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처방대로 병원에 입원하러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형석 씨는 병원 규정인 ‘입원 환자의 휠체어 사용’을 거절하였다. 거절할 만도 한 게, 그의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은 전혀 입원하러 들어오는 환자의 외양은 아니었다. 나이 70은 넘어 보이지만 약간씩 다리를 저는 것 외에는 꼿꼿한 자세와 곧은 어깨가 ‘나는 건강합니다’ 하는 사람의 표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오히려 짙은 고통에 잠긴 부인의 얼굴이 더욱 환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이형석 씨는 당 수치가 높아 3년 전부터 투석을 하는 터였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자꾸만 쑤셔왔다. 스스로 처방해서 약국에 가서 진통제를 사서 먹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몹시 아파서 유심히 들여다보니 좁쌀만 한 상처가 몇 개 도들도들 돋아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약국에 가서 아픈 데 바르는 약을 사서 발랐다. 그런데 별 효과가 없이 상처는 조금씩 검은색을 띠며 번져가고 통증은 커져만 갔다. 그는 한국의 육군 대령 출신으로 월남전에도 참전했던, 군인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다. 그까짓 새끼발가락 하나 아프다고 의사에게 물어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까짓으로 생각하는 새끼발가락에 생긴 염증 때문에 걷는 일도 불편해져 이윽고 조금씩 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투석을 받고 있는데 한 간호사가 그 발가락을 보고 물었다.
“발가락을 의사에게 보인 적이 있었어요?”
“아니요.”
“다음에 의사를 만나면 꼭 발가락을 보여주도록 하세요.”
간호사는 의심의 눈초리를 발가락에 던졌다. 그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이형석 씨는 정기 검진을 하러 간 참에 의사에게 발가락의 도들도들하고 새까만 상처를 보여주었다.
“언제부터 이게 생겼습니까?”
“한참 된 것 같아요. 그동안 약도 사서 바르고 했는데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아요.”
발가락 상처를 들여다보는 의사의 얼굴은 심각했다. 그리고 처방전을 써주며 “병원에 예약해드릴 테니 가서 검사를 꼭 받으십시오” 했다. 이형석 씨는 그 후 MRI 검사와 X-RAY 검사, 다리 혈관 검사를 거치며 발가락의 상처는 사실인즉슨 썩는 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원인은 당뇨였다.
이형석 씨는 군대에 있던 30년쯤 전, 당뇨가 있으니 전문의의 치료를 받으라는 군의관의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당뇨라는 것이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고 상처가 나서 피가 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까짓것, 하고 말았던 것이다. 군인 정신만 제대로 박혀 있으면 만병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리고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당뇨에 대한 경고를 수십 년 전에 의사로부터 받았던 것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그런데 군대에서 제대한 후 미국에 이민 오는 아들을 따라오고 얼마 안 된 7, 8년 전이었다. 뒤뜰에서 정원을 손질하다가 큰 나무줄기에 찔리는 사고로 팔뚝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보기보다 상처가 깊었던지 피가 철철 흐르는 팔을 붙잡고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 상처를 꿰매고 붕대를 감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도무지 피가 멈추지를 않는 것이었다. 밤새도록 출혈이 멈추지 않는 통에 붕대를 갈아주느라 한잠도 자지 못 하고 다시 병원 응급실을 찾은 이형석 씨의 당 검사 결과는 670이었다. 나는 670이라는 이 숫자가, 몸속 피가 끈적끈적한 당분 때문에 제대로 돌 수 없고 자칫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초보적인 상식밖에는 아는 것이 없다. 그리고 이런 숫자는 사실 들어본 적도 없다.
