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아래의 금빛
”산속 온실을 잠시 떠난 하루, “동행 1”이라는 네 글자가 수연의 마음을 어디까지 데려갈지, 산 아래의 금빛을 따라가 보세요.“
아침은 유리 대신 흙 냄새로 시작되었다.
눈을 뜨기 전부터, 창문 너머에서 다른 결의 공기가 들이쳤다. 온실을 통과한 습한 숨이 아니라, 한 번 더 먼 데서 돌아온 냄새였다. 마당 어딘가에서 차가운 엔진이 켜졌다 꺼지는 소리가 났다.
부엌으로 내려가자 관리인은 장부를 펼쳐 두고 있었다.
고양이는 이미 그 위에 반쯤 누워 있었다. 꼬리가 잉크병을 툭툭 쳤다.
“오전 8:12.”
관리인이 소리 내어 말했다.
“오늘의 예보, 수정합니다.”
그는 어제와 같은 자리, 날짜 밑 여백에 글씨를 더했다.
“‘반 발자국 + 산 아래 외출.’”
“외출이요?”
내가 물었다.
“체력도 기록도, 실내에서만 키우면 금방 마릅니다.”
관리인이 장부를 돌려 내 쪽으로 보여주었다.
“산 아래 장 보러 다녀오세요. 자재도 좀 들여야 하고. 집은 가끔 비워줘야 오래 버팁니다.”
고양이가 장부 모서리를 발로 긁었다.
관리인은 그 옆에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감독관, 실내 근무 희망.’”
나는 웃음이 나왔다. 온실의 공기와는 다른 종류의 가벼움이 아침에 섞였다.
그때 뒤쪽 문이 열리며 지훈이 들어왔다. 검은 셔츠 위에 얇은 바람막이를 걸치고 있었다.
“차 시동 미리 좀 걸어뒀습니다.”
그가 말했다.
“오늘, 산 아래까지 내려가 보시죠. 필요한 것들 목록은 다 받아놨어요.”
“나가기 딱 좋은 날씨기도 하고요.”
관리인이 거들었다.
“금빛은 잠깐 창고에 맡겨두고. 돌아오면 또 숨 쉬고 있겠죠.”
나는 창밖을 보았다. 안개가 걷히면서 나무 위쪽만 먼저 드러나고 있었다. 집을 나서는 일은 늘 귀찮음과 두려움, 그리고 희미한 기대를 동시에 데려왔다.
“오늘은…”
지훈이 시계를 한 번 보고 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반 발자국보다 조금 더 멀리 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어제 새벽의 예보가 아침 공기 속에서 다시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오늘은… 산 아래까지.”
⸻
차 안은 온실보다 훨씬 좁았다.
안전벨트가 몸을 가로질러 지나가고, 유리창이 풍경을 잘게 잘라냈다. 도로는 산을 따라 구부러졌다. 바퀴가 자갈을 밟고 미끄러지는 소리가 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지훈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손등의 힘줄이 가볍게 일렁였다.
“멀미하시면 말씀하세요.”
그가 말했다.
“창문 조금 내릴게요.”
“괜찮아요.”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면서도, 손을 무릎 위에서 깍지 끼었다.
산길은 생각보다 좁았고,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나뭇가지가 차체를 긁고 지나갔다. 차창에 스치는 소리가 누군가 균열 위를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들렸다.
한 굽이 돌 때, 안전벨트가 몸을 더 바짝 조였다.
차가 안쪽으로 기울고, 내 어깨가 창쪽으로 쏠렸다가 반대편으로 되돌아왔다. 그 반동에 맞춰 지훈의 팔도 아주 조금 내 쪽으로 기울었다.
“여기 길은, 처음이죠?”
그가 물었다.
“네. 온실 올라올 때는 정신이 없어서… 밑은 제대로 못 봤어요.”
“천천히 보셔도 됩니다.”
지훈이 브레이크를 살짝 밟았다.
“산은 도망 안 가니까요.”
차가 잠깐 속도를 늦췄다.
