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속도
“폭우는 멈췄지만, 마음의 물길은 더 깊이 흐르기 시작했다.
막힌 곳이 터진 건 배수로였을까, 아니면 나였을까.”
새벽은 어제와 다른 소리로 시작되었다.
새가 우는 대신, 무언가가 유리를 강하게 두드리는 소리.
눈을 뜨기도 전에, 방 안 공기가 한 번에 눅눅해졌다.
창밖에서, 바람이 길게 울었다.
잠결에 베개 밑으로 손을 넣자, 엽서의 모서리가 손끝을 찔렀다.
‘외출, 동행 1.’
어제 밤, 분명히 내가 적어 넣은 글자들.
유리를 스치는 빗방울이 점점 거칠어졌다.
유리 위의 금빛 봉합선이 번개처럼 번쩍였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이불을 걷어찼다.
오늘의 예보는 아마, 관리인이 아니라 하늘이 먼저 작성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부엌으로 내려가자, 창밖은 이미 회색 물감으로 덮인 풍경이었다.
산자락과 나무와 길의 윤곽이 모두 번져 있었다.
관리인은 창문을 반쯤 열어둔 채, 실내와 실외의 공기를 번갈아 맡고 있었다.
“오전 6:41.”
그가 장부를 펼치며 말했다.
“오늘의 예보: ‘집중호우 + 변덕.’”
“변덕이요?”
내가 묻자, 관리인은 장부 위에 펜을 탁탁 두드렸다.
“하늘이 이 정도면, 사람도 덩달아 흔들립니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비 많이 오는 날엔,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게 좋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둥이 늦게 따라왔다.
저택 전체가 아주 살짝 떨리는 느낌이었다.
“전기 나갈 가능성도 있겠네요.”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훈이었다.
그는 평소보다 더 짙은 회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 끝이 약간 젖어 있었다. 아마 벌써 밖에 나갔다 온 모양이었다.
“배수로는 괜찮아요?”
내가 묻자, 그는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었다.
“위쪽은 괜찮은데… 아래쪽이 좀 막혀 있더라고요.”
그가 관리인을 힐끗 보았다.
“누가 잊고 나뭇잎을 쓸지 않았을까요?”
“예보 담당은 기록까지입니다.”
관리인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노동은 젊은 분들이.”
지훈이 나를 향해 웃었다.
“오늘, 산을 타는 대신 배수로를 타는 하루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창밖의 비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굵어지는 빗줄기 사이로, 마당의 물웅덩이가 순식간에 커지고 있었다.
“저도… 나가야겠죠?”
내가 말했다.
“어제 산길에서 미끄러진 죄도 있고.”
“미끄러지신 분을 또 비에 내보내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지훈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안 내보내면 더 위험할지도요.”
관리인이 장부에 빠르게 무언가를 적었다.
“‘오전 7:02, 배수로 점검 출동. 잠재적 균열 확대.’”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비 오는 날의 웃음은, 어딘가 더 검은 색이 섞인 것 같았다.
⸻
레인코트를 걸치려고 옷장을 열다가, 나는 잠시 멈췄다.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전화 진동이 짧게 울렸다.
— 비 많이 온다는데, 산이라 더 심하겠다. 밖에 오래 있지 마.
— 일 많으면, 그냥 미루라고 해.
현우였다.
아침 일찍부터 온 메시지.
화면 위에 뜬 시각은 6:32.
나는, 방금 전에야 비 소리에 눈을 떴다.
그는 나보다 먼저 이 산의 날씨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냥 미루라고 해.’
그의 말투가 눈앞에 선했다.
현실적이고, 계획적인,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지켜온 남자.
나는 잠깐 엄지손가락을 멈추게 두었다가, 짧게 답장을 보냈다.
— 걱정 고마워. 조심할게.
‘나가지는 않겠다’고는 쓰지 않았다.
그 차이를, 나는 알고 있었다.
코트를 걸치고 복도로 나오자, 지훈이 이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우비에 후드를 눌러쓴 모습이, 이 집의 다른 그림자를 하나 더 만든 것 같았다.
“준비되셨어요?”
그가 물었다.
“네.”
나는 현관문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오늘은 안 미끄러질게요.”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요.”
그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도 최대한 잘 잡아보겠습니다.”
그 말은, 비에 젖은 공기 속에서 이상하게 긴 여운을 남겼다.
