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의 서곡 6

by 은서의 숨겨진 책

“도시의 매끈한 일상 속에서 균열처럼 스며든 낯선 봉투와, 다시 깨어난 기억의 온실에서 마주친 지훈의 시선까지—겉보기 완벽한 부부의 세계에 서서히 금빛 틈이 벌어지는 〈균열의 서곡 6〉은 도시와 산, 부재와 환기, 설렘과 불안을 교차시키며 사랑과 배신의 서막을 긴장감 넘치게 그려낸다.”




도시의 아침은 시간을 잘라 팔았다. 한 장씩 뜯어 쓰기 좋은 크기로, 정돈된 서랍에 들어가는 규격으로. 창턱에 손을 올려둔 채 나는 유리의 온도를 재보았다. 산에서 데려온 습기는 이미 사라졌지만, 유리 속에는 여전히 얇은 금빛 실금이 겹쳐 있었다. 내가 붙인 것도, 누가 일부러 그려 넣은 것도 아닌—눈에만 보이는 균열. 그 균열이 오늘은 조금 더 선명했다.

식탁 위에는 두 개의 잔이 있었다. 김이 아주 얇게 올라오다가 곧 사라졌다. 그 사라짐이, 오래 남았다. 현우는 신문을 접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보다 먼저, 그의 숨이 아주 조금 길어졌다가 짧아지는 것이 들렸다.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서로의 시선을 알았다. 마주치지 않음으로써 더 깊이 닿는—그런 아침이었다.

현관 쪽에서 작은 마찰음이 났다. 문 아래로 봉투가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두꺼운 크림색 봉투. 손에 들자 아주 미세한 향이 났다. 식물의, 흙의,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섞인 향. 표면에는 낯선 손글씨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 온실의 분갈이 일정과 사진을 보냅니다.

내 손끝이 떠올랐다. 봉투를 열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진의 촉감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종이의 모서리에는 늘 분명한 시간이 있다. 손가락을 대면, 그 시간에 베인다.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광고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아닐 거야.” 더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은 말들이 식탁 위에 놓였다.

서재로 봉투를 가지고 들어가며, 나는 온실의 길을 떠올렸다. 유리의 봉합선이 별자리를 이루던 밤, 램프 불빛의 원형이 바닥에 겹치던 저녁, 보지 않으면서 둘러싸던 숨. 생각의 문장들은 사진보다 먼저 도착해서, 서랍 손잡이에, 책등의 굽은 부분에, 내 손등의 핏줄에 가만히 붙었다.

종이를 꺼내자 첫 장은 목록이었다. 분갈이 일정, 필요한 도구, 빛의 방향. 두 번째 장에는 작은 난의 새 잎이 가까이 찍혀 있었다. 초록의 뾰족한 끝이 빛을 흡수하는 순간—사진은 조용했지만, 내 귀에선 아주 작은 ‘개화’의 소리가 났다. 세 번째 장에는 온실의 유리—금빛의 봉합선이 햇빛을 타고 흐르는 모습이 있었다.

사진의 뒷면, 모서리 근처에 작은 글씨.

— 도시에서도 식물은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조만간 도면을 가져가겠습니다.

내가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 방 안의 공기가 내 대신 반응했다. 종이 모서리가 떨렸고, 책상 위 펜의 그림자가 길이를 바꿨다. 현우가 문을 두드렸다. “점심은 밖에서 먹자. 회사 쪽에서 미팅이 도는 날이라.” 목소리는 단정했다. 단정함은 그에게서 오래된 정장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에도 사진의 초록은 내 눈 속에서 자랐다.

엘리베이터의 거울은 사각형으로 우리를 가뒀다. 우리는 거울 속에서 일치하는 듯 보였고, 실제로는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3층에 멈췄을 때, 문이 열리자 낯선 꽃 냄새가 들어왔다. 누군가의 손에 들린 작은 화분에서 올라오는 냄새였다. 좁은 공간 안에서 냄새는 형태를 얻고, 형태는 방향을 만든다. 그 방향이 나를 이끌었다.