그 틈에 나는 유리 너머 풍경을 살펴보았다. 나무 사이로 작은 지붕들이 보였다. 회색 슬레이트, 낡은 기와, 잘못 칠한 파란색 톤의 판넬. 그 틈 사이로 군데군데 금빛이 섞여 있었다.
“저건 뭐예요?”
내가 가리키자, 지훈이 시선을 잠깐 돌렸다.
“저요?”
“저기, 지붕에 붙어 있는 거요. 반짝이는 거.”
“아, 태양광 패널 옆에… 열선 테이프일 거예요.”
지훈이 웃었다.
“금색으로 둘러놓으면 예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균열을 가리는 대신, 장식으로 바꾸는 거죠.”
금빛으로 감싼 지붕의 모서리가 햇빛을 받아 짧게 번쩍였다.
잠깐 온실의 유리가 떠올랐다. 봉합선과 틈새,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숨.
“여기도… 금빛이 많네요.”
내가 중얼거리자, 지훈이 조용히 말했다.
“원래 상처가 많은 곳이 빛을 더 잘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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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길은 갑자기 넓어졌다.
버스정류장 하나, 오래된 잡화점, 작은 약국, 그리고 이름 없는 분식집. 도시의 모서리에서 잘려 나온 것 같은 자투리들이 산 아래에 모여 있었다.
차를 세우고 내리자, 흙냄새 대신 튀김기름과 디젤, 젖은 시멘트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숨이 다른 결로 무거워졌다가, 금방 적응했다.
“먼저 어디부터 갈까요?”
지훈이 물었다.
“자재 상점이 닫기 전에 가야겠죠.”
그가 스스로 답을 덧붙였다.
“그리고… 시간 남으면 커피 한 잔 정도.”
“커피요?”
“네. 산에서도 사람은 카페인을 먹고 삽니다.”
그가 웃었다.
“뭐든 한 잔씩은 있어야 버티죠.”
도시에서는 너무나 익숙하던 말이 여기선 조금 다르게 들렸다.
여기서의 한 잔은, 남의 시선을 거의 느끼지 않아도 되는 자리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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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 상점은 잡화점과 함께 붙어 있었다.
문을 열자 종이 짤랑 울렸다. 안에는 나사, 테이프, 페인트, 고무장갑, 과자와 라면, 세제까지 뒤섞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훈이 먼저 인사했다.
카운터 뒤에서 할아버지 한 명이 안경을 올려쓰며 고개를 들었다.
“어이쿠, 산 위 집 사람들 왔네.”
“기억하시네요.”
지훈이 웃었다.
“오늘은 유리 틈새용 실리콘이랑, 배수로에 넣을 망 좀 보고요. 그리고… 생수 몇 박스.”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진열장의 한쪽 끝에 서서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플라스틱 통 너머로 비스듬히 서 있는 유리문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모서리가 깨져 틈이 벌어져 있었고, 그 위를 금빛 테이프가 대각선으로 가리고 있었다.
“여기도… 봉합을 하셨네요.”
내가 무심코 말하자, 할아버지가 돌아보며 말했다.
“그거요? 애들이 축구공을 쳐박아서 깨졌지 뭡니까.”
그는 귀찮지만 어느 정도는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새로 갈까 하다가, 그냥 붙였어요. 저게 생각보다 튼튼해요. 보기에도… 뭐 나쁘진 않고.”
금빛 테이프의 가장자리가 빛을 받으며 번졌다.
나는 그 옆에 비쳐 있는 내 얼굴을 보았다.
유리 금이 내 눈과 입을 삐뚤게 나누고 있었다.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너무 정확해서.
“필요한 거 다 챙기셨으면, 이름 적고 가져가요.”
할아버지가 말했다.
“장부는 밖에.”
상점 문 옆 작은 나무판에 낡은 공책이 매달려 있었다.
지훈이 펜을 들고 날짜와 물건 목록을 적었다.
마지막 줄에 ‘산 위 집’이라고 쓴 뒤, 한 칸 더 내려가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동행 1.’
“이건 뭐예요?”
내가 묻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같이 내려왔는지 나중에 보려고요. 기록은… 혼자는 좀 쓸쓸하니까.”
할아버지가 곁눈질로 공책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젊은 사람 둘이 같이 오면 덜 심심하지.”
