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의 서곡 18

산 아래의 눈동자

by 은서의 숨겨진 책



“비가 그친 산속 저택, ‘그 집’을 향해 올라오는 발자국과 서로 다른 세 개의 시선 속에서, 수연의 마음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밤새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눈을 뜨기 전부터 이미 비의 냄새가 뇌 속 깊은 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또다시 그 집의 벽을 보고 있었다.

비에 젖은 콘크리트 위로 금빛 균열이 천천히 번져 나가고,

누군가의 손이 그 위를 따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손은 크지 않았고,

손가락 마디마다 오래된 상처 자국들이 얇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손의 온기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 현우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꿈은 갑자기 끊겼고

나는 침대 위에서 짧은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천장은 그대로였고,

커튼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아침빛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색이었다.

그런데도 방 안 공기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무게를 갖고 있었다.


나는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손끝이 약간 축축했다.

식은땀이었다.


— 나는 지금, 어느 방향으로 기울고 있는 걸까.


질문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가슴 어딘가에서 천천히 메아리쳤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유리창엔 어제 남은 빗물 자국이 여전히 길게 늘어져 있었고,

굳어버린 물길 사이로 아침빛이 엷게 박혀 있었다.


눈길이 저절로 금빛 균열 쪽으로 향했다.

어제까지 분명히 얇았던 균열이

오늘은 아주 조금—

말로 설명하기 민망할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더 깊어진 것처럼 보였다.


“착각이겠지…”


입 밖으로 나온 말이 나조차 설득하지 못했다.


나는 창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집은 조용했다.

멀리서 작은 금속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관리인이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현관 옆 작은 테이블에 놓인 장부 위로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내가 인사하자 그는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이 집은요, 밤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수록

아침이 더 빨리 오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이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나는 장부 쪽으로 눈을 돌렸다.


오늘 날짜 아래, 이미 몇 줄의 기록이 적혀 있었다.


— 06:12, 마당 쪽 알 수 없는 소리.

— 06:15, 외부 조명 1, 3회 깜빡임.

— 06:23, 산 아래 방향에서 차량 소리.


나는 마지막 줄에서 눈을 멈추었다.


“이 시간에 차가 올라왔나요?”


관리인은 고개를 저었다.


“올라온 건지, 내려간 건지까진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기까지 엔진 소리가 올라온 건 확실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부엌 쪽이었다.


“지훈 씨가 벌써 내려왔네요.”

관리인이 말했다.


그 한마디에

내 심장 박동이 아주 미세하게 빨라졌다.



부엌 문을 열자,

어김없이 커피 향이 나를 먼저 맞았다.

어제보다 더 진했고,

오늘은 조금 쓴 냄새가 섞여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지훈이 커피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오늘은 검은색 셔츠에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어제 젖었던 옷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은 좀… 안 좋아 보이네요.”

그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꿈이… 좀 복잡했어요.”


나는 대답을 짧게 줄였다.

꿈의 내용까지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복잡한 꿈일 때는,

현실이 더 간단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지훈은 커피잔을 건네면서

살짝 웃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현실은 대체로 그 반대더라고요.”


그 말은 어쩐지

오늘 하루를 미리 예고하는 문장처럼 들렸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도

속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관리인 아저씨가…

아침부터 뭔가를 적는 소리가 들리던데요.”


내가 말하자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대요.”


“짐승 소리인가요?”


“그렇게 단순하면 좋겠지만…”


그는 말끝을 흐리며 창밖을 한 번 힐끗 봤다.


“이따 같이 내려가 보죠.

산 아래 도로 쪽까지.”


“지금… 뭔가 문제 있는 건가요?”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면 차라리 나을 텐데…

지금은, 아직 모호한 단계예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더 신경 쓰이는 거고요.”


그 시선이

순간, 조금 길어졌다.


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컵 가장자리만 바라봤다.



아침을 대충 먹고

우리는 집 앞에서 멈췄다.


관리인이 장부를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 아래 도로까지 같이 가시죠.”

그가 말했다.


“아저씨도요?”


“예. 어제 비 때문에

여러 군데 구조가 바뀌었는지 확인할 것도 있고…”


그는 말끝을 늘렸다가,

장부를 습관처럼 넘기며 한 줄을 가리켰다.


— 05:58, 외부 카메라 2번, 1초간 노이즈.


“카메라에 뭐가 잡혔어요?”