점심 자리에서, 규격화된 접시 위에 담긴 음식은 정해진 순서대로 소모되었다. 현우는 중요한 숫자들을 말했고, 나는 그 숫자들의 무게를 이해하는 척 했다. 웃음이 오고 갔다. 그러나 웃음의 끈은 허술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끊어질 것 같은 얇은 실. 누군가가 “요즘 식물 키우는 게 유행이죠?”라고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물을 마셨다. 물의 표면이 내 얼굴을 잘라냈다.

점심 이후, 나는 혼자 걸었다. 대리석 바닥이 환하게 닦여 있었다. 매끈한 표면은 사람의 발자국을 오래 붙들지 못했다. 지나감은 너무 쉽게 지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발걸음은 소리를 냈다. 내 발이 땅에 닿는 소리, 규칙적이되 약간 어긋난 리듬. 그 어긋남이 내 귀에만 들렸다.

건물 안의 작은 로비—휴게 공간이라 부르기에 너무 정갈한 곳—에는 낮은 의자와 짧은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 얇은 종이 한 장. 안내문이었다.

— 오늘 오후 4시, 도시 식물과 유리 구조물에 관한 짧은 발표가 있습니다. 외부 협력자: R 정원 스튜디오.

문장의 밝기가 갑자기 바랬다. R이라는 한 글자의 모서리가 시간의 방향처럼 날카로웠다. 오후 4시. 내 손목 시계의 초침이, 그 숫자를 가리키는 데 너무 오래 걸릴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줄을 당기듯 흘렀다. 3시 57분, 자리에 앉기 전부터 발표는 시작된 것 같았다. 누군가의 발소리, 누군가의 숨, 누군가의 종이 넘기는 소리. 얇은 소리들이 겹겹이 쌓여 한 겹의 막을 만들었다. 그 막을 지나야만 나아갈 수 있었다.

작은 스크린에 첫 슬라이드가 떴다. 장문은 없었다. 사진과 도면, 조용한 화살표. 고개를 든 사람들 사이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깔끔한 셔츠, 검은 계절, 말보다 먼저 움직이는 손. 목소리는 낮고, 문장은 짧았다. 설명은 과장되지 않았고, 대신 정확했다. 정확함의 끝에서만 생기는 작은 파문이 있었다.

“도시의 온실은 계절을 늦게 받습니다. 유리의 기울기는 빛을 되돌리고, 봉합선은 바람의 결을 바꿉니다. 금속 프레임이 지나치게 단단하면, 식물은 오히려 약해집니다.”

도면 위의 선이 방향을 바꿀 때, 그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 멈춤은 우연처럼 보였지만, 내겐 신호였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부를 수 있는—그런 신호. 시선이 다시 흘러갔다. 발표는 십 분 남짓이었다. 짧았고, 그래서 길었다.

끝나고 사람들의 소리가 사방에서 튀었다. 질문과 인사, 명함의 교환, 다음 약속으로 이어지는 절차들. 절차의 소음은 언제나 컸다.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채 종이 컵을 빈 손처럼 들고 있었다. 그때, 내 앞의 공기가 한 번 접혔다. 접힌 공기는 곧 펴졌고, 그 안에 목소리가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도시의 공기가 너무 건조하지는 않으신가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공손한 인사, 결정된 거리, 준비된 미소. 반말은 허락되지 않았다. 허락되지 않기에 오히려 모든 것이 또렷해졌다. 경계는 살아 있는 선이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내 문장도 간단했다. 길게 말하면 문장끼리 얽히고, 얽히면 숨이 모자랐다. “사진 잘 받았습니다. 분갈이 일정도.”

