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1패 3승의 전투

수필. 정유재란

by 수필가 고병균

1597년 추석 무렵에 4번의 전투가 있었다. 육지에서 두 번, 바다에서 두 번 등 네 번의 전투 중에서 한 번만 패하고, 나머지 세 번은 승리했다.



육지에서 빌어진 첫 번째 전투는 황석산성 전투(黃石山城 戰鬪), 1597년 (음 8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 동안에 진행된 전투로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음 8월 16일),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이 황석산성을 공략했다. 함양의 황석산성은 호남과 영남의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로, 왜군이 반드시 차지하려는 곳이다. 그것을 간파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현재의 함양인 안음현감 곽준(郭䞭)에게 지키게 명했다.


곽준은 수성(守城) 계책을 세우고, 성을 보수했다. 성안에 있었던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 등도 합의했고, 백성들과도 ‘성을 지키자.’고 굳게 결의했다.

왜적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해 왔다. 가토는 남쪽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서쪽에서, 구로다는 동쪽에서 공격했다.


조선의 장수들은 활을 쏘고, 백성들은 돌을 던지며 적의 접근을 막았다. 곽준은 아들 이상(履常)·이후(履厚)와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조종 역시 전사했다. 김해부사 백사림은 사태의 불리함을 알고 자기 가족을 먼저 성 밖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도 도망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장차 나라와 고장의 발전에 공헌할 유능한 인재로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그 목표는 안의현감 곽준이나 함양군수 조종과 같은 지도자가 되라는 것이요, 최소한 성을 지키기 위해 몸을 바친 황석산성의 백성과 같은 인물이 되라는 훈화였다.


육지에서 벌어진 두 번째 전투는 직산 전투, 양호가 지휘하는 명군이 충청남도 천안시의 직산에서 북진 중이던 일본군과 맞붙어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 결과, 일본군을 순천, 울산 등지로 후퇴하였고, 북진을 좌절시켰다.


10월 16일(9월 7일), 일본군은 조총과 활 등을 앞세워 선제공격했다. 그러나 기병 중심으로 구성된 명의 돌격전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일본군의 조총은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명의 기병에 대하여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그들은 병기를 버리고 퇴각하기에 바빴다.


양호의 기병은 승리했는데, 신립의 기병은 대패했다. 도대체 무엇이 달랐을까? 기병은 기동성이 생명이다. 신립의 전투 시기는 6월, 논에 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런데 양호의 전투 시기는 10월, 논바닥이 말라있었다. 전투 시기에 따른 전술과 전략의 차이다.


4월 1일, 이순신은 감옥에서 나왔다.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임지로 돌아왔다. 그때쯤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대패했다.’ 하는 보고가 들어왔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칠천량전투를 지휘했던 원균이 전사했다. 그의 임무를 누구에게 맡겨야 하나? 마땅한 사람이 없다. 선조는 어쩔 수 없이 이순신에게 맡겼다.

명을 받은 이순신,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선조에 대한 원망도 있을 듯하고 원균에 대하여 비난도 했을 법하다. 그런데 내색 없다. 오로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만 수행했다.


그는 판옥선을 수습했다. 모두 13척이다. 그중 12척은 칠천량 해전 당시 배설이 끌고 나온 것이다. 배설에게 상을 주어야 할 대목이다.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전투함이다. 갑판 위로 올린 구조물을 ‘판옥’이라고 한 데서 ‘판옥선’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 배는 2층 구조로 되어 있어서, 노 젓기에 종사하는 노군(櫓軍)들의 공간과 전투에 임하는 전사(戰士)들의 공간 등이 분리되어 서로 방해받지 않는다. 저판(底板) 길이는 50~55척이나 되고, 탑승 인원도 130명이나 될 정도로 크지만 1개의 노에 노군 5명을 배치하여 기동성을 높였다.


복귀한 이순신이 첫 번째로 출전한 해전은 어란포 해전(於蘭浦海戰)이다.

10월 7일(8월 27일),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의 어란포(於蘭浦) 앞바다에 왜선 8척이 출현했다. 이순신은 이 배를 먼바다로 유인해서 침몰시켰다. 이로써 조선 수군의 사기를 높이는 한편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적에게 알렸다.


두 번째로 출전한 해전은 벽파진 해전(碧波津海戰)이다. 10월 16일(9월 7일),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13척을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진 앞바다에서 격침시켰다.


이들 해전을 통해 이순신은 ‘조선 수군에게 판옥선은 13척에 불과하다.’라는 조선 수군의 동향을 왜장 구루시마 미치후사에게 은근히 알려주었다. 이것은 왜 수군을 명량해협으로 유인하기 위한 작전이었다고 하니 그의 전략을 따를 자는 없다. 적이 어쩔 수 없이 나오게 하고, 나오기만 하면 꼼짝 못 하게 하는 그는 명장 중 명장이다.



네 번의 전투 결과 조선은 3승 1패였다. 그런데 굳이 1패 3승이라 했다. 왜 그랬을까? 전쟁에서는 한 번이라도 지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국가 지도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 그것을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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