이형석 씨는 응급 치료를 하고 인슐린을 매일 투약하며 음식 조절로 어느 정도 정상적인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는데 결국에는 신장에 무리가 생겨 투석을 하게 되었다. 투석을 하게 되면 투석 환자가 반드시 지켜 먹어야 할 음식이 있는데 이 중에는 당뇨 환자가 먹으면 안 되는 음식들도 있다. 물론 환자마다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투석을 받으려면 흰쌀밥과 흰 빵만 먹어야 한다. 흰 밥은 당이 많기 때문에 당뇨 환자인 이분은 흰 밥은 먹어서는 안 됐는데, 투석을 하게 되면서 당뇨 환자들이 먹어야 하는 잡곡밥, 특히 현미밥을 먹어서는 안 되게 되었다. 칼륨 수치가 높으면 안 되기 때문에 감자나 뿌리 종류를 먹으면 안 되고 단백질이 풍부한 음식은 필수다. 당뇨 환자는 물을 많이 마셔야 하는데 투석환자의 경우에는 국이나 주스 등의 음료를 포함해서 하루에 500mL 이상은 마시면 안 된다. 과일도 수분 조절 때문에 얼려서 먹을 수 있는 과일만 먹어야 했는데 이렇게 힘들고 까다로운 식사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끼발가락 끝에 복병이 불쑥 반기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처음 그는 혈관 외과 의사에게 보내졌다. 의사는 그를 뉴욕 병원에 입원시켰다. 부인의 설명에 의하면 혈관 외과 의사는 발가락으로 통하는 혈관을 찾아서 막힌 혈관을 뚫으려고 시도했다던가 아니면 최소의 수술로 썩기 시작한 발가락을 살려 보려고 노력을 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병원 일이라는 것은 당장 목숨과 관계가 있는 상황이 아니면 뒤로 밀려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이 담당 의사는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2주일간의 가족 여행을 위해 하와이로 떠나버린 것이다. 그동안 환자들은 하와이의 따뜻한 햇살을 즐기고 있는 의사를 목 빠지게 기다려야만 했다. 어쨌든 의사로서 환자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생활을 즐길 권리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형석 씨의 새끼발가락 상처는 맹렬하게 그 지경을 넓혀갔다.
의사가 없고 아무 치료도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이형석 씨는 퇴원을 당해 집으로 돌아왔다가 통증이 너무 심해 내가 근무하는 홀리 네임 병원에 다시 입원하게 된 것이다. 그의 다리 혈관 검사 결과를 검토한 닥터 윤은 발을 잘라야 한다고 선언했다. 발가락이 아니고 발목까지인 것이다. ‘발가락이 아니고 발’이라는 것은 신발을 신을 수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새끼발가락에 나타난 괴물은 말하자면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매끈한 다리의 피부밑 혈관에는 이미 피가 끈끈해져서 혈행이 원활하지 않았고 다리의 상당 부분이 이미 속에서 썩고 있었다. 그것으로 모든 고통에서 헤어날 수만 있다면 참고 견디리라. 다리가 하나 없어도 잘 사는 사람도 있지 않으냐…. 이형석 씨는 묵묵히 받아들였다.
발을 잘라내는 수술 후에도 이형석 씨는 당뇨 합병증으로 이어지는 고열로, 또는 통증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퇴원이 자꾸만 미루어지는 어느 날이었다. 붕대를 풀어도 될 만큼 절단된 발목 부분이 서서히 아물어가는데 한쪽 끄트머리에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상처가 어쩐지 골이나 있는 것 같았다.
“여기도 완전히 아물어야 마음을 놓을 텐데, 왜 여기는 이렇게 아물지 않고 있는지 겁이 나서 죽겠어요.”
설마 아물지 않으려고…!
“좀 있으면 괜찮아지겠지요.”
그런데 좀 있어도 괜찮아지지 않았다. 심상치 않다고 본 의사가 또 이것저것 검사를 하더니 무릎까지의 절단을 선언했다. 부인은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 재활 훈련을 하면 불편한 대로 두 다리로 걸을 수는 있다. 그러나 무릎 아래 다리를 잘라야 한다면 비극이고 절망스럽다. 받아들이기 힘들다. 두 다리로 걷는 재활 훈련이 아니고 의족을 달고 걷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울어서 얼굴이 퉁퉁 부은 부인이 내 손을 잡고 통곡을 시작했다.
“다리 하나 없애고 어떻게 살아요?”