“고맙습니다. 직접 뵙는 편이 좋겠다 싶었습니다. 도면을 가지고 와서요.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유리문 저편의 복도는 비어 있었다. 우리는 같은 방향을 보았으나 같은 것을 보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가벼운 원고와 얇은 도면 통이 들려 있었다. 나는 빈 종이 컵을 손에 쥔 채, 종이보다 가벼워지려 했다.

작은 회의실에 들어서자, 바닥의 카펫이 소리를 묻었다. 닫힌 공간에서는 오히려 숨의 길이가 바깥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그는 도면을 펼쳤다. 종이의 표면 위로 선들이 누웠다. 검은 선, 회색 점선, 금색으로 아주 가늘게 찍힌 표시. 금색은 밑줄이 아니라 주석처럼 보였다.

“도시는 새벽 햇살의 방향이 일정합니다. 건물 사이의 통로가 바람을 나눠주기도 하고요. 그 통로에서 식물들이 길을 찾습니다. 유리의 봉합선이 그 길을 조금만 도와주면, 새 잎이 더 단단해집니다.”

“도움이라는 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구하고 허락받지 않는 정도입니다.” 그는 잠깐 웃었다. 웃음은 짧았고, 짧아서 오래 남았다. “허락을 받는 순간, 식물은 대답을 선택해야 하거든요. 선택은 자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겠죠.”

문장이 나보다 먼저 걸어 나갔다. 방 안의 공기가 그 문장을 잠깐 붙들었다가 놓아주었다.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그렇습니다.” 그 한마디가 내 무릎을 약하게 만들었다.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멀어지지 않으려고 붙잡는 동작이, 오히려 멀어지게 만든다는 걸 알면서도.

“사진은… 고맙습니다.” 내가 말했다. “도시에 있어도, 그곳의 공기를 기억하게 돼서.”

“기억이 멈추게 할까, 이어지게 할까 늘 고민합니다. 기억은 사람을 구하기도 하고, 묶기도 하니까요. 저는… 기록을 켭니다. 그러나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길을 잃은 분이 자기 발자국을 보시게 하려고요.”

“그 방의 불빛은 꺼졌나요.”

그는 고개를 들어 유리창 너머의 복도를 잠깐 보았다. 복도의 끝에서 형광등이 깜빡였다. “지금은 꺼져 있습니다. 필요할 때만 켭니다.”

형광등의 깜빡임은 오래된 심장박동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침묵할 때마다 복도가 한 번씩 눈을 감았다 뜨는 것 같았다. 도면의 끝에 작은 표시가 있었다. 금빛의 잉크로 찍힌 아주 작은 새싹. 눈을 가까이 대야 보이는 크기. “이 표시는…”

“새 잎이 자라나는 위치를 임시로 적어본 겁니다. 실제로는 매번 달라집니다. 계획은 모양을 바꿉니다.”

“사람도…”

문장은 끝까지 가지 않았다. 문장이 나가지 않은 자리에 남은 것이 있었다. 손끝의 미세한 떨림. 그는 그 떨림을 보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보지 않음으로써 보는 태도. 그 태도가, 더 깊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짧고, 정중하고, 필요했다. 회의실의 공기가 방향을 바꾸었다. 누군가가 문틈으로 “예약 시간이 끝났다”고 말했다. 그는 도면을 모았다. 종이 위의 선들이 한 번 접히고, 다시 펴졌다. 접힌 자리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척을 했지만, 손끝에 남았다.

“잠깐 더 얘기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 대신 문을 열었다. 복도는 사람이 없었다. 복도는 늘 사람이 없어서, 오히려 사람의 형상을 오래 붙들었다. 유리와 금속과 카펫의 냄새가 겹쳤다. 엘리베이터 앞의 대기공간—작은 의자 두 개, 식물 하나, 낮은 조명. 조명이 바닥에 둥근 빛을 깔았다. 빛의 둘레가 한 번 흔들리고, 굳었다.

“도면은… 여기 두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돌려달라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럼 어디에 남나요.”