내가 묻자, 관리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선명하진 않아요.

딱 한 프레임이 깨졌는데…

그게 그냥 기계 문제라고 하기에는,

시간대가 너무 기묘해서요.”


“어떤 시간대요?”


“집안 전체가 가장 조용해지는…

새벽 6시 전후.”


그는 장부를 덮고

모자를 눌러썼다.


“직접 내려가서 보시죠.

실제로 흙이 뭐라고 말하는지 보는 게 낫겠죠.”


말투는 담담했지만,

눈동자는 깨진 카메라 프레임처럼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산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어제 폭우가 쏟아졌던 길은

이미 많이 말라 있었지만,

여기저기 작은 웅덩이와

흙이 파인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저기.”


지훈이 먼저 멈춰 섰다.

도중, 나무 두 그루 사이에 난 좁은 길 옆이었다.


그는 장갑 낀 손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발자국이죠…?”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흙 위에 찍힌 자국은

분명 사람의 것 같았다.

하지만 방향과 각도가 이상했다.


어떤 것은 뒤꿈치만 깊게 찍혀 있었고,

어떤 것은 발앞꿈치 쪽이 길게 끌려 있었다.

마치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이

몸을 질질 끌며 지나간 것처럼.


“한 명이 아니네요.”

지훈이 낮게 말했다.


“여럿인가요?”


“최소 셋.”


그는 일정한 간격으로 찍힌 자국들을 따라

눈길을 옮기며 말했다.


“여기 하나…

여기 또 하나…

그리고 여긴 조금 더 작아요.

발 사이즈를 보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마지막 자국 위에 서 보았다.


“어린 사람일 수도 있겠네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오한을 느꼈다.


“어린… 사람이라니요.”


“발 크기만 보면 그래요.

물론, 형체가 흐려져서 장담할 수는 없지만.”


관리인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여긴 원래

밤에 사람 발소리가 나는 곳이 아니거든요.”


나는 그를 바라봤다.


“산짐승은 많지 않나요?”


“짐승 발자국은

사람처럼 ‘목표’를 향해 걷진 않아요.”

관리인이 말했다.

“근데 이 자국들은…

한 방향을 향해 모여 있죠.”


그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위쪽으로 움직였다.


우리가 내려온 방향.

저택이 있는 곳이었다.



발자국은 산 아래 도로까지 이어졌다.

중간중간 빗물에 지워진 구역이 있었지만,

큰 흐름은 명확했다.


— 아래에서 위로.

— 산 밖 어딘가에서 이 집 쪽으로.


길이 조금 넓어지는 지점에서

자국은 갑자기 끊겼다.


“여기서… 끝이에요?”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도로 한쪽은 산으로,

다른 한쪽은 낮은 절벽이었다.


지훈은 흙이 부서진 모양을 살피며 말했다.


“여기, 보이세요?”


발자국이 사라진 지점 근처,

흙이 동그랗게 파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 자리를 발로 세게 디딘 후

위로 도약한 것처럼.


“여기서 차를 탔거나,

아니면…”


“아니면?”


“끌려 올라갔거나.”


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이 근처에 다른 집은 없나요?”

내가 묻자 관리인이 고개를 저었다.


“산 아래 마을까지 내려가야 집이 나와요.

여긴 이 집으로 향하는 도로 하나뿐이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이 없어질수록

숲의 기척이 더 크게 들렸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소리,

멀리서 나는 까마귀 울음.


그리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지점.


그 침묵 사이에

누군가 숨을 죽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관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묻죠.”


“네.”


“어제 밤…

현관이나 창가 근처에서

누가 서 있는 느낌, 못 받으셨어요?”

질문은 너무 직설적이었고,

너무 정확했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어젯밤, 문틈 아래로 스며들던 빛.

복도 끝에서 잠깐 느껴졌던

누군가의 발소리 같은 기척.


그 모든 것이

갑자기 한 자리에 모였다.


“…느낌 정도는 있었어요.”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관리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시간대가…

카메라가 잠깐 깨진 시간대랑

묘하게 겹치더라고요.”


지훈이 그제야

조용히 내 얼굴을 바라봤다.


“왜 말 안 했어요?”


“그냥, 내가 예민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산에서 ‘그냥 느낌’은

대부분 이유가 있는 느낌이에요.”


그의 말은

책에서 읽은 문장이 아니라

몸으로 배운 문장처럼 들렸다.