수년 전 한 환자의 절규하던 말이 생각났다. 아직 오십이 채 안 된 여성이 온몸에 전이된 말기 암으로 더 이상 손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암이 사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종아리에 생긴 종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절규하였었다. 왜 그것이 그냥 가래톳이 생겼다고만 생각했었는지….
“그때 다리만 잘라버렸으면 살 수 있었는데….”
절체절명의 순간이라면 무엇이든 그게 머리통만 아니라면 떼어버리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떤 말로도 지금 이 부인을 위로해줄 수는 없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것만 보고 그다음 날 병실을 찾으니 오른쪽 무릎 아래로는 붕대만 둥그렇게 한 보따리 감겨있을 뿐 종아리가 있어야 할 장소는 텅 비어 있었다. 진통제로 인해 아직 깊은 수면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환자 옆에서 부인은 지금은 텅 비어버린 오른쪽 다리의 절단 아랫부분을 매만지며 “젊어서부터 자신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일만이 중요하다고 하더니 자기 다리 하나도 못 지키고 말았어요.” 하면서 눈물을 닦는다. 오른쪽 다리는 서서히 그렇게 또 잘 아물어갔다. 그러다 보니 심장에 무리가 갔는지 심장 검사를 한답시고 여기저기 끌려다니면서 퇴원을 못 하던 어느 날이었다. 하나 남은 왼쪽 다리 발가락에 좁쌀만 한 염증이 생겼다.
“이게 뭘까요?”
이 좁쌀을 발견한 부인이 내게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내가 알 턱은 없지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의사에게 빨리 보이셔야겠어요” 했다. 그런데 정말 설마설마했던 일이 사실로 나타난 것이다. 의사는 좁쌀을 본 즉시 MRI 검사를 하고는 왼쪽 다리도 어디에서 온 지도 모를 조그만 상처를 통해 당뇨로 인한 괴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소름 끼치는 오직 한 길의 치료 방법은 절단밖에 없음을 선언했다. 아예 처음부터 무릎 아래까지 자른다는 것이다. 나는 그 좁쌀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좁쌀로 보았지만, 그 진단을 듣고 난 후에는 그것이 끔찍한 형상의 좁쌀처럼 보여 감히 들여다볼 엄두도 나지 않게 무섭고 징그러웠다. 사람이 절망하면 감정도 말라버리는 것일까…. 환자도 부인도 담담히 왼쪽 다리의 절단을 받아들였다. 휠체어를 거부할 만큼 씩씩한 두 다리로 들어온 이형석 씨는 한 달 만에 그 두 다리를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양쪽 다리가 없어진 이형석 씨는 부인에게 자꾸만 신발을 가져오라고 성화였다. 가져다가 침대 옆에 놓아두면 그걸 신고 화장실에도 가고 걷는 연습도 하겠다고 갑자기 보이는 신발에 대한 애착이 철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러다가 또 이미 없어진 발가락이 아프다고 약을 좀 발라 달라고 통사정을 하곤 했다. 부인의 가슴을 찢는 투정이고 헛소리였다.
온 몸속에서 요동치던 당이라는 괴물 때문에 몸부림치던 이형석 씨의 씩씩한 육신은 잠시 휴식이 필요한 듯 얌전해져서 마침내 2주일 후에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 퇴원하는 날, 휠체어에 앉은 이형석 씨는 병원에 들어올 때 신었던 큼직한 운동화가 아직도 옷장 한구석에 비닐 주머니에 넣어진 채로 있던 것을 꺼내 소중한 것인 듯 가슴에 안고 떠났다. 나는 언젠가 의족을 붙인 다리에 그 운동화를 신고 씩씩하게 걸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그를 배웅했다.
3개월 후 그를 아는 분을 만났다. 그렇게 두 다리를 절단하는 고통을 겪었는데 결국 얼마 전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렇게 잠시만 더 살 줄 알았으면 그 다리를 자르는 고통은 안 겪어도 좋았을 텐데…. 허긴 그 잠시 후를 의사인들 알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