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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Mar 13. 2023

[7-8]  남원성 전투(南原城戰鬪)의 지휘관들

수필 임진왜란

“전라도를 점령하라.”

5년 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지시를 장유재란 중에 또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 일본군은 우군과 좌군으로 나누어 전라도로 진격을 시작했다.      



이 중 일본의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가 이끄는 좌군은 전라도 남원성을 점령하러 진군했다.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시마즈 요시히로, 하치스카 이에마사로 편성되어 웅천에서 출발했다. 진주를 거치던 중 사천에 상륙한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수군과 합류해 총 56,000명으로 편성되어 남원으로 진군했다. 

반면 조선의 지휘관은 이복남 전라 병사, 이춘원 광양 현감, 이원춘 구례 현감, 김경로 조방장, 마응방 진암 현감, 오응정 방어사, 임현 남원 부사, 오응정 순천 부사, 이덕회 판관, 정기원 접반사, 황대중 의병장, 신호 별장, 조경남 의병장 등이었고, 명나라의 지휘관은 양원 총병, 이신방 중군, 장표 천총, 생승선 천총 등이었다.      

남원성 전투는 1597년 9월 22일(음  8월 12일)부터 25일(음 15일)까지 전라북도 남원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조선의 방어군이 궤멸하고, 군민도 몰살당했다. 그리고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그 결과 일본군은 호남의 곡창지대를 장악하였고, 수륙병진이 가능하게 되었다.      


왜 이런 결과를 낳았는지 전투에 임한 지휘관의 행태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8월 7일 일본군은 구례를 점령한다. 패한 구례 현감 이희춘은 남원으로 들어와 이 소식을 전했다. 총사령관 양원은 전주에 주둔한 유격 진우충과 순천에서 일본 수군을 견제하던 전라병사 이복남에게도 남원으로 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8월 10일, 양원은 남원부사 임현에게 남원성 북쪽에 있는 교룡산성에 있는 가옥들과 남원읍성 주변에 있는 가옥들을 모두 소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급하게 소각하느라 일부 가옥들이 철거되지 못하거나 흙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총사령관 양원에게는 전투에 임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전라병사 이복남은 1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원성 인근에 도착한다. 원래 이복남 휘하에는 병력 3천여 명이 있었으나 남원으로 오는 도중 군사들이 도망을 쳐 군관 50명만 남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복남은 이들을 데리고 옥과현에 있는 조창을 불태우고 서창을 불태우다가 조방장 김경로, 교룡산성 별장 신호, 광양현감 이춘원, 방어사 오응정이 이끄는 병력을 만나 1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복남은 나팔과 태평소를 불고 북을 치면서 만복사 앞 대로를 행진했다. 심지어 일본군 사이를 지나 남문으로 들어갔다. 일본군이 조선인 포로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이기에 저렇게 당돌하냐?”

”전라병사 이 아무개이다.“     


8월 15일, 양원은 동문에서 바라를 울리고 사람을 시켜 성 위에 올라가 소리치게 했다. ‘바라’는 악기로 나각(螺角)을 일컫는다. 이를 듣고 일본군 군사 다섯 명이 동문 밖에 나와 전갈을 청하였다. 양원은 통역관을 시켜 몇 마디 주고받았고, 부하 두 사람을 내보냈다. 일본군 군사들은 그들을 방암봉으로 데려갔었고, 고니시 유키나와와 만났다. 고니시는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저녁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사 5명이 양원을 찾아와서 ‘성을 비우라.’고 요구했다. 이들의 대화를 간략하게 진술한다. 

양원 “나는 열다섯 살 때부터 장수가 되어서 천하를 다니면서 싸워서 이기지 않은 전쟁은 없었다. 이제 정예한 군사 십만을 거느리고 와서 이 성을 지키고 있는데 물러나라고 하니 가소롭다.”

일본 “천여 명 패잔병이 어찌 능히 백만의 군사를 당해내겠소. 명나라 장수가 조선에 무슨 은혜를 입었다고 후회할 일을 하는 것이오?”     


8월 16일 양원은 휘하 기병 50~170기를 데리고 남원성을 탈출했다. 접반사 정기원이 양원을 따라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남은 조선군은 이복남의 진두지휘 하에 싸웠다. 그러나 패색이 짙어져 화약 창고를 불태우고, 이복남 오응정 김경로 이원춘 임현 등은 자폭했다. 조선의 병사들, 명의 군사들, 남원의 주민들까지 무려 10,000명이 전사했다.      


남원성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을까? 당연히 남원성 전투의 총사령관 명의 총병 양원에게 있다. 그는 전투에 직접 나서지 않고 조선군에게 떠넘겼다. 작전 계획을 수립하기보다 주변의 군사를 남원으로 불러들이려고 했다. 총사령관으로서 양원은 무능했다. 그리고 전투에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조선은 왜 이런 자에게 총사령관의 직을 맡겼을까? 명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 그랬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투에서 패배한 책임은 조선의 왕 선조에게 있다. 아울러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책임도 그에게 있다. 


전투에서 승패의 운명은 그 전투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에게 있고, 나라에서 번영과 쇄락의 운명은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 있다. 그 소소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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