“오늘 저녁에, 산 아래 마을로 같이 내려가요.”

지훈이 말했다.


“CCTV도 보고,

근처 파출소에도 들를 거예요.

혹시 비슷한 신고가 있었는지 확인해야죠.”


“저도 가야 하나요?”


질문을 던지는 순간,

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는 걸 느꼈다.

— 가지 않겠다는 선택지는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네.”


지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오늘은…

당신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아요.”


그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숨이 걸렸다.


— 지켜주고 싶다는 말이었다.

— 붙잡고 싶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둘 사이를 구분할 자신이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휴대전화를 켰을 때,

메시지가 두 개 와 있었다.


— 아침은 먹었어?

— 오늘은 통화 가능해?


현우였다.


나는 잠깐,

화면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침은 먹었어?’

그는 늘 이렇게 물었다.


나를 지키는 방식.

확인하고, 챙기고, 다독이되

너무 깊이 파고들지는 않는 질문들.


어제까지라면

당연하게 대답했을 것이다.

‘먹었어, 당신은?’

‘오늘은 산이 조금 무서워.’


하지만 오늘은

손가락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지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순간… 당신이 더 보고 있던 사람이 나였던 거죠.”


그리고 오늘,

나는 또 다시 같은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 지금은 조금 정리할 게 있어서.

— 이따가 전화할게.


나는 그렇게만 답장을 보냈다.


그 문장을 쓰는 내내

심장이 작게 욱신거렸다.


아주 작은,

하지만 분명한 거짓말이 섞여 있었다.


정리할 것은

산 아래 도로의 발자국이 아니라,

내 마음의 방향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메시지에 적지 않았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차에 올랐다.


지훈이 운전석에 앉고,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관리인은 현관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집은 제가 볼게요.”


그가 말했다.


“오늘은… 문단속 꼭 하고 다녀오세요.

산은, 낮보다 해 질 무렵이

더 어둡게 느껴지니까.”


그 말에는

경험에서 나온 무게가 있었다.


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시라도 이상한 소리 들리면

바로 전화 주세요.”


“전화가 안 될 때도 있죠.”

관리인이 중얼거렸다.


“그럴 땐…

이 집이 우리를 좀 버텨주겠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작게 손을 흔들었다.


차가 천천히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더 좁게 느껴졌다.


아스팔트 위로

빛이 길게 눕고 있었고,

나무 그림자가 길을 가로질러

검은 줄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무섭나요?”


지훈이 물었다.


“조금요.”


“산 때문이에요,

아니면…”


그는 말을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둘 다요.”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자 지훈이

아주 작게 웃었다.


“그래도, 산은 솔직해요.”


“솔직하다고요?”


“좋아하면 빛이 바뀌고,

싫어하면 바람을 바꾸죠.

사람보다 훨씬 정직해요.”


“사람은…요?”


“사람은…

자기도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를 때가 많으니까요.”


그의 말에

내 안 어디선가

얇은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지훈 씨는요?”

나는 무심코 물었다.


“본인이 뭘 원하는지…

아세요?”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이게 얼마나 위험한 질문인지 깨달았다.


지훈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급커브를 돌기 위해 핸들을 잡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요즘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점점…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뭘요?”


“무엇을 지키고 싶고,

무엇을 놓치기 싫은지요.”


그는 전방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리고…

그게 ‘굉장히 위험한 방향’이라는 것도

같이요.”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았지만,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도, 그도.



산 아래 마을은

생각보다 더 조용했다.


평일 오후의 작은 마을 특유의 공기.

문이 반쯤만 열린 가게들,

텅 빈 놀이터,

전봇대에 붙어 바스러진 전단지들.


지훈은 차를 파출소 근처에 세웠다.


“먼저 CCTV 있는 곳부터 가죠.”


우리는 파출소와 연계된

마을 통합 관제센터 비슷한 곳으로 향했다.


안에는 중년 남성이

커다란 모니터 여러 개를 번갈아 보며 앉아 있었다.


지훈이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우리를 힐끗 보더니,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요즘 그 집 이야기,

종종 나오더라고요.”


“우리 집이요?”


나는 놀라서 물었다.


“산 위 저택 말이에요.”

그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서울에서 온 부부가

쉬려고 내려와 산에 집을 지었다,

관리인이 혼자 지키고 있다…

이런 건 다들 아는 이야기죠.”


