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0] 1패 3승의 전투

수필 임진왜란 제8부

by 수필가 고병균

1597년 추석 이후 4번의 전투가 있었다. 육지에서 황석산성 전투와 직산 전투 두 번, 바다에서 어란포 해전과 벽파진 해전 두 번이다. 이들 전투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한다.


황석산성 전투(黃石山城 戰鬪)는 1597년 8월 16일(9월 26일)부터 18일까지 3일 동안 진행된 전투로 조선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8월 16일,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이 황석산성을 공략했다. 함양의 황석산성은 호남과 영남을 잇는 길목으로, 왜군이 반드시 차지하려는 요충지다. 그것을 간파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현재의 함양인 안음 현감 곽준(郭䞭)에게 지키게 했다.

곽준은 수성(守城) 계책을 세우고, 성을 보수했다. 성안에 있었던 함양 군수 조종도(趙宗道)와 김해 부사 백사림(白士霖)도 합의했고, 백성들과도 ‘성을 지키자.’라고 결의했다.

왜적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해 왔다. 가토는 남쪽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서쪽에서, 구로다는 동쪽에서 공격해 왔다.

조선의 장수들은 활을 쏘고, 백성들은 돌을 던지며 적의 접근을 막았다. 곽준은 아들 이상(履常)·이후(履厚)와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조종도도 전사했다. 김해 부사 백사림은 사태의 불리함을 알고 자기 가족을 먼저 성 밖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도 도망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장차 나라와 고장의 발전에 공헌할 유능한 인재로 성장해야 한다.’라고 훈화했었다. 이것이 내가 교육했던 목표였다. 그 목표는 안의 현감 곽준이나 함양 군수 조종도와 같은 지도자가 되라는 것이요, 적어도 성을 지키기 위해 몸을 바친 함영의 백성과 같은 인물이 되자는 것이다.


육지에서 벌어진 두 번째 전투는 직산 전투, 양호가 지휘하는 명군이 충청남도 천안시의 직산에서 북진 중이던 일본군과 맞붙어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 결과, 일본의 북진을 좌절시키고, 순천, 울산 등으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9월 7일(10월 16일), 일본군은 조총과 활 등을 앞세워 선제공격했다. 그러나 기병 중심으로 구성된 명의 돌격전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일본군의 조총은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명의 기병에 대하여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그들은 병기를 버리고 퇴각하기에 바빴다.

양호의 기병은 신립의 기병과 무엇이 달랐을까? 전투하는 시기가 달랐다. 양호의 전투 시기는 음력 10월, 추수가 끝난 논바닥이 말라 있었고, 신립의 전투 시기는 6월 장마철, 모내기를 끝낸 논에 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기병은 기동성이 생명이지만 신립의 기병은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시기를 가릴 줄 몰랐던 그는 전투에서 패배했다.


1598년 4월 1일(5월 5일), 감옥에서 나온 이순신은 백의종군의 명을 받았다. ‘백의종군’이란 ‘흰 옷을 입고 군대를 따른다'는 뜻이다. 군인의 신분을 박탈한 것이다.

7월 16일(8월 28일) 칠천량해전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조선 수군은 완전히 박살나고 삼도 수군통제사 원균도 죽었다. 이제 그 임무를 누구에게 맡겨야 하나?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은 이순신을 건의했다.

명을 받은 이순신,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선조에 대한 원망도 있을 법하고 원균을 비난했을 법하나, 그러나 이순신은 '만약 왜적을 섬멸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자신의 임무에 집중했다.

그는 판옥선을 수습했다. 모두 13척이다. 그중 12척은 칠천량해전 당시 배설이 끌고 나온 것이다. 배설에게 상을 주어야 할 대목이다.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전투함이다. 갑판 위로 올린 구조물을 ‘판옥’이라고 한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 배는 2층 구조로 되어 있어서, 노 젓는 노군(櫓軍)들의 공간과 전투에 임하는 전사(戰士)들의 공간 등이 분리되어 서로 방해받지 않는다. 저판(底板) 길이는 50~55척이나 되고, 탑승 인원도 130명이나 될 정도로 크지만 노 1개에 노군 5명을 배치하여 기동성을 높였다.


복귀한 이순신이 첫 번째로 맞은 해전은 어란포 해전(於蘭浦海戰)이다.

8월 27일(10월 7일),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의 어란포(於蘭浦) 앞바다에 왜선 8척이 출현했다. 이순신은 그 배를 먼바다로 유인해서 침몰시켰다. 이로써 조선 수군의 사기를 높이는 한편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적에게 알렸다.

두 번째로 출전한 해전은 벽파진 해전(碧波津海戰)이다.

9월 7일(10월 16일),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13척을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앞바다에서 격침했다. 이 해전을 통해 이순신은 ‘조선 수군에게 판옥선은 13척에 불과하다.’라는 조선 수군의 동향을 왜장 구루시마 미치후사에게 은근히 알려주었다. 그것은 왜 수군을 명량해협으로 유인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조선 수군의 약함을 이용하려는 이순신만의 작전이었다.

이순신은 너른 바다에서 싸웠다. 유인해서라도 너른 바다에서 싸웠다. 그런데 함선이 13척에 불과한 지금은 아니다. 좁은 해협에서 빠른 조류를 효과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그곳이 바로 명량이다. 저들을 그곳으로 유인해야 한다. 참으로 명장 중 명장이다.


이상 네 번의 전투에서 조선의 3승 1패다. 그런데 제목을 ‘1패 3승’이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전투에서는 지면 절대 안 된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만약 이길 수 없다면 아예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대비해야 한다. 그것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특별히 나라를 다스리는 고위 공직자들에게 그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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