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경상도의 고령 이동현에서 전투가 벌어진 날, 전라도 남원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의 결과는 극명하게 달랐다.
1597년 9월 26일(8월 16일), 일본군이 남원성을 공격해온 전투를 남원 전투(南原 戰鬪) 또는 남원성 전투(南原城 戰鬪)라고 하는데, 이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은 물론 의병과 군민들까지 1만여 명이 전사하거나 살해되는 피해를 보았다. 반면 일본군의 피해는 고작 200명뿐이었다. 어찌하여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9월 17일(음력 8월 7일), 일본군은 구례(求禮)를 함락시키고 남원성(南原城)으로 진격해 왔다. 왜군은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宗義智), 4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3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육군과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의 수군이 남원의 동북과 서남으로 나누어 공격해왔다.
조명 연합군은 어떻게 대항했을까? 먼저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이 이끄는 3,000명의 군대가 남원으로 들어왔다. 그때 남원성에는 전라병사 이복남과 남원부사 임현이 지키고 있었다. 광양현감 이춘원, 조방장 김경로 등이 후원하러 오는 중이었고,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과 전주부윤 박경신은 2,000명의 군사와 함께 전주성에 머물고 있었다.
조선군은 도원수 권율의 지휘 아래 이덕형(李德馨), 김수(金睟) 등이 의병 연합군인 흥복군을 조직하고, 모병해서 명군의 계획에 따라 분파했다. 권율은 1593년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조선의 명장이다. 그런데 남원성 전투의 총사령관을 권율에게 맡기지 않고 명나라 총병 양원에게 맡겼다. 이게 패전의 근본 원인이다.
양원은 총사령관으로서 남원을 어떻게 사수할 것인지 작전 회의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전주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진우충은 전주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 짐작할 때, 그 두 사람에게는 전투에서 이기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조선의 권율하고는 그 마음이 하늘과 땅 차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전세가 불리해지자 양원은 꽁무니를 뺐고, 진우충은 ‘남원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냥 도망쳤다.
9월 22일(8월 12일), 일본군은 남원 교외에 진영을 설치하고 정찰대를 파견해 남원성의 방어태세를 확인했다.
9월 23일, 일본군이 성 외곽을 포위하고 소수 병력을 동원해 조총 사격을 가했다. 조명 연합군은 승자총통과 비격진천뢰 등을 발사해 격퇴했다. 양호는 성 주위에 마름쇠를 대량 설치하고 4대문 밖의 석교를 제거하여 일본군의 접근을 어렵게 했다.
9월 24일, 일본군은 공성기구를 제작하고 참호를 메우는 등 본격적인 전투 준비를 했다. 공성기구란 재래식 전쟁 무기를 말한다. 손으로 줄을 당겨서 돌을 던지는 선풍포, 지금의 수류탄처럼 큰 소음과 연기를 내뿜으며 터지는 철포, 해자(垓子)를 메울 때 사용하는 전호거, 뾰족한 통나무를 매단 당거, 날카로운 검이 많이 달린 검거, 성안에 있는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성을 점령할 때 쓰이는 누거 등을 말한다.
9월 25일, 일본군은 남원성 동남쪽에는 높은 누각을 만들고 그 위에서 조총 사격을 가해오고, 다른 일대에서는 성 밖의 해자를 메우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추석날, 휘영청 달 밝은 밤에 일본군은 명군이 지키고 있던 서문과 남문을 먼저 돌파하여 성안으로 들어왔다. 이어서 동문을 점령하였으며, 북문의 조선군을 포위했다. 병사 이복남과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등은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자폭했다. 동문을 지키던 중군 이신방, 남문의 천총 장표, 서문의 천총 생승선 등 명군도 모두 전사했다.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은 부하 50기를 데리고 탈출했다.
9월 29일(음력 8월 19일), 일본군이 전주성으로 진격하자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과 전주부윤 박경신은 싸우지도 않고 그냥 도망갔다. 이로써 일본군은 전주성에 무혈 입성했다.
도망간 박경신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파직당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아니하여 시흥부사로 재 등용되고, 동래부사, 삼척부사 등을 역임했으며, 광해군 때에는 경상도와 공홍도의 관찰사까지 지냈다.
선조는 목숨을 걸고 싸운 김덕령은 죽였다. 그러나 도망이나 다닌 박경신은 우대했다. 이것이 선조의 인사 정책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선조 임금님, 후손들에게 무어라고 가르칠까요? 김덕령처럼 싸우라고 가르칠까요? 아니면 박경신처럼 도망치라고 가르칠까요? 시원하게 대답 좀 해주세요.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일본 육군은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해서 명나라 군과 몇 차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조선에는 이순신이 있었다. 그가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발이 묶였다. 보급로가 막힐 것을 우려해 더는 북쪽으로 진격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