말은 가볍게 던졌지만, 말의 끝에 작은 물음표가 매달려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종이에 적힌 ‘동행 1’이라는 글자가 괜히 크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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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와 생수가 한 상자씩 카트에 실렸다.
지훈이 손잡이를 잡고 밀었다. 나는 옆에서 박스가 흔들리지 않게 가볍게 받쳐 들었다.
“이 정도는 제가—”
내가 말하자, 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반씩 들면, 반 발자국만 더 힘들어져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제가 조금 더.”
“그럼 저는?”
“같이 가주시면 됩니다.”
말은 단순했지만, ‘같이’라는 단어에 이상하게 중심이 쏠렸다.
함께 들지 않아도, 같은 길을 걷기만 해도 된다는 감각.
그게 지금 내게 가장 위험한 친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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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 상점 일을 마치고 나니, 아직 오전 열한 시가 조금 넘었다.
마을 중앙쯤에 작고 오래된 카페가 하나 있었다. 간판에는 희미하게 ‘역전다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주변엔 역이 없었다. 오래전에 사라졌을 뿐이라고 관리인이 말한 적 있다.
“여기 커피가 의외로 괜찮습니다.”
지훈이 문을 밀며 말했다.
“도시에 비하면… 좀 느리지만요.”
안은 좁았다. 네 개의 테이블과 기계식 시계, 오래된 달력, 복권 광고, 그리고 창가에 말라가는 화분 하나.
낡은 시트지로 덮인 테이블 가장자리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벗겨진 자리마다 금색 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이곳도, 금빛 봉합 중이었다.
“뭘로 드실래요?”
지훈이 메뉴판을 들어 보였다.
선택지는 단순했다. 믹스커피, 더 진한 믹스커피, 그리고 유자차.
“그냥… 믹스요.”
나는 익숙한 항목을 골랐다.
도시에서 수없이 마셨던, 정확한 비율의 달고 쓴 커피.
지훈이 카운터에 주문을 하고 돌아와 맞은편에 앉았다.
창밖으로 마을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작게 보였다.
장바구니를 든 여인, 손을 잡고 뛰는 아이, 잔뜩 포장된 상자를 싣고 가는 오토바이.
현우의 도시와는 다른 종류의 바쁨이었다.
여기 사람들의 움직임은 빠르지 않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현우 씨는, 이런 데 싫어하시겠네요.”
지훈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어떤 데요?”
“속도가 애매한 곳. 정리도, 구조도 딱 떨어지지 않는 자리.”
그가 테이블 모서리의 금색 테이프를 손끝으로 한번 눌렀다.
“이 정도면 전문 인력 불러서 바꾸자고 하실 것 같아요.”
나는 웃었다. 동시에 약간의 동정 비슷한 감정이 목 안에서 올라왔다.
“맞아요. 정리부터 먼저 하자고 할 거예요. 메뉴판도 다시 만들고, 의자도 통일하고… 그러다 보면 이 집만의 엉성한 맛은 사라지겠죠.”
“그게 싫으세요?”
지훈이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현우가 정돈해 준 수많은 공간들이 떠올랐다. 우리 집의 책장, 주방, 냉장고, 심지어 내 노트북 폴더 구조까지.
“싫은 건 아니에요.”
솔직하게 말했다.
“그게 없었으면, 많은 게 무너졌을 거예요. 괜찮은 남편이에요. 친구들도 늘 부러워하고. 부모님도 좋아하시고.”
“그런데도…?”
그의 질문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믹스의 단맛이 혀를 덮었다.
“그런데도, 가끔은…”
나는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정돈되어야 할 대상’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사람이라기보다, 프로젝트 같은 거.”
그 말은 나도 처음으로 입 밖에 꺼내는 표현이었다.
지훈이 잠시 말이 없었다. 창밖에서 지나가던 트럭 소리가 빈자리를 메웠다.
“저는…”
그가 컵받침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수연 씨가 정리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네?”
“아직… 어느 쪽으로 기울지 모르는 사람은, 이상하게 살아 있거든요.”
그가 조용히 웃었다.
