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의 서곡 17

문틈으로 스며드는 것들

by 은서의 숨겨진 책


“폭우가 지나간 산속 저택, 말보다 조용한 침묵 속에서—

수연의 마음은 처음으로 ‘돌아갈 곳’과 ‘기울어지는 곳’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밤새 비가 내린 집은, 다음 날 아침까지 젖어 있었다.

창문 유리에 남은 빗물 자국은 말라붙지 못한 채, 은색의 흔적을 남기며 유리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공기에는 아직 비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 방 안 가득한 습기를 느끼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몸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어제 하루 동안 쏟아진 일들—폭우, 배수로, 지하실, 정전, 그리고 지훈과의 거리—그 모든 것이 내 몸에 붙어 마르지 않은 빗물처럼 남아 있었다.

휴대전화 화면을 켜니, 현우의 메시지가 한 줄 더 와 있었다.


— 아침은 먹었어?


간단하고, 익숙하고, 안정적인 문장.

나는 그 문장을 보느라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대답은 아직 쓰지 않았다.


손가락은 화면을 가볍게 스친 채, 잠시 더 내려가지 않았다.


아침은 먹었어?

그는 늘 이렇게 물었다.

정확하고, 과하지 않고, 생활을 묻는 문장들.

그가 나를 지키는 방식은 대부분 이런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제는—

어떤 날엔, 이 다정함조차 벽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부엌에 내려가니 커피 냄새가 먼저 나를 감싸 안았다.

어제보다 조금 더 진한 향이었다.

재료의 무게나 온도보다, 사람의 기분이 먼저 녹아 있는 향.


지훈이 이미 부엌에 있었다.

어제와 비슷한 감색 옷이었지만, 오늘은 더 말라 있었다.

그는 커피포트를 옮기며 나를 보자 조용히 웃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수연 씨.”


그 웃음은, 말보다 먼저 내 마음을 흔드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어제 잘 잤어요?”

그가 물었다.


“글쎄요…”

나는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꿈인지 기억인지 모를 것들이 조금 있어서.”


“좋은 거면 좋고, 나쁜 거면… 커피가 좀 덮어주겠죠.”

그는 컵 두 개를 내밀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그 커피를 받았다.

따뜻한 잔이 손바닥에 닿을 때, 어제 지하실에서 느꼈던 감각이 순간 다시 떠올랐다.

그 가까움, 숨결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비상등 아래에서 흔들리던 눈빛.

어쩌면 너무 가까웠던—그러나 지나치게 정확했던 거리.


여전히 말하지 않은 것들이 남아 있는 거리.


“관리인은요?”

내가 물었다.


“방금 산길 점검하러 나갔어요.”

지훈이 대답했다.

“오늘은 쌓인 낙엽이 많다고… 아침부터 정신없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도 가봐야겠네요.”


“우리요?”

그는 내 말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동행 1’인가요?”


나는 잠시 입술을 눌렀다.


“어제처럼 비가 오진 않겠지만… 산길이 안전한지 확인은 해야죠.”


“좋아요.”

그가 커피잔을 들고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전 어제처럼 또 미끄러질 자신 있어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스스로 놀랐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조용하게 깨달았다.


— 나는 이미, 지훈에게 자연스러운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 어제보다 더 쉽게.

— 너무 쉽게.



집 밖으로 나서니,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하지만 땅은 아직 축축했고, 나뭇잎은 비의 흔적으로 반들거리고 있었다.

하늘은 흐렸지만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만 구름이 떠 있었다.


“그쪽 먼저 갈까요? 어제 막힌 곳.”

지훈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함께 걷는 길은 이상하게도 덜 적막했다.

산속이 이렇게 고요한데, 그의 발자국 소리가 바람보다 더 크게 들렸다.

혹은, 내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일지도.


그는 가끔씩 내 쪽을 쳐다봤다.

말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은 것들이 계속 쌓이는 느낌이었다.

그가 어제 지하실에서 던졌던 질문—

“수연 씨라면 어디로 갔을까요?”

그 말의 잔향이, 아직 남아 있었다.


“오늘은… 조금 더 걸어볼래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죠.”

그는 바로 대답했다.

“어디든.”


그 말의 끝에는, 내가 선택하는 방향이라면 어디든 가겠다는 뜻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나를 흔들었다.



배수로 근처는 이미 말라 있었다.

어제 막아섰던 낙엽들은 밤새 물결에 떠밀려 내려갔는지 흔적이 거의 없었다.

“생각보다 금방 정리되네요.”

내가 말했다.


“밤새 물길이 고쳤겠죠.”

지훈이 땅을 살피며 대답했다.

“사람보다, 산이 먼저 고치는 경우가 많아요.”


그는 손에 장갑을 낀 채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떨어진 가지들을 모으고 있었다.


조용했지만 편안한 조용함이었다.

말이 많지 않아도,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 조용함이 오래 지속되던 어느 순간—

지훈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수연 씨.”


“네?”


그는 내 쪽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아마 일부러 그랬을 것이다.

“어제 지하실에서… 제가 조금 경솔하게 말했죠.”


나는 동작을 멈췄다.


“…어떤 말이요?”


그는 눈길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같이 서 있자’고 했던 거요.”


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그 말이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경솔하진 않았어요.”

내가 조용히 말했다.


“솔직하긴 했어요.”

그가 작게 웃었다.

“하지만 솔직한 게 항상 좋은 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아요.”


그 말은 내 의지보다 먼저 입에서 나왔다.

지훈이 고개를 들었고, 그의 눈에 잠깐 놀라움 같은 것이 스쳤다.

잠시 후 그는 아주 조용하게 말했다.


“…수연 씨는 가끔 위험해요.”


“제가요?”


“네.”

