것이 또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죽을병에 걸려서 육신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끈질기게 따라오는 걱정들.


  “아주머니 병 다 고치고 건강해질 때까지 절대로 쫓아내지 않습니다. 염려 마세요.” 

  “병원에서 이민국에 신고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냥 쫓겨난다던데...”


나는 알았다. 왜 이분이 그렇게 모은 돈을 내줄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신의 약점을 아는 사기꾼이 협박했을 것이다. 돈 안 주면 이민국에 연락해서 추방되도록 해버리겠다고 했을 것이다.


  “아주머니. 여기는 병원입니다. 아픈 사람들이 오는 곳이에요. 미국은 병원에 있는 아픈 사람을 신고해서 쫓아내는 나라가 아닙니다. 제발 이런저런 걱정하지 말고 몸이나 좀 추스르도록 하세요.”


환자는 내 위로에 마음이 놓이는 듯 웃었다.



환자 퇴원 담당 부서의 리사가 나를 잡고 하소연을 한다. 이 환자를 도무지 어떻게 퇴원을 시켜야 하는지 그 방법을 묻는 것이다. 해당하는 이머전시 케이스로 카운티의 동의를 받으면 되는데 본인은 말 한마디 못 알아듣고 누워있는 판이니, 본인에게 서류를 해오라고 할 수도 없고, 조카딸에게 전화해도 메시지만 남기라고 하면서 일절 콜백을 안 해주니 서류를 꾸밀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사는 이 환자가 목 근처의 동맥에 포트 캣 시술을 하고 퇴원한 후 외래로 항암 치료를 시작해야 하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며, 같은 한국인으로서 도울 길이 없느냐고 한탄한다. 이렇게 딱한 사람에게 사기 쳐서 돈이나 뜯는 사람은 있어도 이 사람을 도울 사람을 어디 가서 구한단 말인가......


다음 날, 환자를 보러 가니 흥분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다.


  “한국의 아이들과 전화 통화를 했어요. 나를 보러 온대요.”

  “그렇게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하고 사셨다면서 용케 통화하셨네요.”


나는 정말 기뻤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머니와 자식 사이가 아닌가...... 그녀의 삶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살아생전 보고 싶은 얼굴이라도 보고 죽어야 서로 한이 없을 것 같았다.


  “언제 온대요?”

  “다음 월요일날 온대요.”


그리고 오늘이 무슨 요일인가를 묻는다. 목요일이라고 하니까 '그때까지는 살 수 있겠지요?' 하고 또 묻는다.


  “아이고, 사람 목숨이 얼마나 질긴데요. 그런 걱정 하지 마시고 조금이라도 잡수시고 기운 내세요.”


아주머니는 오랜만에 환히 웃는다.


  “이런 생각을 해 봤어요, 한 달만 이렇게 아파서 누워있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그러면 이것저것 할 일이 아주 많은데........”


나는 아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달을 살 수도 있고 그보다 더 오래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고통과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한 진통제 때문에 할 일들을 하며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한 달만 살 수 있다면......”


그는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난 평생 기회를 놓치고 살아요, 고향인 충북 진천에 살 때부터 남들 다 하는 공부할 기회도 놓치고, 좋은 사람과 사는 기회도 놓치고, 자식과 오순도순 재미있게 살 기회도 놓치고, 미국 와서 영주권 받을 기회도 놓치고, 이제 살 기회도 놓쳤어요.”


나는 자신의 살았던 길을 뒤 돌아보며 모든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하는 그녀에게 '아니에요, 아직 기회는 남았습니다'하고 말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환자는 이제 콩팥에서 걸러져 방광으로 내려가는 기관이 암세포로 막혀버려 소변을 볼 수가 없어, 콩팥에 두 개의 튜브가 연결되어 주머니로 배설물을 받아내었다.


  “이 플라스틱 봉지에 줄곧 나오는 게 다 소변이라고 하는데, 아무것도 못 먹고 마시지도 못하는데 어쩜 이렇게 많이 나와요?”


정말 우리의 몸은 수분이 80%라고 하지만, 정말로 수분으로 가득 찬 것 같다. 담도가 막힌 어느 환자는 배 양쪽으로 튜브를 꼽았는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누런 물이 졸졸 흐르는 시냇물같이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것을 보기도 했다. 배가 산같이 부풀어 들어온 환자는 튜브를 꽂아 복수를 뽑아내는데 42온스(1.19kg) 짜리 병 여덟 개가 가득 차는 것도 보았다. 그런데도 환자의 배는 홀쭉해지지 않았다.