“그 흔들리는 방향을 옆에서 보는 건… 좀 이기적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게 좋습니다.”
심장이 아주 짧게 반응했다.
기침이 나올 것처럼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이기적이네요.”
내가 말했다.
“네. 알고 있어요.”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조심하고 있습니다. 반 발자국 정도만.”
그 시간에,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테이블 위에서 진동이 컵받침과 부딪히며 떨렸다.
화면에는 ‘현우’라는 이름과 함께 짧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
— 사진 좀 보내줘. 산속은 어때?
나는 무심코 화면을 지훈 쪽으로 돌려주었다.
그가 메시지를 한 번 훑어보고, 나를 보았다.
“찍어 드릴까요?”
그가 물었다.
“네.”
나는 커피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 쪽으로 서자, 마을 풍경과 함께 내 모습이 유리에 비췄다. 다소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
“그냥… 자연스럽게 계세요.”
지훈이 말했다.
자연스럽게,라는 말은 언제나 가장 어렵다.
나는 창밖을 보는 척하며 서 있었다. 커피 잔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은 난간에 얹었다.
찰칵.
소리가 작게 났다.
한 번 더. 각도를 조금 바꾸어.
“한 번 보실래요?”
그가 자리로 돌아와 휴대전화를 건넸다.
화면 속에는 내가 있었다.
도시에서의 사진보다 조금 흐릿했고, 화질도 좋지 않았지만, 표정만은 이상하게 선명했다.
“괜찮아요.”
내가 말했다.
“한 장 더요.”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이번에는… 얼굴만.”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 망설임 사이에, 커피 향이 다시 짙어졌다.
“…알겠어요.”
다시 창가 앞에 섰을 때, 이번에는 유리가 아니라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았다.
지훈의 손이 휴대전화를 쥐고 있었다.
렌즈 바로 옆, 그의 손가락 마디가 짧게 떨렸다가 멈췄다.
찰칵.
“이건…”
그가 화면을 내려다보면서 잠시 말을 잃었다.
“조금… 아깝네요.”
“왜요?”
“누가 받는지 모르니까요.”
그가 웃었다.
“사진도, 숨도, 마음도. 받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기록이 되는데.”
나는 전화기를 다시 받아, 사진을 골라 현우에게 전송했다.
메시지 창 위로 ‘전송 중…’이라는 글자가 떴다가 사라졌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 예쁘네. 공기 좋아 보인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짧은 문장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건강과 무리를 걱정하는 말.
나는 키패드를 열고, ‘응, 괜찮아.’라고 썼다가 지웠다.
대신 ‘응. 잘 지내고 있어.’라고 다시 적었다.
“현우 씨는…”
지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수연 씨가 어디에 있든, 잘 지내고 있다고 믿고 계시겠네요.”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내가 말했다.
“나쁘진 않죠.”
그가 대답했다.
“다만, 너무 잘 믿는 사람은…
가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작은 흔들림들을 못 볼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이 내 귀 안쪽에 박혔다.
나는 커피를 끝까지 비우지 못한 채 컵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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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나왔을 때, 하늘이 조금 더 흐려져 있었다.
햇빛은 여전히 있었지만, 구름이 그 사이를 가늘게 잘랐다.
“올라가기 전에 편의점에서 물 몇 병 더 사갈까요?”
지훈이 물었다.
“차에도 있는데요?”
“이건… 개인용입니다.”
그가 웃었다.
“내일 근육통 오실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작은 슈퍼에 들러 물과 간단한 간식을 샀다.
계산대 앞에는 복권 종이가 몇 장 펼쳐져 있었다.
당첨 번호가 적힌 칸들 사이로 작은 동그라미와 엑스가 엉성하게 찍혀 있었다.
‘맞은 줄 알았는데, 한 칸씩 빗나간 흔적.’
그 종이들이, 오늘 내 마음의 좌표와 이상하게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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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다시 올라갈 때는 차를 잡지 않았다.
관리인이 “가끔은 걸어서 숨을 올려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지훈도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중간까지는 차를 가져다 두었어요.”
그가 말했다.
“거기까지는, 조금만 수고하시죠.”