“방향에 남습니다. 누군가의 발밑에.”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쇠줄과 바퀴가 서로의 시간을 교환하는 소리. 그 소리는 늘 일정했지만, 그날은 불규칙하게 들렸다. 버튼의 불빛이 하나씩 꺼졌다. 문이 열리기 직전, 그는 아주 조용하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나를 바라보는 방법을 잃었다. 괜찮다는 말은 언제나 괜찮지 않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비춘다.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것이 곧 대답이었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의 말, 사람들의 향, 사람들이 외우는 일정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공간은 순식간에 더 얕아졌다.

우리는 같은 엘리베이터에 오르지 않았다. 서로 다른 방향의 숫자를 눌렀다. 문이 닫힐 때 나는 유리의 모서리에서 내 얼굴의 일부를 보았다. 분리된 이마, 잘린 눈썹, 윤곽만 남은 입술. 도시는 언제나 얼굴을 분할했다. 분할된 얼굴이 오히려 더 살아 있었다.

밤에 비가 왔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간격이 일정했다가 서서히 달라졌다. 간격이 달라지면 음악이 달라지고, 음악이 달라지면 같은 방도 다른 방이 된다. 방의 공기가 바뀌자, 가구의 그림자가 낯설어졌다. 낯섦은 때로 사람을 구한다. 나는 낯섦에 기대어 누웠다.

현우가 문을 두드렸다. 아주 가볍게, 충분히 들리게. “늦을 것 같아. 마감이 당겨져서.” 그는 왜인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샤워하고 자”라고 말했다. 배려와 거리의 중간 어딘가에 놓인 문장.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소리가 등뼈에서 났다.

욕실 거울은 김으로 덮였다가 천천히 맑아졌다. 맑아지는 동안에만 보이는 얼굴이 있다. 완전히 드러나면 사라지는 표정. 그 표정이 내 입가에 걸렸다. 손바닥으로 거울의 물기를 닦는 동안, 금빛의 얇은 선이 거울 속에서 지나갔다. 착각이거나, 기억이거나, 신호였다.

현관에서 아주 조용한 소리가 났다. 문틈 사이로 얇은 통 하나—도면이 들어 있는 것과 같은 길이. 열어보니, 안쪽에는 접힌 종이 두 장과 작은 카드를 묶은 끈이 있었다. 카드에는 짧은 글씨.

— 도시의 밤 공기가 유리의 골을 타고 내려옵니다. 환기 시간을 조금만 늦추십시오.

저 문장을 읽는 동안, 내 방의 공기는 이미 환기되고 있었다. 느슨한 봉합, 늦춰진 잠금. 나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가, 닫았다. 바람의 결이 달랐다. 바람은 언제나 누군가의 부재를 먼저 통과했다.

탁자 앞에 앉아 도면을 다시 펼쳤다. 같은 선인데, 밤의 선은 낮의 선과 달랐다. 낮에는 방향이었고, 밤에는 목소리였다. 종이의 표면에서 금빛이 약하게 기울었다. 기울어짐의 각도가 눈물의 방향과 닮아 있었다. 울지는 않았다. 울지 않는 울음이, 오래 갔다.

휴대전화 화면에 작은 점이 떴다. ‘수신 차단 목록에 없는 번호.’ 열어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았다. 화면을 뒤집어 놓았다. 뒤집어 놓은 화면 속에서도 작은 점은 숨을 쉬었다. 점들이 모이면 별자리가 된다. 별자리는 과거의 빛으로 미래를 가리킨다.

“계속 이렇게… 괜찮으시겠습니까.”

카드 뒷면의 글씨였다. 도면의 금빛 표식 옆에 적힌, 거의 보이지 않는 문장. 질문은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허락하지도 않았다. 질문은 거리를 만들었다. 그 거리에서만 대답이 형성되었다.

