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제1부
삼포왜란을 진압한 뒤 조선은 삼포를 폐쇄했다. 따라서 대마도와의 통교도 단절되었다. 이렇게 되자 조선과 교역을 통해 생활필수품을 조달해 오던 대마도는 많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1511년(중종 6) 4월, 아시카가(足利) 막부에서 일본국왕사 붕중(棚中)을 파견하여 대마도와 통교할 것을 요청하였다.
일본은 불리하면 수교하자고 제안하고, 수교하면 약속을 어기고 나중에는 난동을 부린다. 참다못한 조선이 압박을 가하면 일본은 물러난다. 시간이 지나면 저들은 또 수교를 요청한다. 일본의 교활한 수법에 조선은 번번이 놀아난다.
삼포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약조가 체결되었다. 9개 조항의 임신약조이다.
첫째, 왜인의 삼포 거주를 허락하지 않고, 제포만 개항한다.
둘째, 대마도주의 세견선을 50척에서 25척으로 반감한다. 세견선이란, 조선시대 일본 각지로부터 교역을 위해 해마다 우리나라로 도항해 온 선박을 말한다.
셋째, 대마도주의 세사미두 200석을 반감해 100석으로 한다. 세사미두란 조선 세종 때부터 해마다 쓰시마(對馬) 도주(島主)에게 내려 주던 쌀과 콩을 가리킨다.
넷째, 도주의 특송선을 폐지한다.
다섯째, 도주의 아들 및 대관(代官)·수직인(受職人)·수도서인(受圖書人)의 세견선과 세사미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섯째, 도주의 세견선 이외의 배가 가덕도 부근에 와서 정박하면 적선(賊船)으로 간주한다.
일곱째, 심처왜인(深處倭人)과 수직인·수도서인은 통교 기간과 공로 등을 참작하여 그 수를 가감하고, 통교가 허용된 자에게는 도서를 개급(改給)한다. 심처왜인은 조선시대 일본의 본토에 거주하면서 조선에 도항한 왜인을 말한다.
여덟째, 대마도에서 제포에 이르는 직항로 외의 지역을 마음대로 항해하는 자는 적왜(賊倭)로 논죄한다.
아홉째, 상경왜인(上京倭人)은 국왕 사신 외에는 도검(刀劍)의 소지를 금한다.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통교를 재개했는데 일본의 일방적인 요구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조선에게도 통교해야 할 다섯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통교하지 않으면 조선의 군사 방위 시설 증가에 따른 국민의 부담 과중이 그 하나요, 북방의 야인 때문에 긴장이 고조되는 시점에 또 다른 한편에 긴장 요인을 둘 수 없다는 점이 그 둘이며, 후추·단목(丹木) 등 약용품의 수입 필요성이 그 셋이요, 지리적으로 일본과 절교하기 어렵다는 점이 그 넷이며, 대마도는 생활필수품과 식량 등이 궁핍하여 왜란이 재발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그 다섯이다.
이렇게 보면 임신약조는 조선과 일본 서로의 필요에 의하여 체결된 것이다. 조선과 일본은 상호 간에 건강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염려 때문이었는지 조선 정부는 통교에 따른 3가지의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요건은 삼포왜란의 수괴를 참수하여 보내라는 것이다.
강화 교섭이 진행되는 중에 일본국왕사 붕중은 1512년(중종 7) 윤5월에 대마도로 가서 삼포왜란의 주모자를 참수하여 바쳤다. 조선 정부에서는 그자가 삼포왜란의 수괴였는지 그 진위여부를 꼼꼼하게 따지지 않았다. 형식상 첫째 요구 조건을 이행한 것으로 간주하고 처리되었다. 이후 일본인들은 ‘조선의 눈만 속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둘째 요건은 포로의 송환이다. 그것은 임신약조가 체결된 후에 이행되었다.
셋째 요건은 대마도주 종성친(宗盛親)이 직접 와서 사죄하는 것이다.
소나기는 잠시 피하면 지나간다. 대마도주 종성친(宗盛親)은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조선의 왕이나 대신 중에 누구도 그것을 종용하지 않았다.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 중에서도 나서는 자 없었다. 그냥 넘어갔다. 이 요건은 끝내 이행하지 않았다.
만약 이를 빌미로 군사를 일으켰다면 어떠했을까? 그래도 미루고 버티었을까? 혼을 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아쉽다.
어찌 되었건 임신약조가 체결되었다. 그 결과 조선은 왜인 접대 비용이 크게 줄었다. 그리고 왜인들의 교역 규모도 크게 감소했다.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대마도주의 요구가 들어왔다. 세견선의 증가, 대마도의 수직인·수도서인의 복권과 증가 등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조선은 일본의 요구를 무한정 들어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억누르기만 할 수도 없다.
이렇게 보면 임신약조는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사이의 건강한 약조는 아니었다.
국가 간의 약조는 상호 건강한 긴장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건강하지 않으면 갈등이 일어난다. 그 갈등을 강한 힘으로 제어할 수 있어야 유지된다. 그러나 조선의 왕이나 대신들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다.
1544년에 사량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 측에서 약조를 어겼을 때 적절한 제재를 가했어도 그랬을까?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 속담처럼 갈등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조선의 무능함이 사건을 키웠다고 하면 잘못일까?
어찌 되었건 사량진왜란도 48년 후 일어날 임진왜란을 예고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