그 말은

내 삶 전체가

한 줄짜리 소문으로 요약되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터…요?”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그 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꽤 됐어요.”


그는 상체를 약간 돌려

우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근데 요즘은 말이죠…

그 집 쪽으로 밤에 올라가는 차가

가끔 잡혀요.”


지훈의 시선이

단단해졌다.


“몇 대나요?”


“많진 않아요.

근데 문제는…”


그는 리모컨을 집어 들고

모니터 화면을 되감기 시작했다.


“대부분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오는 건 안 잡혀요.”


말이 끝나는 순간,

모니터 한쪽에 우리 집으로 향하는 도로가 나타났다.


화질은 좋지 않았지만,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각도,

어두운 차체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 차…

번호판은요?”


지훈이 물었다.


“비에 젖은 날이어서

반사광 때문에 잘 안 나와요.”


그는 화면을 멈추고

몇 번 확대해 봤지만

번호판은 흰 직사각형 덩어리로만 보였다.


“몇 시인가요?”


“새벽 1시 42분.”


그 시간대는

우리 셋 모두가 깊이 잠들어 있던 시간이었다.


“내려오는 건 안 찍혔다고 하셨죠.”


“이 카메라 기준으로는요.”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쪽으로 빠지는 길은 없으니까

돌아서 갔다고 해도

어딘가에 찍혔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없어요.”


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말없이 손을 모았다.


누군가가,

우리 집을 향해 올라왔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그 흔적은

산길의 발자국과 연결되고 있었다.



센터를 나와

잠시 파출소에도 들렀다.


형사는

“별다른 신고는 없다”고 했지만,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파출소 앞 자판기 옆,

낡은 벤치에 잠시 앉았을 때였다.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온 듯

몸이 몹시 무거워졌다.


“괜찮아요?”


지훈이 물었다.


“조금 머리가… 복잡해서요.”


“오늘이요,

‘무서운 일’이 시작된 날일 수도 있지만…”


그가 잠시 말을 고르고

다시 이어 말했다.


“한편으론,

‘이미 있었던 일’을 드러내 보게 된 날일 수도 있어요.”


“이미 있었던 일…?”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

우리가 안 보려고 했던 것들.”


그 말은

단지 발자국과 차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 역시

지금까지 내 삶에서

보지 않으려고 했던 구석이

분명히 있었다.


현우의 완벽함이

어쩌면 나를 조용히 떠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지훈의 불완전함이

어쩌면 나를 붙잡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이 그 지점에 닿자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현우였다.

영상통화 요청.


화면 위로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가,

천천히 깜빡였다.


“받을래요?”


지훈이 묻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본능적으로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질문이

그 순간

‘선’처럼 느껴졌다.


— 이 선을 넘을 것인가,

— 아니면 다시 뒤로 물러날 것인가.


몇 초 동안

화면과 지훈 사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아주 작은 속삭임 같은 선택을 했다.


“지금은…

조금만 더 있다가요.”


나는 통화 요청을 거절하고

대신 메시지 창을 열었다.


— 미안, 지금은 마을 쪽에 내려와 있어서.

— 집에 올라가면 전화할게.


보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오늘, 하루 종일

현우에게 솔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어제보다 덜 아프게 느껴진다는 것 역시.



우리는 마을에서

작은 슈퍼에 들렀다.


집에 둘 만한 간단한 식료품과

램프용 건전지,

비상식량 같은 것들을 담았다.


계산을 마치고 나와보니

해가 이미 많이 기울어 있었다.


붉은 빛이

마을의 낡은 간판들을 스치고 있었다.


차로 돌아가는 길,

지훈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왜요?”


“저기…”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전봇대 하나가

비스듬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위,

눈높이쯤 되는 곳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테이프가 반쯤 떨어져

종이가 바람에 흔들렸다.


나는 얼떨결에

가까이 다가갔다.


종이에는

굵은 펜으로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


— 그 집. 조심하세요.


글씨는 서툴고 거칠었지만

정확하게 읽혔다.


아래 구석에는

비에 번진 붉은 얼룩이

엉켜 있었다.


피인지, 잉크인지

알 수 없었다.


“장난인가요…?”


내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장난치기엔,

너무 특정한 방향을 향한 말이죠.”


지훈이 종이를 뜯어내며 말했다.


“이거,

가지고 있어도 될까요?”


“원하시면요.”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 문장 자체보다

‘그 집’이라는 표현에

자꾸 시선이 걸렸다.