“괜찮지는 않습니다.” 나는 종이의 가장자리 여백에 그렇게 적었다. “그러나 괜찮지 않음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방향을 원합니다.”

다음 날 오전, 현우는 출근 전에 내 컵에 물을 채웠다. 물의 높이가 유리의 눈금을 정확히 맞췄다. 그는 내 어깨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서랍의 봉투, 누가 보낸 거야?” 문장의 끝은 평평했는데, 그 평평함 때문에 오히려 불안정했다.

“분갈이 일정입니다.” 나는 사실만 말했다. 사실의 질감이 감정을 더 뜨겁게 만든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더 묻지 않음이, 이미 모든 것을 묻고 있다는 의미라는 걸 서로 알면서도. 신발 끈을 두 번 매듭지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멀리 갔다가, 돌아왔다.

오후,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같은 로비에 앉아 있었다. 앞의 유리벽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겹쳤다. 바람이 없는 날에만 가능한 움직임—정확하고, 말이 없고, 필요했다. 문이 열렸다.

“환기 시간을 늦춰주셨습니까.”

“네.”

“공기가 달라졌습니까.”

“네.”

“불편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불편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을 인정하는 사람의 목이 가지는 얇은 강직성. “감사합니다.”

“감사할 일이 아니죠.”

“맞습니다. 그렇지만 감사합니다.”

그 자리에는 의자 두 개가 있었고, 우리는 같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서로 다른 높이에 앉는 일은, 묘하게 사람을 평평하게 만든다. 눈높이가 아니라, 숨높이가 맞춰졌다. 숨이 흔들릴 정도의 거리—그 거리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것이었다.

“도시는 언제부터 방향을 잃었을까요.” 내가 물었다.

“사람이 시간을 가속하기 시작한 때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속도는 방향을 지우니까요. 대신 궤적을 남깁니다.”

“그럼 우리는 궤적에 적응하는 걸까요.”

“적응은 배신과 닮았다고—그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는 웃지 않았고, 웃음은 도리어 오래 남았다. “모든 배신이 파괴는 아닙니다. 어떤 배신은 생존입니다.”

“그 말이 위로가 되지는 않네요.”

“위로가 되려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왔다. 문이 열렸고, 사람들이 흘렀다. 우리는 흘러들어가지 않았다. 흘러들어가지 않는 선택이 곧 가장 거센 흐름이었다.

그는 도면의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여기, 금빛 표식 보이십니까. 이건 새 잎이 아니라—여백의 자리입니다. 아무것도 두지 않는 곳. 식물이 자력으로 길을 찾게 두는 자리. 사람이 손을 들여놓을 수 없는 작은 면적.”

“사람의 마음에도 그런 면적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없으면—모든 것이 금방 무너집니다. 봉합은 금으로 합니다만, 그 금은 빈 곳을 존중할 때만 빛을 가집니다.”

나는 종이를 접어 다시 폈다. 접힌 자리에 얇은 선이 남았다. 선은 금빛이 아니었고, 그래서 더 오래 남을 것 같았다. 그는 그 선을 보았다. 보지 않는 쪽을 선택해 온 사람이, 보는 쪽을 선택하는 순간이었다.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그 빈 면적을—잠깐만이라도 그대로 두게요.”

“그러시죠.” 그는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그 대신… 환기를 늦추는 시간을 늘려 보십시오. 공기가 바뀌면, 결심은 조금 덜 아프게 됩니다.”

“결심이라니요.”

“떠나실 때나, 돌아오실 때나.”

그 문장은 문장의 모양으로 있지 않았다. 숨의 모양으로, 금속의 얇은 떨림으로, 유리의 가장자리로 있었다. 파손이 아니라—예고. 예고는 친절했고, 그래서 잔혹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현우였다. 짧은 메시지, 업무가 늦어진다는 통지, 저녁은 먼저 먹으라는 부탁. 부탁은 명령이 아니었지만, 명령보다 더 분명했다. 나는 ‘알겠어’라고 쓰지 않았다. 대신, ‘응’도 쓰지 않았다. 빈 칸을 보냈다. 빈 칸은 작은 면적이었고, 그 면적은 쉽게 훼손되지 않았다.

