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7부
1598년 7월 19일(8월 20일)에 절이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절이도 해전(折爾島海戰)은 조선은 자존심을 구긴 해전이다. 절이도는 현재의 고흥군 거금도이다. 이 전투에서 민족의 영웅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전선 50여 척을 침몰시켰고, 16,600여 명의 전사자를 발생시켰다. 이런 전투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완전히 구겼다니, 그 이유는 무엇일까?
7월 18일(8월 19일). 이순신은 ‘적 함대 100여 척이 금당도로 온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금당도는 고금도와 거금도 중간의 섬이다. 이 첩보를 전해준 자는 칠천량해전에서 포로로 잡혀갔던 함안 군수 김완이다. 그는 이 해전이 시작되기 며칠 전에 돌아왔다.
이순신은 첩보 제공자를 참수했던 이일이나 신립과는 달랐다. 첩보를 전해준 자를 신임했다. 그의 첩보를 바탕으로 전투를 준비했다. 이것도 이순신의 훌륭한 점이다.
이순신은 수군 함대를 금당도의 길목에 전진 배치했다. 이때 명나라 수군 대장 진린은 합세하지 않고 관망 태세만 취하고 있었다. 얄밉기 짝이 없다.
7월 19일(8월 20일) 새벽, 일본 함대가 거금도(절이도)와 녹도(소록도) 사이를 뚫고 금당도를 향해 다가온다. 기다리고 있던 이순신 함대가 이들을 여지없이 쳐부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남해의 제해권 일부를 되찾았다. 그리고 고흥반도에서 동진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했다.
학자들은 이 전투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한다. 난중일기에도 없고, 이충무공전서에도 없다고 한다. ‘천병(명나라의 장군)을 모욕하는 일은 (명나라의) 황제를 모욕한다.’라는 취지에서 ‘(명나라 장수 진린이)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전투의 전과를 알 수 있었을까? 다른 기록을 참고하여 추중(推重)한 것이다. 먼저 선조 수정 실록(선조 31년 8월)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舜臣自領水軍
순신자령수군(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여)
突入賊中 發火砲
돌입적중 발화포(일본 함대 속으로 돌진하고 함포를 발사함으로써)
燒五十餘隻 賊逐還
소오십여척 적축환(50여 척을 불태움에 적군이 쫓겨 되돌아갔다.)
‘수정실록’은 ‘실록’과 어떻게 다른가? ‘실록’은 임금이 재위(在位)한 기간의 사적(事蹟)을 편년체로 기록한 것으로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를 근거로 정리하여 편찬한다. 그런데 ‘수정 실록’은 실록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보완할 부분이 나타났을 때 다시 편찬한 것이다. 따라서 ‘수정 실록’은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편찬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거나 변질될 수 있다.
‘50여 척을 불태움’에서 적선 50척에 승선한 왜 수군은 얼마나 될까? 일본 수군 전투함 아타케부네의 승선 인원은 노꾼이 50명에서 200명, 전투 요원이 100명에서 200명이다. 이를 미루어 최소 16,000명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빛나는 전투에 대한 공식 기록이 없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이 분개하고 있다.
200여 년이 지난 1795년에 윤행님(尹行恁)이 편찬한 ‘이충무공전서’에 참 이상한 같은 기록이 있다. ‘녹도만호 송여종이 진린에게 적 전선 6척과 수급 69개를 상납했다.’
이상 살펴본바 절이도 해전은 분명 조선 수군의 대승이다. 그러나 그 전과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이는 자존심을 구긴 것이다. 이순신 개인은 물론 조선이란 나라의 자존심도 구긴 것이다.
구겨진 자존심, 어떻게 하면 회복될까? ‘멕시코 한인 이민자’ 이야기를 예로 든다.
1905년 4월 4일 한인들을 태운 영국의 화물선 일포드호가 제물포항을 떠났다. 그 배가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에 도착한 날이 5월 12일이다. 무려 38일이나 걸렸다, 그동안 한인들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을까? 어림도 없다. 그 상황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그 악조건을 견디고 멕시코 서부 살리나 크루스(Salina Cruz)항에 내린 한인 이민자는 1,031명이었다. 이들은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일했다. 뜨거운 사막에서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가시투성이인 에네켄 앞을 잘라내는 일이다. 일이 고된 것은 물론이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채찍에 맞았고, 견디다 못해 도망쳤다가 잡히면 감옥에 갇혔다. 쥐꼬리만 한 임금에 집세도 내야 하고, 멕시코까지 오는 뱃삯도 갚아야 했다. 한인들은 인간으로서 자존심을 지킬 수 없었다. 그 고단한 삶이 어떠했을까?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4년의 계약 기간이 끝났을 때, 조선은 일본에 합병되었다. 한인들은 돌아갈 조국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민자들은 한인회를 조직하고, 독립자금을 모아 지원했으며, 한글학교를 세워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었다.
120년이 지난 현재, 멕시코 한인 이민자의 후손은 약 5만 명으로 추산된다. 멕시코 인구 1,900만 명의 0.3%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들은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대학교수, 기업가, 고위 공직자 등으로 진출했다. 그 비율이 무려 20%에 해당된다.
멕시코로 끌려간 한인 이민자들은 구겨진 자존심을 완전히 회복했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 정직하게 사는 것이었다. 온갖 어려움을 은근과 끈기로 이겨낸 정직한 삶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짓밟으려 한다. 중군이 그렇고, 일본이 그런다.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도 마찬가지다. 그 자존심도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어느 위치에서 무엇을 하건 정직한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멕시코 한인 이민자처럼 은근과 끈기로 정직한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