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정기룡의 여자

수필 임진왜란 제7부

by 수필가 고병균

임진왜란 중 뛰어난 공을 세운 장수로 정기룡(鄭起龍)이 있다. 그는 명종 17년인 1562년 5월 26일(음력 4월 24일),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에서 증좌찬성 정호(鄭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기룡(鄭起龍)은 1580년(선조 13년)에 고성 향시에 합격하였고,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조의 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향시(鄕試)는 각 도에서 그 도의 유생(儒生)에게 보이던 초시(初試)를 말한다.

정기룡의 본명은 정무수였다. 당시의 임금 선조가 비몽사몽 간에 종각에서 용이 자는 꿈을 꾸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선조는 사람을 시켜서 가보라고 했는데, 거기에 정무수가 있었다. 무과 시험에서 그의 무용이 출중한 것을 보고는 ‘기룡’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그는 1590년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의 휘하에서 일하였고, 다음 해에는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시기에 별장으로 승진하여,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의 휘하에서 종군하면서, 거창 전투에서 일본군 500여 명을 격파하고, 금산 전투에서 직속상관 조경을 구출했다. 곤양의 수성장이 되어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 데 일조했다.

그는 사천 전투에서 패전의 쓰디쓴 맛을 보았다. 당시 총사령관 마귀의 무리한 작전으로 조명연합군이 일본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패배한 것이다.

이후 상주 목사 김해의 요청으로 상주 판관이 되고, 상주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진주성 부근에서 소수 병력으로 왜군을 견제하는 등 진주 목사 김시민을 도왔다.

1593년, 회령 부사로 승진해서는 왜적에게 왕자를 내준 반역자 김수량 등 16인을 효수한 일도 있다.

정유재란 이후 고령 전투에서 적의 장수를 생포하였고, 철수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성주, 합천, 초계, 의령 등의 성을 탈환했다.

1601년에는 울산 부사에 올랐고 1610년에는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며 1617년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올라 삼도 수군통제사와 겸직했다.

1622년 4월 8일(음력 2월 28일) 향년 61세로 통영 진중에서 병사했다.


정기룡에 관한 전설이 있다. 그것을 이야기로 꾸며 소개한다.

정기룡이 태어날 때의 이야기

정기룡이 태어나기 전 어머니는 홍역에 걸려 있었다. 출산을 앞두고 어머니는 죽었다. 시신을 염하던 가족이 깜짝 놀랐다. 그녀의 뱃속 아기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할 줄 몰라 쩔쩔매고 있는데, 갑자기 산기가 느껴졌다. 당시에는 제왕절개 수술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바라만 볼 뿐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긴 가족들은 울고만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곡하던 가족이 시신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고, 거기에 아기가 울고 있다. 아, 어머니는 위대하다.

그날 하늘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떴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영웅이 탄생했다고 믿었다. 정기룡은 어려서부터 비범하고 용감했다.


정기룡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정기룡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강씨 부인을 잃었다. 이런 일이 있기에 ‘전쟁만은 안 된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하든지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평화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온 백성이 한마음 한뜻이 되었을 때 지켜진다.

강씨 부인을 잃은 후 그는 다시 결혼하게 된다. 그의 둘째 부인은 권씨다. 그녀도 총명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권씨 여인은 결혼을 한사코 마다했다. 아버지의 강한 설득에도 끄떡하지 않아 노처녀가 되었다. 당시에 노처녀라고 하면 20세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정기룡을 만났다. 맞선을 보았는지 모른다. 정기룡의 남자다움에 매료되었는지 결혼을 결심했다.

정기룡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당시는 전쟁 중이다. 옛 부인과의 정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떠올리며 장가를 들까 말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돌아오지 않은 전 부인을 마냥 그리워할 수만은 없었다. 혈기 왕성한 정기룡은 마침내 권씨를 둘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권씨 부인은 특이하게도 말을 키우고 있었다. 날쌔고 힘센 말을 골라 남편에게 주었다. 그 말은 정기룡이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보면 정기룡을 임진왜란의 용장으로 만든 인물이 둘 있다. 하나는 그의 어머니요, 다른 하나는 그의 부인 권씨다. 이 두 분 여자에게서 위대함을 느낀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란 밀이 있다.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가르치기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고사이다. 맹자를 훌륭한 인물로 키운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나의 증조할머니를 소개한다. 20세에 우리 가문으로 시집와서 21세에 아들을 낳았고, 22세에 혼자되었다. 청상과부로 그 아들을 부동면장으로 장흥 읍장으로 키운 분이다.

“애비 없는 아들, 누구더러 가르치라고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인데, ‘매를 때려서라도 가르쳐 달라.’고 했다는 증조할머니의 절규는, 37년 동안 초등학교 교육자로 봉직한 나의 가슴을 울린다.

훌륭한 인물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 정기룡의 어머니, 맹자의 어머니, 그리고 나의 증조할머니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나라의 인물을 어머니가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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