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낙엽이 쌓인 곳에서는 발이 미끄러졌고, 돌이 드러난 곳에서는 발바닥이 아렸다.
“천천히 가셔도 됩니다.”
지훈이 몇 걸음 앞에서 말했다.
“오늘은 서두를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내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괜히 더 헉헉거리게 돼요.”
그가 웃었다.
“그럼, 서두를 이유를 하나 만들어 드릴까요?”
“예를 들면요?”
“정상 도착하면, 내일 작업 줄어든다든가.”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늘 많이 걸으셨다고.”
“그럼 전 무조건 전력 질주죠.”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잠깐 동안, 현우도, 온실도, 금빛 봉합선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숨과 다리, 흙길과 바람만이 있었다.
그러다 한 번 크게 헛디디는 순간이 왔다.
바위 아래 깔린 이끼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발이 반쯤 미끄러졌다.
“조심—”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훈의 손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어깨도, 허리도 아니라, 손과 손이었다.
손목 아래, 맥이 뛰는 자리.
그곳을 감싼 그의 손이, 잠깐 너무 단단했다.
“괜찮아요?”
그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숨이 얕게 닿았다.
“네…”
나는 대답하면서도, 손을 바로 빼지 못했다.
손목을 감싼 그의 손이 조금 늦게 힘을 푸는 사이, 맥박이 손바닥과 손바닥 사이를 건너갔다.
이전의 어깨와 허리에서 느꼈던 온도와는 다른 종류의, 훨씬 직접적인 떨림이었다.
“반 발자국, 또 위험해질 뻔했습니다.”
그가 손을 떼며 말했다.
“오늘은 자꾸 미끄러지네요, 제가.”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괜찮습니다.”
그가 웃었다.
“미끄러지는 사람이 있어야, 잡는 사람의 손도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그 말이 농담인지, 고백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앞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손목에는 아직도 그의 손 모양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
중간 지점에 세워 둔 차가 보였을 때, 숨이 조금 안정됐다.
지훈이 트렁크를 열어 생수 병 하나를 건넸다.
“마시세요.”
병 입구가 내 입술에 닿자, 찬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도시에서 늘 마시던 물과 같은 물인데, 맛이 달랐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지나온 물처럼 느껴졌다.
“버티실 만하세요?”
그가 물었다.
“네. 조금… 살아 있는 느낌.”
또 그 말이었다.
입 밖으로 나온 뒤에야 깨달았다.
“요즘 자주 하시네요, 그 말.”
지훈이 물병을 자기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좋아 보여요. 살아 있다는 느낌을 찾는 사람은,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람이라서.”
“끝나지 않은 사람?”
“네.
이미 다 정리된 사람보다, 아직 정리 중인 사람이 저는 더…”
그는 말을 멈췄다.
“…보고 싶어집니다.”
내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산바람이 식혀주지 못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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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 마당에 차가 들어섰을 때, 해는 이미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다.
집의 창문들이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온실의 유리도 멀리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문을 열자, 고양이가 가장 먼저 우리를 맞았다.
도어 매트 위를 한 바퀴 돌더니, 우리의 발 냄새를 차례로 맡았다.
“오후 4:38. 귀가.”
관리인이 현관 쪽에서 장부를 들고 서 있었다.
“자재, 식료품, 동행 1, 전원 무사.”
“그걸 또 적으세요?”
내가 웃으며 묻자, 관리인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어떤 공기를 들여왔는지 기록해야죠. 집은 혼자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들어오는 숨에 따라 조금씩 변하거든요.”
그는 오늘의 여백에 한 줄 더 적었다.
“‘산 아래에서 금빛 흔적 포착. 봉합 예정.’”
“봉합이요?”
내가 되묻자, 관리인은 장부를 덮으며 웃었다.
“어디에 붙일지는 내일 생각해 봅시다. 오늘은 그냥, 그렇게 있었단 것만 알아두면 돼요.”
고양이가 내 다리를 한 번 스치고 지나갔다.
꼬리가 가볍게 발목을 툭 건드렸다.