⸻
문을 열자, 비가 한꺼번에 들이쳤다.
우비 모자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쏟아졌다.
마당의 흙은 이미 진흙으로 변해 있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신발이 묵직하게 빠져나왔다.
비가 유리창을 때릴 때와는 또 다른 소리, 더 가까운 소리가 땅에서 올라왔다.
“배수로는 집 뒤쪽이에요.”
지훈이 앞장섰다.
“온실 쪽 말고, 산길로 이어지는 옆길.”
우리는 집의 모서리를 돌아 나갔다.
어제 산 아래로 내려갈 때 지났던 길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더 좁고, 더 가팔랐다.
빗줄기가 수직이 아니라, 사선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바람이 방향을 계속 바꾸고 있었다.
한 번 크게 미끄러지는 순간이 또 왔다.
이번엔 내가 아니라, 지훈 쪽에서.
“어—”
그가 균형을 잃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제와 반대로, 이번엔 내가 잡는 쪽이었다.
우비 천 너머로 느껴지는 팔의 힘줄과 근육.
생각보다 더 단단한 감각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괜찮아요?”
내가 물었다.
“네…”
그가 무안한 듯 웃었다.
“오늘은 제가 먼저 미끄러질 줄은 몰랐네요.”
“균형 맞춘 거예요.”
나는 손을 늦게 뗐다.
“어제 제가 한 번, 오늘은 지훈 씨 한 번.”
“그럼 내일은—”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위쪽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쿵, 쿵, 쾅.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한 소리.
“위쪽 배수로가 터진 것 같아요.”
지훈이 얼굴을 들어올렸다.
“빨리 가봐야겠어요.”
그는 내가 잡고 있던 팔을 빼내며 손을 내밀었다.
“잡으세요. 여긴 진짜 미끄럽습니다.”
이번엔 손목이 아니라, 손과 손이었다.
우비에 가린 두 손이 맞닿는 지점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우리는 그렇게 손을 잡고, 비 속을 가르며 위쪽으로 뛰었다.
⸻
배수로가 있는 곳은 집 뒤쪽 낮은 언덕을 한 번 더 올라가야 했다.
작은 계단 같은 돌이 박혀 있었지만, 물이 그 위를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심하세요.”
지훈이 먼저 올라섰다.
낮은 계단마다 발을 올려두고,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을 내밀 때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한 계단, 한 계단, 손과 손이 이어지고 끊어지는 리듬.
빗줄기가 그 사이를 계속 갈라놓았다.
배수로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나뭇가지와 낙엽이 한꺼번에 쌓여, 물길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물이 넘쳐 흘러 작은 폭포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산길로 흘러 넘치면… 길이 쓸려나갈지도 모르겠네요.”
지훈이 빠르게 상황을 훑어보고 말했다.
“조금만 도와주실 수 있어요?”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요, 빠지지만 않게 해주세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쭈그려 앉아, 손으로 막힌 부분을 하나씩 걷어냈다.
젖은 나뭇잎과 흙, 돌조각들이 찬물과 함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물살이 손등을 세게 때렸다.
한 번은 손목까지 거의 휩쓸려 갈 뻔했다.
그때마다 지훈의 손이 허공을 더듬어 내 손목을 잡았다.
“이젠 제가 더 위험한 사람 같은데요.”
내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저한텐…”
그가 손을 놓지 않은 채 대답했다.
“위험한 사람인 게, 나쁠 것 같진 않습니다.”
비 소리가 순간 더 크게 들렸다.
천둥이 위에서 무너지는 듯 울렸다.
⸻
배수로의 막힌 부분이 꽤 많이 치워졌을 때, 물길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물살이 한 방향으로 곧게 흘러내렸다.
넘쳐흐르던 부분이 줄어들자, 발밑의 미끄러움도 덜해졌다.
“이 정도면 집까지는 안 내려갈 거예요.”
지훈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고생하셨어요.”
“생각보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집이랑 꽤 몸으로 부딪히고 사는 사람이네요, 지훈 씨.”
“비 올 때도, 눈 올 때도, 바람 불 때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선 사람이랑 집이 같이 버텨야 하니까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리서 번개가 번쩍였다.
순간, 산 전체의 윤곽이 하얗게 드러났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저택 쪽에서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당 쪽에서, 불빛이 한 번에 꺼졌다.