박춘자 씨의 암은 방광에서 시작된 것으로 확실한 진단이 내려졌다. 그 암은 골반을 거쳐 두 다리까지 완전히 침투해 있었고 척추와 어깨뼈까지 덮여 있어 항암치료를 시작해야만 되었다. 항암치료는 '어디에서 발생한 암인가'에서부터 시작된다. 방광에서 시작되어 전이된 암 치료에 적합한 항암 약을 암 전문의의 처방을 받고 스케줄이 잡힌다. 의사가 환자에게 병의 진행 상태와 앞으로의 치료 방법을 설명하는 것을 통역해주니 “대강 알고 있었어요. 한 군데도 아니고 여기저기 퍼졌다니 그냥 빨리 죽는 게 낫지요” 하며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내가 병원에서 일하며 알게 된 확실한 것은 환자의 생명이 단 하루밖에 안 남았다고 판단되더라도 팔뚝에 종기가 나서 곪아 고통을 받으면 팔 수술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수술을 받을 수 있는 몸의 상태, 즉 심장 박동이 정상이고 몸에 열이 없는 한, 내일 죽을 사람 팔뚝 수술을 오늘 한다는 것이다. 한 환자는 당뇨로 혈액 투석을 몇 년간 받아왔는데 콩팥이 더 이상 기능을 안 하는 상태가 된 데다가 위에서 소화액을 만들지 못해 튜브로 음식을 배에 넣고 있었다. 그런데 왼쪽 발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해 왼쪽 발목을 자르는 수술을 하자마자 오른쪽 발가락이 또 썩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무릎 아래 절단 수술을 하였다. 그동안 왼쪽 발목만 자른 부위가 아물지 않더니 조그맣게 또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또 왼쪽 무릎 아래까지 절단하는 수술을 하고 자른 다리의 발가락이 아프다고 소리소리 지르며 지내다가 한 달을 못 살고 세상을 떠났다. 어차피 얼마 못 살 것이 뻔한데 그냥 내버려 두고 통증만 없애주면 환자가 덜 고생하지 않을까. 나는 알 수 없다.....


 한국에서 아들과 딸이 병원에 도착한 다음 날 이 환자는 목의 동맥에 주사를 꽂는 포트 캣 시술을 받았다. 

12년 만에 만난 자식들과 그 아픈 몸으로 어떻게 회포를 풀었는지 알 수 없지만, 환자는 12년 만에 아들과 딸을 만나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났다고 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에 매달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포트 캣 시술을 한 것만으로도 환자는 기운이 나는지, 나를 보자마자 내일부터 항암 치료를 시작한대요, 하고 흥분한다. 그 치료만 받으면 만사가 끄떡없다는 듯이......

이 포트 캣 시술은 몸속에 진행되는 암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시술이다. 계속해서 주사를 맞아야 하는 환자의 혈관이 너무 가늘고 잘 나타나지 않을 때 일종의 고정 캡슐을 박아놓아 그곳을 통해 쉽게 주사를 놓을 수 있어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편리한 장치이다. 한번 박아 놓으면 더 이상 주사가 필요 없을 때까지 1, 2년 두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일단 항암 치료가 시작되면 퇴원하여 외래 방문으로 항암 주사를, 이 포트 캣을 통하여 맞게 된다. 아들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퇴원하면 갈 곳이 없다고 걱정하시던데 한국으로 모시고 갈 수 있어요?” 

  “저의 집에 모셔야지요.”


그렇게 씩씩하게 대답은 했지만, 중환자인 어머니를 편하게 모실만한 적당한 장소는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박춘자 씨는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아 항암 주사를 맞을 수 없었다. 어린 자식이 넷이나 집에서 기다린다는 딸은 닷새를 머무르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아들이 일주일을 더 머물기로 하고 남았다.


  “내가 제발 며칠만 더 있다가 가라고 그랬어요. 아들을 보니까 못 보내겠어요.”


환자는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긴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 돈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막막하지는 않을 텐데.”


검게 그을은 얼굴에 선량한 눈빛을 가진 충북 진천에서 막노동하며 산다는 이 아들은 어머니가 애써 모아둔 돈을 사기꾼에게 당한 사연을 들어서 알고 있었던 듯 담담히 말한다.


