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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원균과 칠천량해전

수필. 임진왜란 제7부

by 수필가 고병균

곤장을 맞고 화가 잔뜩 난 원균, 그 뒤 행동은 어떠했을까? 날짜별로 정리한다. 1597년의 음력 날짜(양력 날짜)이다.


* 7월 11일(8월 23일), 원균이 한산도에서 전군을 출정시켰다. 김완이 무리라고 간하였지만, 원균은 무시했다.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군인, 그들은 무슨 죄인가?

* 7월 14일(8월 26일)
점심때, 부산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한다. 조선 수군보다 속도가 빠른 일본 수군이 거리를 벌리며 대결을 회피한다. 원균은 홧김에 이들을 추격하였다. 얼마 가지 아니하여 노꾼들이 탈진한다. 하는 수 없이 복귀한다.
그날 저녁, 조선 수군은 가덕도에 도착한다. 물을 얻기 위해 수병 400명을 보냈는데, 가덕도에 있던 타치바나 나오츠구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다. 원균은 그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비겁한 원균, 그 행위가 이순신과 비교된다.
그날 밤, 조선 수군은 거제도 북쪽 영등포에 정박하려 했으나, 일본군이 이미 정박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은 칠천량으로 이동한다.

* 7월 15일(8월 27일)
새벽,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 도착했다. 꼬박 24시간 노를 저어 휴식이 절대 필요하다. 조선 수군은 한참 오침 중이었다.
이날 낮, 원균은 술만 퍼마실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 수군들은 조선 수군의 동태를 살피고 그 결과를 부산포에 긴급 보고했다. 이순신에게 패배했던 도도 다카토라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은 있는 배를 다 긁어모아 칠천량으로 향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 육군도 칠천량으로 갔다.
그날 밤 10시경, 일본군의 야습이 시작되었다. 작은 배 2척이 조선 수군 한복판에 접근할 때까지 조선 수군은 잠에 취해 코를 골고 있었다. 일본 수군이 대포 2발을 쏘았다. 혼비백산 조선 수군은 닻줄을 끊고 움직이려 했다. ㄱ러나 함대 간 충돌이 일어났고, 군량선 4척에 불이 났다.

* 7월 16일(8월 28일)
새벽 0~3시경, 일본 수군이 추가 도착했다. 비거도선(작은 선박) 10척이 전선 사이를 휘젓고, 병선 5~6척은 진 바깥 복병선을 둘러싸서 불을 질렀다. 원균은 놀라서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고 불화살을 쏘게 하며 변을 전군에 알리는데, 적의 배가 충돌하고 총탄이 날아드니 군사들이 놀라서 실색했다.
오전 3~4시경, 일본 수군 도도 다카도라의 선발대 50척가량 도착했다.
5경(3~5시)에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포를 쏘았다. 우리 수군은 이미 무너졌다. 날랜 자들은 온천(溫川)으로 달아가고, 둔한 자들은 적에게 포위되었다. 어떤 자는 “주장! 주장! 어찌 나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이오?” 다급하게 불렀다. 주장 원균은 술에 취해 일어나지 못한 채 누워서 호령한다. 군관 김대복(金大福)이 편전 10여 발을 쏘았으나 역부족이다.
오전 4~5시경, 가토 요시아키의 부대가 뒤이어 도착했다. 그는 거함에 뛰어올라 몇 사람을 참수했다. 조선 수군이 그를 공격하자 다른 별선으로 뛰어오르려다 발을 헛디뎌 바다에 떨어졌다. 요시아키의 조카 곤시치로 등이 조선 배를 빼앗았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는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김완은 함선이 점령당하자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에 사로잡혔다. 배설은 적선 8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적선의 수가 워낙 많아 밀릴 수밖에 없었다.
원균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오전 6~8시경, 배설은 판옥선 12척과 병사 120명을 이끌고 거제도 해안을 타고 서남쪽 한산도 방향으로 향했다. 이 배는 나중에 이순신에게 인계되었다.
원균은 주력 함대를 진해만과 춘원포로 이동한 뒤, 배를 불사르고 육지로 도망쳤다. 이로써 조선 수군은 완벽하게 궤멸되고 말았다. 그는 일본군에 붙잡혀 죽었다.
전사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칠천도에 딸린 작은 섬에 ‘혈도(血島)’란 이름이 붙었다.


칠천량해전의 지휘관으로 활약한 충청 수가 최호와 배설에 대하여 간략하게 알아본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하나.

최호는 1536년(중종 31) 전라도 임피현 서삼면 발산리(현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서 최치원의 15대손인 최한정(崔漢禎)의 네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39세에 별시 무과에 병과 5위로 급제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성부에서 의주까지 선조 일행의 파천 길을 지켰고, 1593년 9월 22일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받아 가토 기요마사를 상대하여 의주를 수호하였고, 충청 수사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원균의 휘하에서 칠천량해전에 종군하여 싸우다가 끝내 전사했다.

배설은 1551년 경상도 선산도호부(현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명종 때 한성부윤을 지낸 배덕문(裵德文)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3년(선조 16) 별시 무과 호방(虎榜)에 병과 45위로 급제하여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에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趙儆)을 따라서 남도에 종군할 때, 황간·추풍령에서 조경이 패하자 향병을 규합하여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의병장 김면(金沔)의 명을 두 번이나 어긴 죄로 곤장 20대를 맞았다.

칠천량해전에서 탈영할 때 이끌고 나온 판옥선과 병사들은 이순신에게 인계되었다. 이는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게 했다. 하지만 배설은 여기서 또 탈영했으며, 전란이 끝난 뒤, 선산 땅에서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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