“정전이다.”
내 입에서 먼저 말이 나왔다.
지훈도 동시에 집 쪽을 바라봤다.
“아마 지하실 쪽 전기함이 문제일 거예요.”
그가 말했다.
“내려가 봐야겠네요.”
“지하실이요?”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폭우, 정전, 산속 저택의 지하실.
이 조합은, 도시의 아파트 엘리베이터 정전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혹시 무서우시면—”
“같이 가요.”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
“혼자 내려가는 게 더 무서울 것 같아요.”
지훈이 잠시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반 발자국이 아니라, 두 사람의 발자국이 필요할지도.”
⸻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집 안에서도 가장 오래된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콘크리트와 금속, 오래된 목재가 섞인 냄새.
벽을 타고 내려가는 빗물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휴대전화 손전등으로 계단을 비추자, 벽면 여기저기에 작은 균열들이 보였다.
그 중 몇 군데는 금빛 테이프로 덧붙여져 있었다.
“여기까지도…”
내가 속삭이듯 말했다.
“금빛이 내려와 있네요.”
“처음 왔을 땐 무서웠어요.”
지훈이 앞에서 내려가며 말했다.
“이렇게 깊은 곳에 붙어 있는 금색은, 봉합이라기보다 봉인이 아닐까 싶어서.”
“봉인할 만큼, 뭘 숨기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질문에, 지훈이 잠시 웃었다.
빛이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글쎄요.
누군가의 말하지 못한 진심 같은 거?”
나는 대답 대신 손전등 빛을 바닥으로 옮겼다.
발끝 앞에 놓인 계단의 마지막 단이 드러났다.
지하실 문을 열자, 한기가 한 번에 밀려나왔다.
전기함이 있는 벽 쪽만 희미한 비상등이 켜져 있었다.
위에서 내려오는 빗소리가 천장을 두드리는 소리와 섞였다.
“잠깐만요.”
지훈이 전기함 앞에 섰다.
“어디가 내려갔나…”
그가 스위치를 몇 번 올리고 내리는 동안, 나는 문쪽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하실 한쪽에는 낡은 가구와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그 중 하나, 낡은 서랍장 위에 작은 액자가 기대어 있었다.
유리 위로 먼지가 얇게 쌓여 있었고, 그 위를 누군가 손가락으로 한 번 쓸어낸 듯한 자국이 있었다.
빛을 가까이 가져가자, 안에 든 사진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 집이 아직 덜 낡았을 때의 모습.
창틀이 새것이고, 정원에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옆에 서 있는 두 사람.
“그 사진…”
지훈이 내 시선을 따라왔다.
“관리인님이 말하던, ‘처음 이 집을 샀던 사람들’일 거예요.”
“부부였다고 했죠.”
내가 중얼거렸다.
“네.”
지훈이 전기함을 잠시 놔두고 다가왔다.
“둘이 같이 올라왔다가, 결국 한 사람만 내려갔다고.”
“어디로요?”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대답했다.
“도시로요.
여길 떠난 사람은 도시로 내려갔고, 남은 사람은 산으로 더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사진 속 두 사람의 얼굴은 흐릿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거리만은 또렷했다.
어깨와 어깨 사이, 손끝과 손끝 사이에 미세한 틈이 있었다.
마치,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거리처럼.
“수연 씨라면…”
지훈이 낮게 물었다.
“어디로 갔을까요?”
질문은 단순했지만, 답은 단순하지 않았다.
나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그땐… 도시로 내려갔다고 했을 거예요.”
내가 말했다.
“그게 맞다고 믿었으니까.”
“그럼 지금은요?”
지훈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생각보다 가까웠다.
내 어깨와 그의 어깨가 거의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나는 시선을 사진에서 떼어, 유리 위에 비친 우리 둘의 실루엣을 보았다.
어두운 지하실, 금빛 테이프, 비상등, 그리고 우리.
“지금은…”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디쯤에 서 있는지부터 잘 모르겠어요.”
지훈이 숨을 아주 조금 들이켰다.
그 숨이 내 귀 근처까지 와서 멈췄다.
“그럼…”
그가 말했다.
“잠깐이라도, 여기 같이 서 있죠.”
그 말은, 마치 전기 스위치가 다시 올라가는 순간처럼 뚜렷하게 들렸다.
