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기 직전의 공기는 늘 애매하다.
아직 젖지 않았는데, 이미 축축한 기운이 피부에 달라붙는다.
사람들은 그 순간을 잘 기억하지 않는다.
비가 오기 전과 온 뒤만 말할 뿐,
막 시작되기 직전의 시간은 늘 건너뛴다.
나는 그런 시간을 좋아한다.
아무것도 확실해지기 전의 상태.
우산을 펼칠지 말지 망설이는 손,
창문을 닫을지 말지 잠시 멈춘 몸짓.
결정을 내리기 전의 인간은
잠깐, 가장 솔직해진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면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느슨해진다.
어딘가로 가고 있지만
아직 도착하지는 않은 얼굴들.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기다림을 견디는 각자의 방식이 묻어 있다.
누군가는 초조하고,
누군가는 무심하고,
누군가는 이미 포기한 얼굴이다.
기다림은 평등하지 않다.
같은 시간을 서 있어도
누군가에겐 짧고,
누군가에겐 끝없이 길다.
나는 오래 기다리는 사람을 유심히 본다.
버스가 늦어지는 이유를 묻지 않고,
시계를 확인하지도 않고,
그저 서 있는 사람.
그 태도에는 체념이 아니라
이상한 단단함이 있다.
우리는 보통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을
손실로 계산한다.
빨리 오지 않으면 짜증이 나고,
지연되면 하루 전체가 망가진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우리를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준다.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순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틈.
비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정류장의 소리가 바뀐다.
지붕을 때리는 작은 충돌음,
젖은 아스팔트에서 튀어 오르는 냄새.
그때 사람들은 비로소
지금 이곳에 있다는 걸 자각한다.
도착할 장소보다
서 있는 위치가 먼저 느껴진다.
나는 종종
버스를 놓쳐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음이 있다는 사실보다
지금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감각이
더 중요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앞으로만 이동하려고 한다.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서,
멈추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멈춤은
항상 후퇴를 의미하지 않는다.
때로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자리를 잡는 과정일 뿐이다.
버스가 도착하면
사람들은 동시에 움직인다.
조금 전까지 각자의 세계에 있던 얼굴들이
한 방향으로 쏟아진다.
그 순간 나는
서두르지 않고 맨 마지막에 탄다.
이미 충분히 기다렸기 때문이다.
젖은 창문 너머로
정류장이 멀어질 때,
나는 잠시 생각한다.
오늘 하루를 기억하게 된다면
이 이동이 아니라
그 전에 서 있던 시간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았던 시간.
그저 숨을 고르고,
주변을 느끼고,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던 몇 분.
삶이란 어쩌면
계속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순간들을
지나치지 않는 연습인지도 모른다.
비는 어느새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