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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Mar 04. 2023

[10-8] 만인의총과 충렬사

수필 임진왜란



‘남원 만인의총’을 찾아간다. 삼일절 104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12시, 우리 3형제는 남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남원은 대구에 사는 동생, 순천에 사는 동생 등 3형제가 만나기에 알맞은 지점이다. 기왕에 가는 길이니 조금 일찍 가서 만인의총을 보고 싶었다. 만인의총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조선군 1,000명, 남원 주민 7,000명, 명군 3,000명 등 1만 명의 시신을 합장한 무덤이다. 아내에게 간청하여 아침 10시경에 출발했다.      


만인의총은 전라북도 남원시 만인로 3(향교동)에 위치한다. 11시쯤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의 너른 마당에 나무가 군데군데 서있고, 자연석으로 만든 표지석이 눈에 띈다. 거북 모양의 자연석 위에 세워진 표지석에는 ‘萬人義塚’ 이런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것을 풀이하면 萬 일만 人 사람 인 義 옳을 의 塚 무덤 총 즉 ‘만인의총’이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에 대항하여 남원을 지키려다 순국한 사람이 무려 만 명이다. 그들의 숭고한 영혼을 기리려 표지석이다.     


입구를 통과했다. 널찍한 부지가 마음을 편하게 한다. 저 멀리 정면으로 의총이 보이고, 그곳을 향해 넓은 길이 있다. 그 길의 중간 지점 왼쪽에 높은 탑이 서 있다. 파란 하늘과 잘 어울리는 ‘만인의사 순의탑이다.       

홍살문 앞에 섰다. 앞쪽으로 세 채의 건물이 일직선으로 서 있다. 몇 걸음 걸어가서 계단을 올랐다. 첫 번째 일주문 충의문이다. 또 몇 걸음 걸어가서 계단을 올랐다. 두 번째 일주문 성인문이다. 충의문과 성인문에눈 문이 각각 세 개씩 있다. 가운데 문은 양쪽 여닫이 문인데 닫혀 있고, 오른쪽 문은 들어가는 입구이고, 왼쪽 문은 나가는 출구이다. 이들 문은 외쪽 여닫이 문이다.      


그 문을 통과했다. 앞에 보이는 건물을 향해 걸어간다. 이어서 계단을 올랐다. 건문 가운데 현판에는 ’충렬사‘란 글자가 있다. 


충렬사의 전면에는 네 개의 기둥이 있고, 그 사이에 있는 세 개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가운데 문 앞에는 향로가 놓여 있고 향의 연기가 타오르고 있다.

충렬사 안에 제단이 있다. 제단(祭壇)의 한가운데는 하얀 색깔의 위패가 있다. 그 오른쪽과 왼쪽에도 위패가 있는데, 28개씩 모두 56개이다. 그 위패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충렬사는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일곱 충신 곧 정기원, 이복남, 임현, 김경노, 신호, 이덕회, 이원춘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836년(헌종2년) 사헌부 지평 오흥업을 추배(주 : 추가 배향)하여 8충신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이 사당은 1612년(광해군 4년) 건립하였으며 1653(효종 4년)에는 충렬사액이 있었고, 1675년(숙종 원년)에 남원역 뒤 동충동으로 이전하였다. 만인의총은 묘 안에 시신이 없는 허묘이다.

1871년(고종 8년) 제단을 설치하고 춘추로 향사하여 왔으나 일제가 제단를 파괴하고 재산을 압수하고 제사도 금지하였다. 


시신을 수습했던 북문 근처는 일제강점기에 남원역이 세워졌고, 증기 기관차 시절에 쓰다 버린 석탄 찌꺼기 따위를 합장한 곳에 버리는 바람에 이장 당시에 유골을 발굴하려고 했으나 폐탄 찌꺼기만 나와서 어쩔 수 없이 허묘로 지었다고 한다. 전라선을 복선화 하면서 이설했을 때 남원역을 동충동에서 신정동으로 이전한 것도, 경주역을 신경주역으로 통합함과 동시에 동해선을 경주시 외곽으로 이전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다만 현재의 신정동 남원역 남동쪽에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된 만복사지가 남아 있다는 점은 여전한 상처다.


그러다 광복과 더불어 다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모셔오다가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만인의총(구 남원역)을 방문 당시 허술한 묘역을 보고 이장을 검토하도록 지시하여 1964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고, 1981년 사적으로 재지정되었으며, 2016년 5월 10일 전라북도에서 문화재청으로 이관되었다.     


충렬사를 오른쪽으로 감고 돌아 올라갔다. 거기에 커다란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무덤 앞에 상석이 반듯하고, 그 앞에 향단도 있다. 의총 옆에 ‘만인의총 비문’이란 제목의 비석이 있다. 그 내용은 생략한다. 

의총에 묻힌 자가 무려 만 명이다. 저들은 원자폭탄과 같은 다량 살상 무기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칼이나 창 조총과 같은 재래식 무기를 사용했다. 당시의 참상을 일본 승려 쿄넨은 8월 16일자 ‘조선 일기’에 이렇게 표현했다. 

“성안 사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자는 없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다. 알 수 없는 이 세상살이, 모두 죽어서 사라지는구나.”


무자비한 일본인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이를 갈며 저주한다. 그래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나라의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나라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대비책을 마련하기보다 진영 논리에 빠져 사사건건 갈등만 부추기고 있다. 매사에 자기반성이란 없다. 그것이 가슴을 더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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