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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고뇌하는 이순신

수필 임진왜란 제10부

by 수필가 고병균

해남 우수영 관광단지에 도착했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3월 말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생생 분다. 상당히 쌀쌀하다. 옷을 단속하고 공연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바람도 덜 분다.


앞에 보이는 바다는 명량해전의 현장이다. ‘20리 밖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는 울돌목이다. 해류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세차게 흐르고 있다.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이 급류를 이용했다. 그 해류는 흐르는 방향이나 속도가 시시각각 변했을 것이다. 그 시각에 맞추어 해당 장소로 조선 수군을 모으는 것도 어렵다. 그런데 이순신은 전투가 급박한 상황에서 일본 수군을 목표하는 그 시각에 목표하는 그 지점으로 유인했다. 어설픈 것이 아니라 아주 깔끔하게 해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순신을 향하여 ‘전투의 신’이라 칭송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오른쪽에 아담한 크기의 동상이 있다. 이름하여 ‘명량을 고뇌하는 이순신 상’이다.

이순신 동상은 광화문 광장에 있다. 진해 해군사관학교에도 있고, 여수 이순신 광장에도 있다. 이중 광화문 광장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은 크다. 동상의 높이 6.5m에 기단의 높이가 10.5m로 총 17m나 된다. 갑옷을 입었고 투구를 썼으며 오른손으로 장검을 잡고 눈을 부릅뜨고 있어 그 위엄이 광장을 압도한다. 여기 이순신 상은 다르다.

우선 동상의 크기가 다르다. 내 키와 비슷하여 아담하다.

동상이 있는 위치도 특이하다. 광장이 아닌 울퉁불퉁 바위가 산재해 있는 바닷가에 서 있다. 밀물이 들면 동상의 발목이 물에 잠길 정도이다.

동상의 복장도 특이하다. 머리에 패랭이 모자를 썼고, 해군 특유의 복장이다. 서양의 해군 복장이 연상된다. 가볍고 날렵하게 보인다.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왼손에 두루마리 형태의 지도를 들고 있다. 그 지도는 자신이 조사한 남해안의 지형지물과 해류의 방향 빠르기 등이 기록된 지도였을 것이다.

상이 바라보는 방향과 그 표정이 특이하다. 여기 상은 포말을 일으키며 흐르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 눈빛에는 위엄보다는 고뇌가 서려 있다.


‘명량을 고뇌하는 이순신 상’이란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이순신은 고뇌에 차 있다.

1597년 음력 7월 16일, 칠천량해전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이게 고뇌의 시작이다.

이순신은 나섰다. 궤멸된 수군을 재건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자신뿐이다. 그것을 왕도 알고 대신들도 안다. 백의종군 그 상태로 계급장도 달지 않은 채 나섰다.

이순신이 하동 구례 곡성 옥과를 지나가던 중 피난민을 만났다. 그들은 반색했다.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우리는 이제 살았다.”

이순신은 하늘을 보며 한탄한다. 거기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다

“아~ 나라가 무엇인가? 이 순박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8월 3일, 이순신은 삼도 수군통제사 임명장을 받았다. 그러나 취임식을 진행하지 못했다. 그만큼 수군을 재건하는 일이 다급하였고, 그만큼 이순신의 고뇌도 깊었다.

8월 7일 순천부에서 장전과 편전, 화살과 무기, 식량 등을 확보하고, 60명의 병사도 충원했다. 낙안에 이르니 마을이 온톤 불에 탔다. 관리와 백성들이 울면서 맞이한다.

8월 15일, 보성에 이르렀는데, 선전관 박찬봉이 왕의 유지를 들고 왔다.

“수군을 없애고 육군에 합류하라”

억장이 무너지는 왕명이다. 때마침 배설이 전선 12척을 끌고 왔다. 칠천량해전 당시 탈영하면서 끌고 나온 배다.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소신을 밝힌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8월 19일, 장흥 회령진성에서 왕의 교지를 보여주며 삼도 수군통제사로 취임했다. 이로써 조선 수군의 재건이 완료되었다. 칠천량해전 이후 약 한 달이다.

명량해전을 앞둔 시점에 이순신에게 백성들은 모든 것을 내어놓았다. 여인네들은 솜이불을 내어주고, 어부들은 재산 1호인 어선을 내놓았다. 손재주가 있는 자는 활과 화살을 만들고, 지리에 밝은 자, 물길을 아는 자는 조선 수군의 길잡이가 되었다.

그래 보았자 조선 수군의 함선은 불과 13척인데, 상대할 일본함대는 133척이나 된다. 이길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수군은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다. 선봉에 나서야 할 전라 우도 수군절도사 김억추는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었다. 김억추는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억기의 후임이었다. 대장선이 앞장서기로 작정한다.

“명량의 좁고 거친 물길은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상대하기에 적당한 장소입니다.”

영암 사람 김극희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을 해남 우수영으로 이동했다.


9월 15일, 결전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순신은 군사들과 결의를 다진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 무엇이 그리 아깝겠는가? 오직 우리에게는 죽음만 있을 뿐이다.”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고,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산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이렇게 다짐했음에도 이순신의 고뇌는 깊어만 간다. ‘어떻게 싸워야 하나?’ 하는 명량해전의 현장 울돌목을 바라보는 이순신 상에서 그 고뇌가 절실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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