나에게 ‘집’은

너무 구체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현우와 함께 찍은 사진들,

정리된 서랍장,

늘 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 컵들.


그런데 이 산에서,

이 마을에서,

‘그 집’이라고 말할 때

그 얼굴은 완전히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멀리, 높이,

이질적인 집.


나는 그 둘 사이에서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산길로 다시 들어섰을 때는

이미 하늘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나무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사라졌다.


지훈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침묵이

왠지 오늘은

불편하지 않았다.


“무섭지 않아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가요?”


“이 집이요.

이 산이요.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본 것들요.”


지훈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있다가

짧게 대답했다.


“무서워요.”


그 답은

생각보다 훨씬 단순했고,

그래서 더 진실 같았다.


“근데요.”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누군가랑 같이 무서워하면

조금 버틸 만해져요.”


거짓말처럼,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짜로 조금 덜 무서워졌다.


“저 혼자였으면…

아마 벌써 도망쳤을 거예요.”


나는 웃으면서도

그 말이 절반은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도망갈 때

제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네요.”


지훈이 말했다.


“같이 도망치는 건가요?”


“네.

적어도,

누가 우리를 뒤쫓아오는지

같이 확인할 수는 있잖아요.”


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는 경계는

이미 많이 흐려져 있었다.



집이 시야에 들어올 즈음,

하늘은 거의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현관 앞 외부 조명이

자기 혼자만의 리듬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관리인이 마당에서

전등을 하나씩 점검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그가 우리를 보며 말했다.


“마을에서…

좀 둘러보다 왔어요.”


지훈이 대답했다.


“이상한 일은 없었나요?”


“이상한 소리야,

이 집에선 늘 나죠.”


관리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집중해서 들리는 기분이더군요.”


“무슨 뜻이에요?”


“마당 쪽으로

누가 한 번 들어왔다 나간 것 같아요.”


순간,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마당으로 향했다.


“발자국이요?”


“그럴 법한데…

아주 지워졌어요.

누가 일부러 흔적을 닦아놓은 것처럼.”


그는 현관 옆

작은 화단을 가리켰다.


“꽃가지가 하나 꺾여 있더군요.

보통은 바람이 부러뜨렸겠거니 하는데…”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우리 둘을 번갈아 봤다.


“오늘은 왠지,

그렇게 쉽게 넘기고 싶지 않은 밤이네요.”



집 안으로 들어오자

공기가 밖보다 더 무거웠다.


조명은 모두 켜져 있었지만

어딘가 어둡게 느껴졌다.


관리인은 1층 CCTV 모니터를 켰다.

여러 화면이 한꺼번에 켜지며

집의 외곽을 각각 다른 각도로 비추었다.


“이건 낮에 지워진 흔적 이후고…”

그가 시간을 돌려보며 말했다.


“여기.

이 지점.”


나는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당 구석,

나무 그늘 쪽에

잠깐, 어두운 형체가 스쳤다.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하진 않았지만,

짐승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 곧은 선이 느껴졌다.


“프레임이 하나 깨졌네요.”

관리인이 말했다.


“깨졌다고요?”


“여기,

이 부분.”


그는 일시정지를 눌렀다.


모니터 한쪽의 화면이

하얗게 번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 시간대가 언제죠?”


지훈이 물었다.


“우리가 산 아래 내려간 지

한 시간쯤 지난 뒤.”


관리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딱,

해가 완전히 넘어가던 시간.”


— 우리가 없던 시간.

— 이 집이 혼자 숨을 쉬던 시간.


그때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났다.


내 휴대전화였다.


현우였다.


메시지도 아니고,

영상통화도 아니고,

그냥 전화.


나는 잠시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다봤다.


“받으세요.”


지훈이 조용히 말했다.


이번엔,

질문이 아니라 권유에 가까웠다.


나는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


현우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어디야?

목소리가 좀… 피곤하네.”


나는 잠시

말을 고르지 못했다.


내 옆에는

지훈과 관리인이 서 있고,

눈앞에는

집의 어두운 외곽이 화면으로 비쳐 있고,

머릿속에는

‘그 집. 조심하세요’라는 문장이 맴돌고 있었다.


“마을에 내려갔다가

지금 막 올라왔어.”


나는 최대한

평범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어제도 전화 못 했잖아.

산에 있으니까… 괜히 걱정돼서.”


