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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Jun 04. 2022

[8-4] 명량대첩과 장흥 사람 마하수

수필.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은 군량이 부족했다. 1월의 한파가 몰아쳤다. 그래서 쓰러지는 병사들이 발생했다. 그 위기의 상황에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할복하는 한이 있더라도 싸우겠다.’ 하며 투쟁을 불태웠다. 그 사이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도착했다. 결단력을 발휘한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군 제1 지휘관이다.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은 이순신이다. 제1차 울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은 가토 기요마사이다. 바다에서 싸우건 육지에서 싸우건 전투에서 승리의 원동력은 전투에 임하는 지휘관의 지도력에서 나온다. 


명량 대첩의 지휘관 이순신은 적의 함대를 끌어내기 위한 계략이 있었다. 반면 제1차 울산성 전투의 지휘관 마귀는 별다른 계략 없이 무조건 싸우게만 했다.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1597년(선조 30) 10월 26일(9월 16일)에 벌어진 명량 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 대첩(鳴梁大捷)은 영화로 소개될 만큼 유명하다. 그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마씨가장(馬氏家狀)’이란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이순신의 인기를 가늠하게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대화체로 바꾸어 소개한다.     


마하수(馬河秀)라는 장흥(長興) 사람이 이순신을 만나러 왔다. 미하수는 강진병영성을 축조한 마천목 장군의 후손으로 당시 벼슬은 선공주부(繕工主簿)였다. 현재 주소로는 장흥군 안양면 학송리다.

정유년에 배 한 척을 만들어 해상에서 피난하다가 이 통제(李 統制, 이순신)가 복직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들이 무엇을 걱정하랴.’ 하며 회녕포(會寧浦)로 찾아온 온 것이다.

“칼날을 무릅쓰고 찾아오니 무척 수고했구려, 그대와 함께 온 피난선이 몇 척인고?”

“10척가량 됩니다.”

“그대들은 배를 모아 나의 후원이 되어 군대의 위용을 도와준다면 큰 보조가 될 것이요.”

“제가 비록 늙었으나 공과 함께, 죽고 삶을 같이 하겠습니다.”

李 공(公)이 극구 칭찬하며 시 한 수를 지어 올렸다. 

이 문장에 대하여 두 가지로 의견이 엇갈린다. 내 실력으로는 그것을 확실하게 분간할 수 없다. 

李 공(公)이 (마하수를) 극구 칭찬하며 (마하수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올렸다. 

(마하수가) 李 공(公)을 극구 칭찬하며 (李 공(公)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올렸다.      


문화와 예절 바른 성스러운 선조의 나라 / 어쩌다 추악한 오랑캐가 쳐들어오나 

사나이 늙었어도 장한 이 마음 / 이야말로 전쟁에서 죽을 때로다.     


함께 온 피난선의 선주는 백진남(白振南), 김성원(金聲遠), 문영개(文英凱), 변홍원(卞弘源), 백선명(白善鳴), 김택남(金澤南), 임영개(任永凱) 등이다. 이들 중에 끼어 있던 정명설(丁鳴說)이 나섰다.

“우리들이 본래부터 길러온 것이 충성심인데 오늘날 늦춰서는 안 됩니다.”

이 통상(李 統相)이 피난선의 선주들에게 지시한다.

“먼바다에 열을 지어 군대같이 가장하라.” 

“이 기회를 타서 같이 나간다면 파죽(破竹)의 승세(勝勢)가 오직 이 한 번에 있을 것이요.” “내 마음도 벌써 정했다.”

정명설(丁鳴說)이 응답하니 다른 선주들도 화답하며 출동했다.


피난선이 바깥 바다에서 진을 벌리고 있을 때, 李 공이 적에게 포위된 것을 본 정명설은 칼을 뽑아 들고 “대장부가 죽어야 할 때다.” 하며 두 아들을 데리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싸우다가 탄환에 맞았다. 성룡(成龍)과 위룡(爲龍)이 자기 아버지의 시신을 피난선 위에 올려놓고 적진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적은 이미 이(李) 공(公)에게 패하여 멀리 도망했다. 그들은 분을 풀지 못했다.     


이처럼 전쟁 중에도 이순신을 돕는 민간 선박들이 많았다. 왜 그럴까? 내 생각에는 전투에 임하는 지휘관에게 계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자기의 영달을 꾀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익도 추구하지 않았다. 이런 계략을 나는 거룩한 지도력이라고 말한다. 민간 선박이 자진하여 돕는 일은 거룩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지휘관에게만 나타난다 


제1차 울산성 전투(第一次蔚山城戰鬪)는 울산 왜성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이다. 거기는 가토 기요마사의 1만 5천 군사가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의 본거지다. 

조선군은 도원수 권율(權慄)이 이끈 1만 1천 5백 명, 명나라 부총병 양호(楊鎬)의 3만 6천명으로 일본군의 4배가 넘는 숫자이다. 총사령관은 명 제독 마귀(麻貴)가 담당했다. 

이 전투가 시작된 날은 1598년 1월 29일(음 12월 23일)이고, 끝나는 날은 1598년 (음 1월 4일)로 혹한기였다. 

첫날 명의 제독 마귀는 조명 연합군을 총동원하여 울산성을 사면으로 포위했다. 대포를 쏘며 공세를 펼쳤다. 일본군도 조총으로 응사하며 완강하게 버티었다. 

마귀는 조선군과 명군을 번갈아 공격하게 했다. 먼저 권율의 조선군이 공격하고, 다음날은 명나라 군대가 공격했다. 

10일이 넘도록 공방전을 벌였지만, 조명 연합군은 20,000여 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다. 조명 연합군은 공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군은 군량이 부족했다. 1월의 한파가 몰아쳤다. 그래서 쓰러지는 병사들이 발생했다. 그 위기의 상황에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할복하는 한이 있더라도 싸우겠다.’ 하며 투쟁을 불태웠다. 그 사이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도착했다. 결단력을 발휘한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군 제1 지휘관이다.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은 이순신이다. 제1차 울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은 가토 기요마사이다. 바다에서 싸우건 육지에서 싸우건 전투에서 승리의 원동력은 전투에 임하는 지휘관의 지도력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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