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5부
일본군은 남해안 곳곳에 성을 쌓았다. 그 성을 왜성이라 말한다. 장기간 이어지는 전투에서 성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그 성 쌓기를 일본군은 교과서처럼 실천했다. 현재 남해안에 남아 있는 왜성은 모두 31곳이다. 그 목록은 부록에 따로 소개한다.
그것을 축조 시기로 구분한다.
1592년에 축조된 왜성은 단 2곳이다. 일본군이 승승장구하던 해였다.
1593년에 축조된 왜성은 무려 19곳이나 된다. 조선 의병이 봉기(蜂起)한 해였다.
1594년에 축성한 왜성은 1곳이다. 강화회담을 진행한 해였다.
1597년에 축조한 왜성이 8곳이나 된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이다.
1598년에 축조한 왜성은 1곳이다. 정유재란의 마지막해이다.
일본군이 조선 땅을 빠르게 점령하면서 북진할 때는 성을 쌓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조선 땅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백성들은 산성으로 숨는가 하면, 해상에서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게 막혀 보급이 끊어지기 시작했고, 조선의 풍토병이 그들에게 번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명나라 군대가 참전했다. 따라서 일본군은 수세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득이 성을 축조해야 했었다.
왜성의 위치로 구분하면 전라도에 1곳만 있고, 나머지 30곳은 경상도 지역에 몰려 있다. 경상남도 지역에 15곳, 부산광역시에도 13곳, 울산광역시에도 2곳 있다.
왜성은 조선의 성과 어떤 점에서 다를까?
16세기경 일본의 성곽은 도시가 크게 발달하지 않아 일본의 성은 ‘거점’ 역할만 했다. 따라서 성에 들어가는 인원은 병력뿐이었다. 일반 주민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 전투 중 일본의 평민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숨거나 농성하는 방식으로 연명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의 성곽은 어폭보민(禦暴保民)을 기본으로 한다. 주민을 폭도로부터 방어하고 보호하는 것이 성곽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일본군이 조선의 성곽을 활용하여 농성전을 벌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조선군과 명군의 공세를 막으면서 언제든지 공세로 전환할 수 있도록 자기들 방식으로 성을 축조하였는데 그것이 왜성이다. 전투가 빈번하게 벌어진 경상남도의 여러 지역과 부산광역시 그리고 울산광역시에 몰려 있는 것은 당연하다.
왜성의 위치는 해안가나 강기슭이다. 조망할 수 있는 좋은 곳에 밀도 있게 배치되어 있였다. 배를 접선하기 좋게 하려는 것이요, 전투가 발발했을 때 서로 돕기 위한 것이다.
성을 축조할 때 조선 성곽의 돌을 재활용했다. 특히 죽성리 왜성, 선진리 왜성, 영등포 왜성, 성북 왜성 등은 조선식 성곽에 이어 붙이거나 개축하였다.
일본군은 오랜 전란에서 얻은 축성기술과 건축기술을 동원해 빠르게 축조했다. 대부분 포로로 잡힌 조선인 상당수가 왜성 축성에 동원되었으며, 기장의 죽성리 왜성은 일본의 축성기술사가 직접 파견되어 축조하였다.
왜성을 함락하기에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울산성 전투에서 왜장 가토를 자결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조명연합군은 성을 함락하지는 못했다.
왜성의 보존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다. 왜성의 고텐이나 천수각 등 목조건물은 모두 부서지고 없다. 임진왜란 뒤에, 왜성의 석축을 조선식 읍성으로 고쳐 쓰기도 하였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천수각(天守閣)이란 일본의 전통적인 성의 건축물에서 가장 크고 높은 누각을 가리킨다.
왜성은 석벽 틈새에 회반죽이나 흙을 집어넣지 않고 오로지 돌만으로 쌓아 올리는 메 쌓기가 주류였는데, 이는 전시 중이라 급히 쌓아 올리느라 생긴 현상이다. 메쌓기는 폭우가 내릴 시 따로 배수구를 개고 할 필요가 없었고, 혹시 무너져도 흩어진 자재로 다시 쌓아 올리면 되는 장점이 있다. 왜성은 일본 본토의 성들만큼 공을 들여 지은 성이 아니다.
임진왜란 전후에 증축된 조선의 성에서도 이러한 축성 경향이 나타난다. 비교적 정연하게 축조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성벽 기초 위에 다양한 크기의 석재를 부정연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 임진왜란 전후로 확인된다. 이는 조선군이 다급하게 기존 성벽을 증축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왜성의 축조 기술을 도입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군에 끌려간 사람들에 의해서 기술 도입이 이루어졌고, 남아 있는 성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 기술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런 기술이 도입된 사례가 있다. 남한산성과 경성읍성(鏡城邑城) 등의 성벽에 왜성의 기울기를 적용하였고, 수원화성과 강화성(江華城)의 축성에 왜성 성제의 도입이 거론되었다. 함흥읍성에서도 왜성의 기울기를 적용한 것이 있다고 한다.
이들 왜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허물어버릴까? 아니다.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의 역사다. 잘 관리하여 활용해야 한다. 이를 통해 후손들이 우리의 아픈 역사를 인식하고, 나라 지키는 마음을 갖게 해야 한다. 아울러 반성의 시간도 갖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