바로 그때,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비상등이 한 번 깜빡이더니, 위층에서 불이 켜지는 느낌이 내려왔다.
집 전체에 전기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지훈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됐다.”
그가 작게 웃었다.
“생각보다 빨리 해결됐네요.”
나는 대답 대신, 방금까지 우리가 서 있던 거리를 기억했다.
사진 속 부부의 빈틈과, 우리 사이의 빈틈이 겹쳐졌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는, 잘 알 수 없었다.
⸻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계단은, 내려갈 때보다 훨씬 짧게 느껴졌다.
문을 열자, 관리인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기, 돌아왔죠?”
그가 물었다.
“네. 스위치 몇 개만 정리했어요.”
지훈이 대답했다.
관리인은 우리 둘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젖은 우비, 손목에 남은 물자국, 그리고 아마도 표정까지.
“오전 8:19.”
그가 장부를 펼쳤다.
“‘폭우 속 배수로 정비, 지하실 동행 1. 예상보다 빨리 복구.’”
“항상 이렇게 적으세요?”
내가 웃으며 묻자, 관리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언젠가 누가 이 장부를 읽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가 말했다.
“그때, 어떤 날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정도는 알려줘야죠.”
그 말은 아주 평범하게 들렸지만, 내게는 경고처럼 들렸다.
‘언젠가, 누가, 읽게 될지도 모르는 기록.’
나는 무심코, 베개 밑 엽서를 떠올렸다.
⸻
옷을 갈아입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휴대전화 화면에 새 알림이 떠 있었다.
현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 정전 뉴스 떴더라. 너희 쪽 맞는지 확인하려고.
— 통화 가능해?
나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지하실의 한기와 비의 냄새가 아직 몸에서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통화 가능해?’
간단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 끝에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어떤 얼굴로 말하게 될지가 달려 있었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고, 영상통화 아이콘 쪽으로 엄지손가락을 살짝 옮겼다가, 다시 돌아왔다.
지금 이 얼굴을 보여주는 게 옳은지, 아닌지.
그러다, 문이 가볍게 두드려졌다.
“수연 씨.”
지훈의 목소리였다.
“커피… 한 잔 드실래요? 비도 좀 잦아드는 것 같아서.”
나는 휴대전화 화면을 한 번 더 내려다보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 조금만 이따가 전화해도 돼?
— 지금은 손이 좀 바빠.
짧은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이라는 단어가, 시간의 길이를 마음대로 늘렸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가슴이 세게 박동하는 게 느껴졌다.
이게 바로, 아주 작은 단위의 감정적 배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피했다는 것만으로.
문을 열자, 지훈이 복도에 서 있었다.
이미 손에는 머그컵 두 개를 들고 있었다.
“먼저 내려갈까 하다가…”
그가 웃었다.
“오늘 같은 날엔, 사람이 먼저 내려가 있는 것보다 같이 움직이는 게 더 낫겠다 싶어서요.”
“좋은 예보네요.”
내가 말했다.
“오늘 예보는…”
그가 컵을 하나 내게 건네며 말했다.
“‘비 일시 약해짐 + 실내 동행 1.’ 정도로 할까요?”
우리는 웃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머그컵의 따뜻함이 손바닥을 데웠다.
그 온도가 조금만 더 올라가면, 분명히 위험해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
창가에 앉아 비가 잦아드는 풍경을 바라보며,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어제 마을의 역전다방에서 마셨던 믹스커피와는 다른 향이었다.
여긴, 누군가가 직접 갈아 내려준 원두였다.
조금 더 쓴맛이 강했고, 끝이 깔끔했다.
“현우 씨는…”
지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비 오는 날, 이런 집 좋아하실까요?”
“글쎄요.”
나는 컵을 한 번 돌렸다.
“그 사람은, 비를 피하는 구조를 먼저 계산하는 타입이에요.
물이 어디로 새는지, 어디부터 보수해야 하는지.”
“그게 나쁜 건 아니죠.”
지훈이 말했다.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덕분에, 우리가 사는 집은 늘 안전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덧붙였다.
“다만… 그 사람은, 비를 맞는 사람의 마음은 잘 계산하지 못해요.”
말이 나가고 나서야, 이 말이 꽤 잔인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지훈은 잠시 조용히 컵을 내려놓았다.