현우의 걱정은

늘 같은 결로 흘렀다.


나는 문득,

그 결이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안전하게 감싸고 있었는지 떠올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 결이 얼마나 오래

나를 조용히 질식시키고 있었는지도.


“괜찮아.”


입 밖으로 나온 대답이

조금 가벼웠다.


“산이…

조금 이상하긴 한데,

지훈 씨도 있고,

관리인 아저씨도 있고.”


나는 무심코

지훈의 이름을 먼저 말했다.


통화 너머,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래도… 조심하고.”


현우가 말했다.


“밤에 너무 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문단속도 잘 하고.”


“알겠어.”


나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지훈이

조용히 내 옆에서 서 있었다.


그의 존재가

이상하게도

통화음을 더 작게 만들었다.


“보고 싶다.”


현우가 마지막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 말에,

가슴 어딘가가 찌릿했다.


하지만 그 감각은

예전만큼 크지 않았다.


“나도.”


나는 대답했다.


그 말이

얼마나 진심인지,

얼마나 습관인지조차

스스로 구분할 수 없었다.


통화를 끊고 나서

한동안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지훈의 목소리가

그때 들려왔다.


“거짓말이었어요?”


“어떤 게요?”


“‘나도.’”


그는 시선을

모니터 쪽에 둔 채 물었다.


“조금은 진심이었고,

조금은…

그냥 해야 할 말이었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저도 그래요.”


그가 말했다.


“당신한테 하는 말들,

조금은 진심이고,

조금은…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죠.”


그 말이

허공에 잠시 떠 있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모니터 속 집의 그림자가

더 깊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밤은 생각보다

더 빨리 내려왔다.


관리인은

1층 거실에서 모니터를 보겠다고 했고,

나는 2층으로 올라가려다

발걸음을 멈췄다.


지훈이 뒤에서 불렀다.


“잠깐.”


나는 돌아봤다.


“오늘은…

위험한 날일지도 모르니까.”


그의 말은

반쯤 농담처럼 들렸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이 방,

문 잠그고 주무세요.”


그는 내 방 문손잡이를 가리켰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문 두드릴게요.

그전까지는,

어떤 소리가 나도

혼자서 열지 말고요.”


“무슨 소리가 나면요?”


“사람 목소리든,

발자국 소리든,

창문 두드리는 소리든.”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한 마디를 더 얹었다.


“혹시…

제가 아닌 목소리가

당신을 부르면.”


그 말은

농담 같으면서도

기이한 진지함을 품고 있었다.


“그게 진짜 사람인지,

그냥 산인지,

확신할 수 없을 때는

일단 버티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훈 씨 목소리만

믿으면 되는 건가요?”


그가

조금 웃었다.


“지금 이 집에선,

그게 가장 위험한 선택이겠죠.”


말은 그렇게 해놓고,

그의 눈빛은 고집스럽게

나를 붙잡았다.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나니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고요함은

그다지 편안하지 않았다.


침대 모서리에 앉아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마을 전봇대에서 떼어온 종이,

‘그 집. 조심하세요’라는 문장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문장의 ‘그 집’이

나의 집인지,

이 산속 저택인지,

혹은 내가 서 있는 이 모든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휴대전화 화면을 다시 켰다.


현우의 메시지가

한 줄 더 와 있었다.


— 혹시라도 무서우면,

— 언제든 전화해.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카메라 앱을 켜서

창문 쪽을 찍었다.


유리창에 비친 방 안,

그리고 그 너머로

어둡게 내려앉은 산의 윤곽.


사진 속 유리창 한가운데

금빛 균열이 희미하게 빛났다.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그 위를 따라 움직였다.


마치 꿈속에서 보았던

손의 움직임처럼.


— 그 손은,

— 분명히 남편의 것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집 안이 조금씩 조용해졌다.


아래층에서

관리인이 움직이는 소리,

부엌 쪽에서 나는 작은 금속 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대신,

바깥의 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척’ 같은 것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수연 씨.”


지훈의 목소리였다.


나는 문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요?”


“잠깐만 문 열어줄 수 있어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문을 여는 순간,

지훈이 작은 손전등과

담요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관리인 아저씨가

잠깐 밖을 돌아보고 오시겠대요.

카메라 각도도 조정할 겸.”


“지금요?”


“네.

그래서,

혹시라도 무서울까 봐.”


그는 담요를 내밀었다.


