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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이순신과 원균의 임무 교대

수필. 임진왜란 제7부

by 수필가 고병균

강화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군과 달리 일본군은 전략이 진화되었다. ‘왜 조선 수군에 패하였는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분석하고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반영했다.

*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일본 수군의 세키부네보다 훨씬 크고, 화포/총통 발사가 주력이며, 제자리 선회가 되며, 장갑이 견고하다. 따라서 판옥선 1척당 세키부네 5척은 붙어서 화포/총통을 무력화하고 백병전을 벌여야 한다.

* 세키부네는 첨저선이고, 판옥선은 평저선이다. 세키부네가 더 빠르므로 거리를 벌려 전투를 살살 피하면 판옥선의 노꾼들을 지치게 할 수 있다. 대신 세키부네는 이동의 곡률 반경이 커서 내해에서의 싸움은 불리하므로, 내해에서의 해상전은 피하고 외해에서의 해상전은 할 만하다.

* 조선 수군에 맞설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형 선박인 아다케부네를 다수 건조하였다. 아다케부네는 판옥선에 대항하기 위한 선박이었으며 히데요시는 조선(造船) 전문가인 구키 요시타카에게 군선 설계를 맡기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전국의 모든 다이묘에게 기한을 정하고 군선의 건조 척수를 할당했다.

* 조선 수군은 조선군 중 최정예로, 해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다. 수군 대 수군으로는 승산이 없으니, 육군과 합동해서 움직여야 한다.

* 낮에는 육지-해안으로 숨고, 어둠을 틈타 밤에 기습하도록 한다.

* 해안지역에 많은 감시병을 배치하여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따라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활동을 손바닥 보듯 했던 예전과는 달리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의 동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 초량목을 봉쇄한다. 부산포 해전 때는 어이없이 여기 초량목이 열려 있어 조선 수군이 장사진으로 들어와 부산포의 일본 선박들을 격멸하고 돌아갈 수 있었다. 초량목만 지키면 부산포의 함선들도 보호하고, 조선 수군은 절영도(현 영도구)의 외해에서 힘들게 싸움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러는 동안 조선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1594년에 송유진의 난이 일어났고, 1596년에는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설상가상으로 조선에는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돌았다. 1594년 2만 명이었던 수군 병력이 1595년 봄에는 4천1백여 명으로 줄었다.

수군의 병력 문제는 정유년(1597) 봄까지 지속되었으며, 칠천량해전 한 달 전인 6월 중순에 와서야 충원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훈련을 전혀 받지 못한 병력이었다.

이런 상황인데, 선조는 이순신에게 출정을 강요했다. 그 과정을 날짜별로 진술한다.

* 1597년 1월 1일, 조선 조정에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보고가 올라왔다. 12월 11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통역관 요시라를 통해 전한 편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가토 기요마사의 7천 군사가 12월 4일 대마도에 도착했다. 바람에 따라 거제/기장/서생포 중에 상륙할 것이다. 조선 수군을 거제도로 옮겨만 두어도 가토의 상륙에 압박을 주어 그가 태합에게 호언장담했던 것이 거짓이 되어 오만함이 벌 받게 된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나 고니시가) 조선 정부와 계속 협상이 가능하다.”
‘적군이 흘린 정보인데, 믿을만할까?’ 한 번쯤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 1월 12~14일,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이 전함 410척에 분승하여 조선에 재상륙했다. 이를 정유재란의 시작으로 본다.

* 1월 14일, 도원수 권율은 가토가 조선에 상륙한 사실을 모른 채 한산도의 이순신에게 출정 명령을 내린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응하지 않았다.

* 1월 21일, 원균의 보고가 도착했다. ‘내가 삼도 수군통제사였으면 가토를 잡고 일본군 재상륙을 막았을 것이다.’ 그는 이순신에 대하여 질투하고 있었다.

* 1월 23일, 선조는 ‘이순신이 출정하지 않아 이제 끝났다.’라고 격노했다. 그리고 이순신에 대한 탄핵을 논의했으며, 2월 6일 한양으로 압송 명령을 내렸다.

* 2월 9일, 도원순 권율, 경상우병사 김응서, 통제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등은 판옥선 63척과 소선 등 200척의 조선 수군을 장문포로 이동시켰다.

* 2월 10일 미시(오후 4시경)에 200여 척의 조선 수군은 부산포로 진입해 당시 1000척에 달하던 일본 배들을 향해 총포, 화포, 불화살 등을 발사해 파괴했다.

* 2월 13일, 이순신 함대가 돌아오며 가덕도에 잠시 물을 구하러 정박하자, 가덕도의 왜군이 기습해서 초동 1명이 전사하고 병사 5명이 잡혀갔었다. 이순신은 이에 가덕왜성에 포화를 퍼부으며 상륙 공성전을 벌였다. 그러자 부산에 있던 요시라가 직접 와서 사과하고 협상하여 양측의 포로를 교환한 후에야 돌아갔다.
선조가 보낸 선전관이 가덕도에 도착했다. 원균을 대동하고 도착했다. 가덕도는 낙동강 하구 서쪽의 남해상에 있다.

* 2월 26일, 이순신과 원균 사이에 통제사의 임무 교대가 이루어졌다. 인수인계 품목은 판옥선 134척, 거북선 3척, 병력 1만 7천 명, 군량미 9천914석, 벼 500섬, 화약 4천 근, 각 전선에 탑재된 총통을 제외한 여분의 총통 300자루, 건조작업이 진행되던 새로운 판옥선 48척 등이다. 이순신의 땀과 눈물이 밴 이 모든 것을 원균에게 인계하고 자신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순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정유년 일본군이 재차 침략해 온 상황에서 선조는 이순신을 탄핵했다. 그 결과 나라를 누란의 위기로 몰아넣고 말았다. 이게 무능한 자가 권력을 잡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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