  “사기 치는 사람들도 보면 힘들게 살아요. 그리고 자기들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사기를 치죠. 우리 어머니같이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은 급해서 도와주는 손인 줄 알고 덥석 잡지요.”


아들은 열심히 어머니의 다리를 주물러준다. 환자의 다리는 자꾸만 퉁퉁 붓는다. 아랫배도 많이 부어올랐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얼굴이 전체적으로 노란색이다. 하얘야 할 눈자위도 노랗다. 계속 아침, 저녁 물 한 모금 못 마시게 하면서 계속해서 피를 뽑아가고 검사실로 끌고 다닌다. 숨이 차다고 하면 폐 전문의가 와서 가슴 엑스레이 찍고 폐 CT 검사를 하라 하고, 배가 아프다고 하면 장 전문의가 와서 장 초음파 검사를 명령하고, 하루 한 번씩 방사선실로 끌려가 허리춤에 연결된 튜브를 갈아 끼우고 골반 MRI를 찍어야 한다고 다리를 못 펴는 사람 비명만 지르다 나오게 하고...... 검사 때문에 입이 바짝 타오르게 말라 들어가도 물을 못 먹게 하니 그 고통이 더 커요, 하소연한다. “그냥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요” 한다. 나는 그것이 의사로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일인 줄은 알지만, 정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어차피 암 말기에 고통만 남은 채, 회복은 100만 분의 1이라는 기적을 바라는 것뿐이라면 먹고 싶은 것 먹고 목마를 때 물 마실 수 있는 인간 최소의 욕구만이라도 채울 수 있게 하는 것이, 소용도 없는 검사 한다고 혓바닥이 말려 들어가는 갈증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나는 수십 번 그 생각을 하고 또 했으나 시원한 답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의사가 섣불리 '희망이 없으니 이 모든 검사를 하지 말자'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언제가 환자의 가족이 의사에게 얼굴이 벌게서 폭언하는 것을 보았다.


  “의사가 돼서 환자를 살려볼 생각은 안 하고, 뭐? 호흡기를 떼는 것이 어떻겠냐고? 네가 정말 의사냐?!”


환자의 딸이라는 아주머니는 복도에서 의사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 거의 뼈가 보이는 지경이 된 이 90세의 환자는 이 보조 기구에 의해 숨은 붙어있지만, 이따금 신음하며 몸을 뒤척이는 걸 보아, 느끼는 고통은 꽤 큰 것 같았다. 바로 얼마 전에 이 욕창이 곪아 마취를 하고 긁어내는 수술을 했는데 바로 그 옆에 잠깐 사이에 더 큰 욕창이 생긴 것이다. 젊은 의사는 전혀 살 가망이 없는 환자가 계속 고통 속에 있는 것이 안타까워 호흡기 제거의 의향을 물은 것 같았다. 사람들의 생각은 제각기 다르니까 무엇이 옳은지 나는 모른다. 그러니 환자의 고통 같은 것은 생각지 말고 끝까지, 숨넘어갈 때까지 의사의 해야 할 일만 해야 하는지........


소식을 들어서인가, 환자의 친정 식구들이 문병을 오기 시작한다. 일 끝나고 밤에만 올 수 있다는 젊은 조카들은 만나볼 수 없고, 낮에 시간 있어 찾아오는 방문객들은 하나같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70대, 80대의 노인들이다. 모두 선량한 눈빛을 가지고 고달프게 늙어가는 무능력한 노인들뿐이다, 어디 한 군데 아픈 몸 의탁할 수 없는...... 알고 보니 친정 오라버니가 여섯이고 언니가 모두 이 근방에 사는데, 조카들이랑 그 숫자가 대단한 듯하였다. 한결같이 자녀들 따라 미국에 와서 손주들 키워주고, 늙어서 자녀들 집 지하실에 살고 있거나,  운이 좋으면 노인 아파트에 들어가 사는 힘없는 노인네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두커니 앉아서 환자를 바라보다 혀를 차고 돌아가는 일 이외에는, 그들이 죽어가는 동생을 위하여서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머니가 저와 함께 가지 않으시겠대요.....”