“이거라도 덮고 있으면,

조금 덜 추울 수 있잖아요.”


나는 담요를 받으며

작게 웃었다.


“그건

추위 때문만은 아니죠.”


“그렇죠.”


그도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움도,

웬만하면

몸부터 따뜻해야 버틸 수 있으니까.”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그는 돌아서려다

잠시 멈추고

덧붙였다.


“아, 그리고…”


“네?”


“아까 파출소 앞에서

현우 씨랑 통화할 때요.”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도’라고 대답했잖아요.”


심장이 살짝 멎는 느낌이 들었다.


“들으셨군요.”


“어쩔 수 없이요.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


“그 말,

안 했으면 좋겠다고

잠깐 생각했어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했어요.”


“왜요?”


“그 말이 있어야

제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당신이 더 정확히 알 수 있으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복도로 조금 물러섰다.


“문, 잠그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잠금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평소보다 더 크게 들렸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까.


책을 펼쳐놓고도

한 줄도 읽히지 않았다.


담요를 어깨에 둘러쓰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또

작은 진동 소리가 났다.


휴대전화였다.


현우였다.

이번에는

그냥 짧은 메시지.


— 잘 자.

— 너무 무서우면,

— 그 집 내려오지 말고 바로 돌아와도 돼.


문득,

그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집 내려오지 말고’.


그에게 이 집은

‘잠시 머무는 곳’일 뿐이었다.


나에게는

이미 마음 한 조각이

고정된 채로

남아버린 곳이 되어가고 있는데.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뒤집어

책상 위에 엎어 두었다.


그 순간,

복도 쪽에서

아주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툭.

툭.

툭.


어른의 발자국으로 보기엔

조금 가벼운 소리.


아이의 발자국이라고 하기엔

조금 규칙적인 소리.


나는 숨을 죽였다.


잠시 후,

내 방 문 앞에서

무언가가 한 번 멈추는 느낌이 들었다.


문손잡이가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문틀이 아주 미세하게

‘응’ 하고 소리를 낸 것 같았다.


“수연 씨.”


그때,

지훈의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려왔다.


“괜찮아요?”


발자국 소리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명확하게 지훈의 발소리였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지훈 씨?”


“네, 저예요.”


문틈 아래로

손전등 불빛이 스쳤다.


“관리인 아저씨가

조금 늦을 것 같대요.

산 쪽에 조명 하나가 나갔다고.”


“바깥은… 괜찮나요?”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하진 않아요.”


그의 대답은

솔직했다.


“그래서…

복도에서 잠깐

지키고 있으려고요.”


“여기를요?”


“네.

당신 방 앞에서요.”


그 말은

어떤 약속보다

위험한 선언처럼 들렸다.


“굳이 그렇게까지…”


“오늘만요.”


그는 말을 잘랐다.


“오늘 하루만.”


나는 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서로 등을 기대고 있는 셈이었다.


현우의 목소리는

지금 이 공간에 닿지 못했다.


대신,

지훈의 숨소리와

산의 어둠이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

눈이 점점 무거워졌다.


담요의 온기와

문 너머의 기척이

이상하게도 안정을 줬다.


반쯤 잠에 빠졌을 때

어깨 위에

무언가가 살짝 얹히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담요를 조금 더

내려 덮어 주는 손길.


손가락이 담요 끝을 고르고,

어깨선 근처에서 잠시 머물다

조심스럽게 떨어져 나가는 움직임.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 손길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휴대전화는

책상 위에서 다시 한 번

짧게 진동했다.


나는 끝까지

그 진동을 무시했다.


방 안의 어둠과

담요의 온기,

문 너머에서 들리는

작은 숨소리 하나에

더 깊이 기대기 위해.


오늘 하루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현우에게 마음을 먼저 내주지 않았다.


그 사실이

무서우면서도

이상하게 달콤했다.


— 산 아래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눈동자가

이 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집 안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눈동자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도시 어딘가의 높은 건물에서

또 다른 눈동자가

내가 없는 집의 공백을 바라보고 있겠지.


세 개의 서로 다른 시선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나라는 균열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면서

마지막으로 하나의 문장을 떠올렸다.


— 이 집에서 먼저 무너지는 건

벽도, 유리도, 숲도 아니라

아마, 내 마음일 거라는 걸.


그리고 그 균열은

누군가의 발자국처럼,

누군가의 시선처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방향으로

산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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