“그런 마음까지 계산하는 사람은…”
그가 천천히 말했다.
“대체로, 자기 방어가 약해집니다.”
“왜요?”
“남의 흠뻑 젖은 마음을 오래 보고 있으면, 자기 옷도 같이 젖거든요.”
그가 웃었다.
“도시 사람들한테는 비효율적인 타입이죠.”
“지훈 씨는 어떤 타입이에요?”
나도 모르게 물었다.
그는 답하기 전에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잔비가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유리 위의 금빛 봉합선이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살아났다.
“예전엔…”
그가 말했다.
“비가 오면 그냥 우산만 썼어요.
내가 안 젖으면 됐으니까요.”
“지금은요?”
“지금은…”
그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어느 정도까지 같이 젖어도 괜찮을지, 계산을 좀 해보는 중입니다.”
그 말이 너무 조용해서, 더 크게 들렸다.
커피 잔 가장자리에 내 손가락이 멈췄다.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비는 확실히 잦아지고 있었다.
대신, 집 안의 공기가 묵직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
관리인은 오후 예보를 적기 위해 다시 부엌으로 들어왔다.
장부를 들고,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오후 1:05.”
그가 중얼거렸다.
“‘폭우 소강 상태, 실내 체류자 2, 대화량 증가.’”
“대화량까지 기록해요?”
내가 웃으며 묻자, 관리인이 장부를 탁 닫았다.
“말이 많아질수록, 말하지 못한 것들도 같이 늘어나거든요.”
그가 말했다.
“그건… 다음 페이지에 적혀요.”
나는 그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내 안에도 아직 적지 않은 여백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
그날 오후, 나는 현우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몇 번이나 통화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맴돌았지만, 결국 메시지 창만 열었다.
— 아까는 비 때문에 정신이 좀 없었어.
— 지금은 괜찮아. 전기도 돌아왔고.
그는 금방 답장을 보냈다.
— 알았어. 몸만 조심해.
— 거기서 뭐 하든, 난 네가 쉬는 중이라고 생각할게.
‘네가 쉬는 중이라고 생각할게.’
그 말은 다정했지만, 동시에 어딘가 멀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 쉬는 중이 아니라는 걸,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말이 너무 쉽게 믿음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뒤집어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 옆에, 엽서를 꺼내어 펜을 들었다.
‘외출, 동행 1’ 아래에 새로운 단어를 적었다.
‘배수로, 지하실, 정전.’
잠시 망설이다가, 그 아래 아주 작게 한 줄을 더 적어 넣었다.
‘통화 버튼, 보류.’
글자를 다 적고 나서,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엽서를 다시 베개 밑에 넣으려다가, 이번엔 책상 서랍 안에 넣어 두었다.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문득, 지하실 사진 앞에서 들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수연 씨라면, 어디로 갔을까요?’
나는 아직도,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하나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 내 발자국은 분명히 어제와 다른 속도로 움직였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위험하게.
그리고 그 속도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나란히 맞춰지고 있다는 것도.
⸻
밤이 다시 찾아왔을 때, 비는 거의 그쳐 있었다.
창밖에는 빗물이 남긴 얇은 빛들만 반짝이고 있었다.
유리 위의 금빛 봉합선은 마치 새로 칠한 것처럼 선명해 보였다.
나는 불을 끄기 전에, 휴대전화 화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현우의 이름 옆에는 아직 작은 초록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아마, 도시 어딘가에서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중일 것이다.
차 안에서, 혹은 책상 앞에서.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나는 화면을 껐다.
대신, 아주 짧은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 오늘 비, 여기선 좀 다르게 들렸어.
그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굳이 되묻지 않기로 한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 침묵 위에 이불을 덮었다.
눈을 감자, 낮에 배수로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막힌 곳이 뚫릴 때 내던 소리, 방향을 찾은 물길의 속도.
어쩌면, 내 안에서 막혀 있던 무언가도 오늘 조금은 흘러내렸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흘러갔는지, 누구를 향해 흘러가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비는 그쳤지만, 균열은 계속 자라고 있었다.
산 위 집의 벽에서, 유리에서, 그리고 내 마음 안에서.
나는 그 균열 위로 얇게 금빛을 칠하는 꿈을 꾸었다.
그 위를 누군가의 손이 아주 천천히 쓰다듬고 지나가는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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