저녁 무렵, 유리벽에 빗물이 흘렀다. 첫 방울은 조심스러웠고, 두 번째는 확신했고, 세 번째는 습관 같았다. 도시의 빗방울은 산의 빗방울보다 빠르게 바닥으로 내려갔다. 바닥의 배수구가 제 역할을 하는 도시. 제 역할을 하는 것은 늘 기특하지만, 가끔 잔인하다.

그는 우산을 접었다. 우산살이 유리에 닿아 짧은 울림을 냈다. 그 울림이 내 피부의 안쪽을 가볍게 두드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도면은 두고 가겠습니다. 다음엔—그 빈 자리의 모양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여쭙겠습니다.”

“달라지지 않으면요.”

“그렇다면 더 좋습니다.”

헤어지는 인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래 걸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무거웠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지 않았다. 빗소리가 그 자리를 메웠다. 빗소리는 기록 같았다. 기록은 언제나 정확하게 남았고, 그래서 잊혀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신호등은 질서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규칙 사이의 여백만 골라서 걸었다. 발뒤꿈치가 바닥을 누를 때, 아주 약한 파문이 일었다. 도시의 파문은 금방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들이 오히려 오래 남았다.

현관을 열자, 집은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집은 사람의 모양을 오래 붙들지 않는다. 나는 거실의 램프를 켰다. 둥근 빛이 바닥에 앉았다. 빛은 쉰 숨처럼 보였다. 책상 위에 도면을 펼쳐 놓고, 빈 자리의 모양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밤의 공기가 유리의 골을 타고 내려왔다. 환기를 늦춘 시간은 이미 끝이 났다.

나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바람이 바닥의 표면을 바꾸었다. 바람에는 거절이 없었다. 그저 통과만 있었다. 통과하는 것들이 때로 사람을 살렸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오늘은 조금 더 옅어졌다.

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 이번에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이름만, 벨소리 없이 떠올랐다. 화면은 밝았고, 손은 어두웠다. 나는 손을 거두었다. 화면은 스스로 꺼졌다. 꺼진 화면은 거울이 되었다. 거울 속의 나는 얼굴이 두 개였다. 둘 다 나였고, 둘 다 나가 아니었다.

책상 모서리에 놓인 카드의 뒷면—어제 내가 적은 문장이 보였다.

괜찮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괜찮지 않음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방향을 원합니다.

문장을 천천히 접어 상자에 넣었다. 상자는 어두웠고, 어두움은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또렷하게 남겼다. 유리창 밖으로, 빗방울의 간격이 바뀌었다. 간격이 바뀌면 음악이 바뀌고, 음악이 바뀌면 같은 방도 다른 방이 된다. 나는 같은 방에서 다른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내 안에서 자라기 시작한 한 문장이, 오늘 밤 처음으로 발음을 얻었다. 입술이 열렸다가 닫히는 사이, 그 문장은 거의 들리지 않게 지나갔다. 들리지 않게 지나간 것들이, 내일의 방향이 되곤 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주 조심스럽고, 충분히 들리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까지 걸었다. 손잡이를 잡는 동안, 나를 잡아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 힘은 허락이 아니었고, 거절도 아니었다. 내가 문을 여는 순간, 공기가 한 번 접혔다. 접힌 공기는 곧 펴졌다.

빛이 문턱 위로 흘렀다. 빛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대신, 방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방향이, 금빛의 아주 얇은 선처럼, 바닥을—내 발을—나의 내일을—조용히 긋고 지나갔다.


#균열의서곡 #연재소설 #심리소설 #금빛균열 #사랑과배신

#내면의균열 #상처와빛 #문학적서사 #심리드라마 #고요한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