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필가 고병균 Dec 02. 2023

[7-7] 남원성 전투(南原城 戰鬪)

수필 임진왜란

경상도 고령의 이동현에서 전투가 벌어진 날, 전라도 남원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의 결과는 극명하게 달랐다.     


1597년 9월 26일(음 8월 16일), 일본군이 남원성을 공격해 온 전투를 남원 전투(南原 戰鬪) 또는 남원성 전투(南原城 戰鬪)라고 하는데, 이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물론 의병과 군민까지 전사하거나 살해된 피해는 1만여 명에 이른데, 일본군의 피해는 고작 200명이다. 어찌하여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9월 17일(음 8월 7일), 일본군은 구례(求禮)를 함락시키고 남원성(南原城)으로 진격해 왔다. 왜군은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宗義智), 4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3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육군과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의 수군이 남원의 동북과 서남으로 나누어 공격해 왔다. 


이에 대하여 조명연합군은 어떻게 대항했을까? 먼저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이 이끄는 3,000명의 군대가 남원으로 들어왔다. 그때 남원성에는 전라병사 이복남과 남원 부사 임현이 지키고 있었다. 광양 현감 이춘원, 조방장 김경로 등이 후원하러 오는 중이었고,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과 전주 부윤 박경신은 2,000명의 군사와 함께 전주성에 머물고 있었다. 


조선군은 도원수 권율의 지휘 아래 이덕형(李德馨), 김수(金睟) 등이 의병 연합군인 흥복군을 조직하고, 모병해서 명군의 계획에 따라 분파했다. 권율은 1593년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조선의 명장이다. 그런데 남원성 전투의 총사령관을 권율에게 맡기지 않고 명나라 총병 양원에게 맡겼다. 이게 패전의 근본 원인이다. 

양원은 총사령관으로서 남원을 어떻게 사수할 것인지 작전 회의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전주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 짐작할 때, 양원이나 전우충 두 사람에게는 전투에서 이기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조선의 권율하고는 그 마음이 하늘과 땅 차이다.      


9월 22일(8월 12일), 일본군은 남원 교외에 진영을 설치하고 정찰대를 파견해 남원성의 방어태세를 확인했다. 


9월 23일, 일본군이 성 외곽을 포위하고 소수 병력을 동원해 조총 사격을 가했다. 조명연합군은 승자총통과 비격진천뢰 등을 발사해 격퇴했다. 양호는 성 주위에 마름쇠를 대량 설치하고 4대문 밖의 석교를 제거하여 일본군의 접근을 어렵게 했다. 마름쇠란 적을 막기 위해 흩어 두었던, 끝이 뾰족한 네개의 발을 가진 쇠못이다. 


9월 24일, 일본군은 공성기구를 제작하고 참호를 메우는 등 본격적인 전투 준비를 했다. 공성기구란 재래식 전쟁 무기로 손으로 줄을 당겨서 돌을 던지는 선풍포, 지금의 수류탄처럼 큰 소음과 연기를 내뿜으며 터지는 철포, 해자(垓子)를 메울 때 사용하는 전호거, 뾰족한 통나무를 매단 당거, 날카로운 검이 많이 달린 검거, 성안에 있는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성을 점령할 때 쓰이는 누거 등을 말한다. 


9월 25일, 일본군은 남원성 동남쪽에는 높은 누각을 만들고 그 위에서 조총 사격을 가해오고, 다른 일대에서는 성 밖의 해자를 메우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추석날, 휘영청 달 밝은 밤에 일본군은 명군이 지키고 있던 서문과 남문을 먼저 돌파하여 성안으로 들어왔다. 이어서 동문을 점령하였으며, 북문의 조선군을 포위했다. 병사 이복남과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등은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했다. 동문을 지키던 중군 이신방, 남문의 천총 장표, 서문의 천총 생승선 등 명군도 모두 전사했다.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은 부하 50기를 데리고 탈출했다.      


9월 29일(음력 8월 19일), 일본군이 전주성으로 진격하자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과 전주 부윤 박경신은 싸우지도 않고 그냥 도망갔다. 이로써 일본군은 전주성에 무혈 입성했다. 호남지역이 통째로 일본군 손에 들어갔다.


도망간 박경신는 파직당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아니하여 시흥 부사로 재 등용되고, 동래 부사, 삼척 부사 등을 역임했으며, 광해군 때에는 경상도와 공홍도의 관찰사까지 지냈다. 공흥도는 충청도의 옛 이름이다. 1505년(연산군 11)에 충공도(忠公道)로, 1550년(명종 5)에 청공도(淸公道)로, 1598년(선조 31)에 충청도로, 1613년(광해군 5)에 공청도(公淸道)로, 1628년(인조 6)에 공홍도(公洪道)로, 1646년에 홍충도로, 1656년(효종 7)에 공홍도로, 1670년(현종 11)에 충홍도(忠洪道)로, 1680년(숙종 6)에 공홍도로, 1729년(영조 5)에 공청도로, 1731년에 홍충도(洪忠道)로, 1825년(순조 25)에 공충도(公忠道) 등으로 바뀌었다. 지명을 따온 지역에서 강상죄인(綱常罪人)이나 배역자(背逆者)가 생기면 바뀌었다. 1896년에 충청도는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로 나뉘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위기의 상황에서 병사 이복남과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등처럼 자폭해야 할까? 아니면 전주 부윤 박경신처럼 그냥 도망쳐야 할까?’ 이런 질문에 답할 학생은 없다. 그 질문을 ‘나라가 위기 상황에 처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로 바꾸면 ‘공부를 열심히 한다.’ ‘국방을 튼튼히 한다.’ ‘외교 역량을 높인다.’ ‘과학을 발전시킨다.’ 등으로 답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성경 말씀 한 구절을 제시한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일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일에도 불의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7-5] 보통 사람 이억기(李億祺)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