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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Jul 03. 2022

[11-4] 임해군의 최후

수필. 임진왜란

어떤 학자는 말한다.

선소의 아들 임해군과 정원군, 순화군 등 3명의 왕자를 조선 최고의 망나니라고. 현대 용어로 말하면 사이코패스이고, 연쇄살인마라고. 아버지 선조에 의하여 나쁜 버릇이 강화되었다고.

    

1603년 3월 6일, 전 수사 배홍립의 집에서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강도질을 한 사람은 송림부정 언경과 옥림부수 계윤 두 사람이었다.



선조는 그들을 추궁하라고 명했다. 강도질한 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자기 아들 임해군의 이름을 사칭한 것만 언급했다. 선조의 어처구니없는 행태가 사람들에게 곱게 보일 리 없다. 사관들이 그 기사 밑에 평을 달아 놓았다.     


“사신은 논한다. 맹자가 ‘습기를 싫어하면서 낮은 지대에 산다.’라고 했다. 사람이 불선(不善)하면 모든 악명이 그리로 모이는 법이다. 임해군의 패망이 극도에 달했으니 무뢰배들이 사칭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이때 그가 대죄하는 양심을 인하여 그가 평일에 저지른 패도함을 책망함으로써 그 스스로 반성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있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지는 않고 단지 사칭하는 무리만을 징계하여 다스리려고 했으니, 왕자가 교만 횡포하고 소민이 원망하여 배반하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 없다.”      


‘임해군의 패망이 극도에 달했으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뢰배들이 사칭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라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무뢰배들이 이름을 사칭한 원인을 왕자 임해군에게서 찾고 있다. 그러면서 ‘반성하도록 징계하여 다스리지 않는 것’을 지적한다. 그것이 없어 ‘왕자가 교만 횡포하게 되었다.’고 비난한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왕이 이러면 나라의 신하는 물론 일반 백성도 불행해진다.      


1608년 2월 14일 장령 윤양, 지평 민덕남, 헌납 윤효선, 정언 이사경 등이 광해군의 어전에서 임해군의 치죄를 간청했다.      


“임해군 이진은 오랫동안 다른 생각을 품고 사사로이 군기(軍器)를 저장하고 몰래 사사(死士)를 양성했습니다. 지난해 10월 대행 대왕께서 미령하실 때부터 역당들을 많이 모았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많은 명장(名將)들과도 교결하여 무사들을 불러 모아놓고 주야로 은밀히 불궤한 짓을 도모하고 있는데 이는 나라 사람들이 다 같이 분명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승하하는 날에 이르러서는 발상하기 전에 공공연히 그의 집에서 나갔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달려 들어왔으니, 그 정적(情迹)이 비밀스러워 가병을 지휘한 정상이 환히 드러났습니다. 이제 가까이에서 영조(營造)하는 것을 가탁하여 철퇴와 환도를 빈 가마니에 싸서 많은 숫자를 들여갔으니, 헤아릴 수 없는 화가 금방 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종사를 보존시킬 대계를 위하여 속히 대신과 병조로 하여금 조속히 처치하게 하여 절도로 유배시킴으로써 성상께서 우애하는 지극한 정을 온전히 하고 중외 사람들의 의구해 하는 마음을 안정시키소서.”      


대간들이 ‘임해군이 사병을 양성하고 있으니’라고 상소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반려했다. 광해군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대간들의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광해군도 어쩔 수 없었는지 임해군을 강화도 교동현으로 이배했다. 이에 발맞춰 의금부에서는 역모 혐의의 관련자들을 추국했다. 홍문관에서도 임해군의 사형을 독촉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윤허하지 않았다. 보다 못해 이이첨이 나섰다. 그는 당시 정권 실세였다.      


임해군이 갇혀있던 민가는 사방이 막혀 있고, 작은 구멍을 통해 음식을 넣어주고 있었다. 그해 5월 3일 교동 현감 이직의 명을 받은 수문장 이정표가 관비에게 독살하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거부했다. 하는 수 없이 직접 안으로 들어가 임해군의 목을 졸라 죽였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조정에 보고된 사인은 병사였다.     

어떤 학자는 선조의 아들 감싸기에 이어 편애를 지적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에게는 아들이 7명 있었다. 공빈 김씨의 소생 장남 임해군은 21세, 차남 광해군은 18세, 안빈 김씨의 소생 셋째 의성군은 임진왜란 이전에 죽었고 넷째 신성군은 14세, 다섯째 정원군은 13세, 순빈 김씨의 소생 여섯째 순화군은 13세, 정빈 민씨의 소생 여덟째 의창군은 4세였다.



이 중 안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을 편애했다고 말한다. 임해군과 순화군을 합경도고 파견할 때도 신성군만은 자기를 따르게 했다. 여차하면 왕세자를 바꿔치기할 뜻이 있었다. 선조의 아들 감사기와 편애는 나라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당대에는 물론이고 제15대 광해군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라고 했다. 제가(齊家)도 못하고 수신(修身)도 안된 인물이 왕의 자리에 치국하고 있으니 조선이 어찌 평천하 될 수 있을까?

청량사의 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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