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년) 4월,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했다. 다대포 첨사 윤흥신, 부산진 첨사 정발 그리고 동래 부사 송상현 등이 죽음으로 항전했지만, 성은 함락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10일 만에 경상도를 점령하고 충청도로 진격해 왔다.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상주로 내려보냈다. 그러나 싸움 한 번 못하고 달아났다. 이어서 여진 정벌에 공이 큰 신립을 삼도 순변사로 삼아 왜군을 막도록 했으나 그도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다. 순변사는 조선 시대 변방의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순찰하기 위하여 왕명을 띠고 파견되던 임시관직으로 정2품 벼슬이다.
1592년 4월 30일(6월 4일),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몽진을 떠났다.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참 무책임하고 비겁하다. 왕도 그렇고 대신들도 그렇다.
선조, “파천하자.”
대신과 중신들, (눈물을 흘리면서) “전하, 종묘와 궁궐이 있는 경성을 고수하면서 외부의 원군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승지 신잡, “자결할지언정 전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수찬 박동현, “전하께서 도성을 나가시면, 인심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연을 멘 인부도 그것을 길모퉁이에 버려둔 채 달아날 것입니다.”
선조, “내가 여기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칠 것이다.”
그러나 선조의 피난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렇게 되자 호위하던 군사들이 달아났다. 궁문에는 자물쇠도 채워지지 않았고,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마저 끊어졌다. 음력 4월 그믐날 밤 선조는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타고 돈의문으로, 왕비는 걸어서 인화문으로 나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밤길에 도승지 이항복이 등롱을 들고 인도한다. 돈의문은 서대문을 가리키고, 인화문은 덕수궁의 정문인데 당시의 이름으로는 경운궁 인화문이었다. 도승지(都承旨)는 조선의 정3품 당상관직으로 도령(都令)으로도 불리었다. 승정원의 우두머리 벼슬로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 격이다.
이 소식을 들은 도성 안 백성들이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닥치는 대로 훔치고,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다. 창고도 노략질하고 불을 질렀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도 불에 타버렸다. 성난 조선의 백성들이 그랬다.
다음 날 새벽, 선조의 행차가 모래재를 넘었다. 비가 많이 내렸지만 개의치 않고 걸어서 벽제관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게 되었다. 왕과 왕비의 반찬은 준비되었으나 동궁(광해군)의 반찬은 없다. 병조판서 김응남이 고기를 잡으려고 흙탕물 속을 뛰어다녔으나 어쩔 수 없었다.
또 파주 목사와 장단 부사가 주방을 마련하여 왕의 수라를 준비했다. 이때 호위병들이 난입하여 먹어버렸다. 선조가 굶게 되자, 장단 부사는 도망치고 말았다.
그날 저녁 선조의 행차가 임진강 나루에 다다랐다. 5월 초하루, 칠흑같이 어두운 밤인데, 임진강을 건너야 한다. 선창을 밝혀줄 등불도 없다. 누군가가 근처에 있던 정자에 불을 질러 선창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이 정자는 율곡 이이 선생이 늘 찾았던 파주의 화석정이다. 생전의 율곡 선생은 제자를 시켜서 정자의 기둥에 기름을 바르게 했다. 충성하는 제자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름칠을 했다. 율곡 선생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튿날 아침 동평관을 출발하던 선조는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이산해야, 류성룡아!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속에 있는 대로 털어놓고 말하라.” 이산해는 이조판서, 류성룡은 영의정이다
신하들은 엎드린 채 눈물만 흘리는데, 도승지 이항복이 ‘의주가 좋다.’고 말한다.
의주로 가는 도중에 선조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망명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선조는 조정을 둘로 갈랐다. 젊고 건장한 신하들은 자기를 따르게 하여 의주로 달아나고, 늙고 쇠약한 신하들은 세자(광해군)를 따르게 하여 전선에 투입했다. 이것을 ‘분조’라고 불렀다. 책임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참으로 비겁한 왕이다.
명나라에서는 선조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왕의 행차는 의주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선조의 비겁한 행동과 조치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세자에게 양위하라.’라는 압력도 받았다. 1552년생 선조는 당시 만 40세로, 왕위를 양위하려는 듯했지만 끝내 물러나지 않았다.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사마귀에게 먹힐 줄도 모르고 매미는 저렇게 노래만 하는구나.」
이 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동평관(東平館)에서 발견된 낙서이다. 어떤 학자는 조선의 조정을 향하여 ‘한심하다.’라고 비웃는 말이라고 해석한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정벌을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있는데, 권력 투쟁에 골몰하고 있는 조선의 왕이나 대신들을 보며 ‘한심하다’고 비꼰 말이라는 것이다.
동평관은 일본의 사신이 머물던 객관(客館)이다. 1407년 태종 7년에 건립했으며,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에 있었는데 그 터를 알리는 작은 비석만 남아있다.
조선의 왕 선조는 매미였다. 사마귀에게 먹힐 줄도 모른 채 노래나 하고 있는 매미였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매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