한국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그 아들이 말했다. 자식들의 어깨에 자신의 병든 몸을 기대어 힘들게 하고 싶지를 않았던 걸까...... 환자는 말없이 아들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속으로 통곡을 하는 양 온종일 눈을 뜨지 않고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 고통을 토해내는 신음 이외에는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찌 한평생을 살면서 한 조각의 즐거움이 없었을 수가 있을까.


  “답답하고 슬픈 생각은 거두시고 조금이라도 즐거웠던 일을 생각하도록 하세요.”


다음날, 박춘자 씨는 침대를 떠나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워만 있다가 이렇게 의자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니 훨씬 기분이 좋아요.”


나는 그리운 듯 황홀한 듯 창 너머를 바라보는 환자의 시선을 따라, 함께 그곳을 바라보았다. 병실이 4층인 터라 옆에 붙은 건물의 평평한 지붕과 그 너머로 무언지 알 수 없는 뾰족한 탑 같은 것이 보였다. 게다가 우중충한 구름이 낮게 깔려 날씨마저도 을씨년스러운데 그 회색빛의 무미건조한 세상마저 아름답게 보이는 환자의 삭막하게 찌든 가슴이 내 아픔으로 전해져 왔다. 


  “앉아서 보면 보이는 것이 하늘뿐이잖아요?”

  “그래도 이따금 새들이 날아가는 것이 보여요.”


이따금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이 돌아간 고향 충청도를 그 하늘에 그려보는 것이리라. 

  “보고 싶던 아이들을 보셔서 좋았지요?”


아주머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고향 진천에 다들 살고 있어요.”

  “고향에 다시 가고 싶으세요?”


나는 마땅히 할 말이 없어 바보같이 물었다.


  “고향이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 미소 속에는 어린 시절 그녀의 고향 냇가에서 오빠들과 송사리를 잡는다고 물장난을 치며, 떨어지는 석양의 오렌지빛 조명을 받으며 논길을 내달리면 보이는 동구 밖의 느릅나무를 바라보는 듯했는데 그 한 폭의 그림을 놓치기 싫은 듯 오래오래 미소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아들이 총총히 한국으로 떠나버린 이틀 후 환자의 상태는 갑자기 나빠졌다. 병실을 찾으니 의식 불명 상태에서도 온몸을 뒤틀며 고통스러워한다. 온몸이 샛노랗다. 이런저런 살아온 이야기들을 고향 친구처럼 하던 때는 좋았던 때인가, 이제는 작별을 고할 때가 된 듯했다. 그동안 연락을 끊고 살았다던 일가친척들이 병실에 모여들었다. 모두 노인들이고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혼자 오는 분, 부부가 서로 의지해야 하는 듯 손잡고 조심조심 걷는 분, 6남매의 막내라는 박춘자 씨의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하여, 팔십 노인들이 슬픈 얼굴로 찾아든다. 그렇게 하루, 이틀... 팔십 대의 큰 오라버니는 자신도 신통해 보이지 않는 건강에 아예 동생의 마지막 순간을 절대 놓치면 안 된다는 듯 밤에도 침대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킨다.


“이제는 그만 떠났으면 좋겠어요.”


언니라는 노인이 깊은숨을 내쉬며 내뱉는다. 모두 피곤해 보인다. 모든 육신의 기능이 손을 놓아버려도 심장이 뛰면 살아있는 사람이다. 박춘자 씨의 심장은 손을 놓을 줄을 몰랐다.


“정말 굉장한 심장을 가졌어.” 


어느 간호사가 흘리는 듯 말한다. 


본인이 그렇게 말했지만, 평생 행복이 무언지 모르고 살아왔지만, 삶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 것일까... 그렇게 오래오래 심장은 열심히 67년간 해 오던 일을 하더니, 정신을 놓은 지 일주일 되는 토요일 새벽, 마침 병실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갑자기 손을 놓아 버렸다.

계속되는 검사와 시술 때문에 굶으며, 목말라하며 검사실로 끌려다녔지만 조금도 생명을 연장하는데 도움이 안 되었을뿐더러 고통만 가중한 채 병원에 50만 달러의 빚을 남기고 5주간에 걸친 병원에서의 마지막 여정을 끝내고 생명이 떠나간 얼굴은 평화스러웠다.


박춘자 씨는 화장된 후, 애타게 그리던 충북 진천으로 돌아가 선산에 묻혀 마지막 소원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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