그는 가까워지지도 않으면서, 멀어지지도 않는 그 애매한 거리를 유지했다.

“제가 어디까지 흔들려도 되는지 계산이 안 서게 만들어요.”


그 말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에 닿았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는데,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읽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가슴을 조였다.


“어제… 현우 씨한테 전화 못 했죠?”

지훈이 낮게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손끝까지 긴장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어떻게 알았어요?”


“표정이 말하던데요.”


그는 나를 보지 않은 채, 손등에 묻은 흙을 털었다.

“정확히 말하면… 못 한 건지, 안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규칙적으로 빨라지는 소리만이 내 몸 안에서 계속 울렸다.


“그거…”

지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주 작은 거지만, 진짜 중요한 균열이에요.”


그 말은 충격도 아니고, 위협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정직한 관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훈 씨.”


그가 나를 바라봤다.


“제가… 어제 왜 전화를 못 했을까요?”


지훈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말했다.


“그 순간… 당신이 더 보고 있던 사람이 나였던 거죠.”


순간, 주변의 바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았다.

손끝이 떨렸다.

땅이 움직인 것도 아닌데, 균형이 살짝 기울어진 느낌.


“…그건—”


“죄책감 느끼지 마요.”

그가 말을 잘랐다.

“이런 건… 느끼려고 해서 느끼는 게 아니니까.”


지훈은 한 걸음 내 쪽으로 가까이 왔다.

하지만 아주 작은 거리였고, 아직 스침은 없었다.


“그리고…”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 죄책감조차, 나한테는— 솔직히 말하면— 더 흔들리는 이유가 돼요.”


나는 숨을 들이쉬는 것도 잊은 채, 그를 바라봤다.

그는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 눈빛이 너무 정직해서, 도망치는 것이 더 부자연스러워질 것 같았다.


그가 말을 멈추자, 바람이 다시 산을 스쳤다.

가까워지려는 순간을 마치 자연이 대신 숨겨주는 것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훨씬 느렸다.

둘 다 말이 적어졌지만, 그 침묵은 어색한 침묵이 아니었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말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생긴 침묵이었다.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관리인이 마당에서 흙을 털고 있었다.


“둘 다 다녀오셨어요?”

그가 고개를 들었다.


“네. 산길은 안전해요.”

지훈이 대답했다.


관리인은 장부를 열고 두 줄을 적었다.

“오전 10:42. ‘산길 점검, 동행 1. 대화 적음. 빈틈 많음.’”


“빈틈이요?”

내가 묻자, 그는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적게 한다는 건… 그만큼 생각이 많다는 뜻이죠.”

그는 펜을 돌리며 말했다.

“생각이 많아지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관리인의 말이 어쩐지 지나치게 정확했다.

그가 우리 둘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점심을 먹고 방으로 올라왔을 때,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현우였다.


— 통화 가능할까?


나는 침대 끝에 앉아 화면을 오래 들여다봤다.

어제와 똑같은 질문.

하지만 오늘은—

어제와 다르게 느껴졌다.


손가락이 천천히 통화 버튼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아주 끝에서 멈췄다.

머릿속에 조금 전 지훈의 말이 떠올랐다.


“그 순간… 당신이 더 보고 있던 사람이 나였던 거죠.”


그리고 아주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지금도, 약간은 그렇다는 걸.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메시지 창을 열었다.


— 지금은 조금… 정리할 게 있어서.

— 이따가 전화할게.


전송 버튼을 누른 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문틈 아래로 빛이 아주 얇게 들어오고 있었다.

낮보다 어두운 빛.

어제 지하실 비상등 아래에서 느꼈던 색과 비슷한.


그리고 깨달았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것은 빛만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 동안—

내 마음 어딘가에서도 문틈이 열려 있었다.

그 틈 사이로 스며든 것이 무엇인지는, 이제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저녁이 되기 전, 지훈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수연 씨.”


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는 마당에서 주워온 듯한 작은 나뭇잎 하나를 들고 있었다.

비에 반쯤 젖은 잎.

빛에 비추면 황금빛처럼 보일 만큼 얇고 가벼운.


“예쁘죠?”

그가 말했다.

“비 온 뒤에만 생기는 색이에요.”

나는 그 잎을 받아들었다.

촉촉하고, 부드럽고, 금빛이 희미하게 스며 있었다.


“고마워요.”

내가 말했다.


지훈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하루… 저만 그런 건 아니었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 나뭇잎을 조금 더 꽉 쥐었다.

대답 대신, 조용한 인정.


지훈은 그 침묵을 대답으로 받아들인 듯, 아주 미세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봬요.”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내 마음을 더 열어젖히지 않으려는 듯한 조심스러움.

그러나 이미 반쯤 열린 문틈을 아는 사람의 눈빛.


문이 닫히고, 복도가 조용해졌을 때

나는 손바닥에 남은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그 잎의 금빛이

유리창의 금빛 봉합선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리고 문득—

내 마음이 오늘 어디까지 기울었는지를 깨달았다.


오늘 하루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현우에게 마음을 먼저 내주지 않았다.

현우의 메시지를 보며 웃지도 않았다.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집의 금빛 균열보다 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밤이 다시 내려왔다.

산의 어둠은 집을 천천히 감싸며,

오늘 하루를 조용히 봉인하려는 듯 내려앉았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처음으로 이 생각을 솔직하게 떠올렸다.


— 나는 지금, 기울리고 있다.

—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방향으로.


그 방향의 끝에 있는 사람이

남편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이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작은 감정의 기울임이

곧 첫 배신이 될 거라는 사실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꿈에선 또 비가 내렸다.

이 집의 벽 위로 금빛이 번지고,

누군가의 손이 그 위를 천천히 쓰다듬고 지나갔다.


그 손길은

남편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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