사소한 접촉인데, 오늘 하루의 모든 손길들이 그 자리에 모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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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들어와 코트를 벗고 나니, 휴대전화가 다시 짧게 떨렸다.
현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 사진 잘 봤어. 얼굴이 좀 밝아진 것 같네. 거기 공기, 역시 좋구나.
그는 늘 빠르게 반응했다.
내 얼굴 색의 변화도 사진 한 장으로 읽어내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 밝아짐이 무엇 때문인지는 묻지 않았다.
공기와, 휴식과, 자연 덕이라고 믿어주었다.
나는 잠시 키패드를 바라보았다.
‘응, 공기가 좋아서 그런가 봐.’라고 쓸까 했다.
그러나 손가락은 다른 문장을 찍고 있었다.
— 응. 숨이 좀 다르게 느껴져.
보내고 나서야, 그 말이 얼마나 애매한지 깨달았다.
그 애매함을 다시 회수하고 싶었지만, 메시지는 이미 보내졌다.
‘다르게’라는 단어는 설명을 요구하는데, 그는 아마 묻지 않을 것이다.
그게 고맙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
저녁 준비를 하러 부엌에 내려가니, 지훈이 먼저 와 있었다.
생수 박스를 개봉해 냉장고 근처에 정리하고 있었다.
“도와드릴까요?”
내가 묻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건 거의 다 했고요.”
그가 박스를 한쪽으로 치우며 말했다.
“대신…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뭔데요?”
“오늘…”
그가 잠깐 말을 고르고 나를 바라봤다.
“마을에서 찍은 사진, 누구한테 가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제가 셔터를 눌러도 괜찮으셨어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대답을 찾기 위해 잠시 남은 빵 봉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냥…”
나는 천천히 말했다.
“어차피, 나인 건 똑같으니까요.”
“그렇죠.”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찍는 사람에 따라 조금 달라지기도 하거든요. 프레이밍이든, 거리든, 숨쉬는 타이밍이든.”
그는 싱크대에 손을 짚었다.
“오늘 그걸, 조금 실감했습니다.”
“실감이요?”
“네.”
그가 웃었다.
“조금… 반칙 같기도 했어요. 남의 자리에 들어가 보는 것 같아서.”
그 말이 이상하게 정직해서,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개수대 위에 있던 컵을 꺼내었다.
“오늘 저녁은 제가 준비할게요.”
내가 말했다.
“그게… 조금은, 반칙 상쇄가 되지 않을까요?”
지훈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면, 기꺼이.”
그의 웃음 아래 어딘가에, 오늘 하루 동안 쌓인 작은 빚과 공모가 같이스며들어 있었다.
⸻
밤이 내려앉은 뒤, 방으로 돌아와 베개 아래 엽서를 꺼냈다.
어제 적어둔 ‘방향’과, 그 옆의 ‘숨’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아래에 새로운 단어를 한 줄 더 적었다.
‘외출.’
그리고 아주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동행 1.’
펜 끝이 종이를 누르는 감각이 어쩐지 익숙했다. 마치 낮에 마을 장부에 적힌 글씨가 여기까지 따라와 눌리는 것 같았다.
“반 발자국.”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 그 반 발자국이 온실 밖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산 아래 마을의 금빛 테이프, 카페의 낡은 테이블, 셔터 소리, 손목을 감싸던 손.
선은 유리에서 잠시 벗어나, 길과 마을과 사람 사이에서 방향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 위를, 내 마음이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불을 끄자 창밖의 어둠이 천천히 밀려왔다.
온실의 금빛 봉합선은 오늘 밤도 어디선가 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눈꺼풀 안쪽에 떠오른 빛은, 유리 대신 카페 창과 버스정류장 지붕 위에서 반짝이던 금빛이었다.
나는 엽서를 베개 아래에 다시 밀어 넣었다.
오늘의 맞춤법은, ‘괜찮다’와 ‘안 괜찮다’ 사이에 적힌 ‘같이’라는 단어였다.
같이 내려갔다가, 같이 올라온 하루.
같이 웃고, 같이 미끄러졌던 하루.
나는 그 단어 위에 천천히 이마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숫자 대신 발자국이 세어지는 꿈이, 그 뒤를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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