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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Jul 03. 2022

[11-3] 광해군의 등극

수필. 임진왜란

제14대 선조는 제13대 명종의 적자가 아니다. 명종은 인순왕후로부터 순화세자를 낳았으나, 9세가 된 1563년에 요절했다. 그리고 4년 후에 명종마저 승하하면서 하선군을 후임 왕으로 즉위시켰다. 하선군은 제11대 중종의 손자이다. 그의 할머니는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이고, 그의 아버지는 중종의 아홉째 아들 덕흥대원군이다.


광해군이 조선의 15대 왕으로 오르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가중시킨 자들이 있었다. 먼저는 아버지 선조이다. 그리고 영의정 유영경과 명나라였다.


선조는 전쟁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궁방전 정책을 실시했다. 23명이나 되는 왕의 자녀들이 넉넉하게 살기 바라며 시행한 정책이다. 이 정책의 폐해를 몇 가지 들어본다. 첫째는 궁방전을 관리하는 관리들의 횡포였다. 백성들이 개간한 땅을 관리들이 멋대로 나라의 땅이라고 기록하고는 빼앗았다. 둘째는 땔감에 관한 것이다. 백성들에게 땔감은 필수품이다. 그것을 구하러 산으로 들어가면 관리들이 입산료와 땔감비를 징구했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진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선조는 51세 때인 1602년에 영돈녕부사 김제남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19세였던 인목왕후는 1606년에 아들 영창대군을 낳았다. 나의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는 무슨 책을 읽으시다가 ‘창아’, ‘창아’ 하며 읊조리는 것을 들었는데 바로 그 영창대군이다. 이는 불행의 씨앗이었다.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은 치열한 왕권 투쟁을 벌였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왕권에 대한 미련을 벼리지 못한 선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산은 당파 싸움이었다.


몸이 쇠약해진 선조는 1607년 10월부터 병석에 누웠다. 10월 11일 비망기를 내려 ‘광해군에게 전위하겠다.’라고 밝혔다. 여의치 않으면 대리청정이라도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영창대군을 후원하던 소북의 영수 유영경이 그 내용을 결사적으로 숨겼다.


1608년 1월, 전 참판 정인홍이 광해군에게 전위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선조는 명나라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전위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하며 망설였다. 그것은 적통인 영창대군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이때 영창대군의 나이는 불과 3세, 어린 왕자를 보위에 올리는 것은 불가하다. 그것을 깨닫고 선조는 ‘광해군에게 선위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그런데 영의정 유영경은 이것도 감추었다. 그러다가 대북파 정인홍에 의해 발각되었다.      


대신들이 유영경을 치죄하는 과정에서 선조가 돌연 세상을 떠났다.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고 수렴청정하라고 종용했다.

유영경이 어린 영창대군을 보위(寶位)에 올리려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선조의 뜻을 받들려고? 적통을 이으려고?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진정한 이유는 영의정 유영경에게 물어봐야 한다.


유영경의 이런 조처는 결국 피를 불렀다. 영창대군은 북파 이이첨 등에 의하여 폐서인으로 강등되었고, 1614년 9살의 영창대군, 세상 물정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 그를 못된 어른들이 탐욕의 제물로 삼았다.      


광해군이 보위에 오른 것은 결국 인목대비의 결단이었다. 선조의 유명에 따라 언문 교지를 내렸다. 그러나 자기 아들의 장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1608년 2월 2일, 34t의 나이로 보위에 오른 광해군은 조정의 기풍을 바로잡고자 했다. 임진왜란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 데 힘을 쏟았다. 정유재란이 끝난 뒤에 새장가드는 일에만 골몰한 선조에 비하면 무척이나 바람직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안이 순순히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광해군은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왕 책봉을 청했다.

명나라 조정에서 제동을 걸었다. 요동 도사 엄일괴와 만애민을 보내 광해군의 세자 책봉 과정에 반론을 제기했다. 임해군을 빌미로 조선을 압박했다.


명나라의 뜻을 감지한 조선 조정에서는 엄청난 양의 은을 모아 사신에게 안겨주었다. 그 두 사람은 임해군을 면담한 뒤 신료들에게 ‘그를 박대하지 말라.’고 형식적으로 종용하고 돌아갔다. 그때부터 명나라의 환관들이 너도나도 사신을 자원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임해군의 존재는 조선 조정의 굴레가 되었다. 바야흐로 그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무궁화 괴롭히지 않으면 이렇게 곱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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