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산문 에세이 - 틈4

by 은서의 숨겨진 책

우리는 흔히 “선택”이 인생을 만든다고 말한다.

어떤 학교를 갔는지, 어떤 직장을 택했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

그래서 삶을 돌아볼 때면, 마치 갈림길의 표지판들만 기억하려 든다.

왼쪽으로 갔던 날, 오른쪽으로 갔던 날.

그날의 용기, 그날의 비겁함.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삶을 가장 많이 바꾼 것은 선택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결정하지 않은 채로 흘려보낸 날들.

확답을 미룬 채로 둔 대답들.

반쯤 열어둔 채로 닫지 않은 문들.


우리는 무언가를 하지 않음으로써도 방향을 만든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삶은 그런 쪽에 더 솔직하다.

내가 적극적으로 “이것”을 택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적극적으로 “저것이 아닌 쪽”을 계속 연습한다.

그리고 그 연습은 언젠가 몸에 습관처럼 붙는다.

그때는 이미 선택이 아니라 체질이다.


어떤 사람은 “나는 게으른 편이야”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말은 너무 간단하다.

게으름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도 안전을 느끼지 못할 때 나타나기도 한다.

시작하면 책임이 생기고, 책임이 생기면 평가가 따라오고, 평가가 따라오면 상처가 생길까 봐.

그러니까 게으름은, 무능의 증거가 아니라 상처를 피하려는 능력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부끄러워한다.

인간은 자기 몸이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한 흔적까지도 죄책감으로 바꿔버린다.


나는 종종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가장 위험한 칭찬이라는 생각을 한다.

좋은 사람이 되려는 순간, 우리는 자기 마음의 일부를 검열하기 시작한다.

미움은 나쁜 감정이라고 믿고, 질투는 천한 감정이라고 믿고, 분노는 추한 감정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런 감정들이 생기면, 그것을 느끼는 나를 먼저 심판한다.

하지만 심판을 먼저 시작하면, 감정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저 숨어서 더 무거워질 뿐이다.


우리가 “참는다”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행동은, 사실 “정리되지 않은 것을 덮어두는 행위”다.

덮어두면 안 보이니까 괜찮아지는 것 같지만,

덮어둔 것은 사라지지 않고 내부에서 형태를 바꾼다.

말이 되지 못한 감정은 몸이 되고,

몸이 되지 못한 감정은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지 못한 감정은 관계의 공기로 변한다.

그리고 언젠가 그 공기는 누군가에게 “너 왜 이렇게 차가워?” 같은 질문으로 돌아온다.

그 질문을 받는 순간 우리는 당황한다.

나는 차갑게 굴려고 한 적이 없었는데.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차갑게 굴려고 한 적이 없는 대신

따뜻해지려고 한 적도 없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은 의외로 기술이다.

기술은 연습하지 않으면 녹슨다.

우리는 사랑을 감정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사랑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감정의 유지다.

좋은 날에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별일 없는 날에도 계속 선택해야 하는 태도다.


그래서 나는 관계를 “정답 맞히기”로 여기지 않으려 한다.

상대의 기분을 정확히 읽고, 완벽한 말을 찾아내고, 실수하지 않는 게임처럼 만들면

관계는 결국 시험장이 된다.

시험장에서는 누구도 편히 숨 쉬지 못한다.

관계가 시험이 되면 우리는 상대를 사람이 아니라 문제로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문제로 본 사람을 오래 사랑할 수는 없다.


나는 오히려 관계가 “번역”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마주 앉아

상대의 문장을 내 언어로 옮기려 애쓰는 일.

번역은 완벽할 수 없다.

어떤 단어는 옮겨지면서 의미가 조금 마모되고,

어떤 뉘앙스는 옮겨지면서 전혀 다른 상처가 된다.

그런데도 번역이 의미 있는 이유는,

완벽해서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도, 다시 묻고, 다시 고치고, 다시 시도한다.


삶도 그렇다.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을 번역하면서 산다.

내 마음을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내가 감당할 수 있도록.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을 배신한다.

너무 솔직하면 불편해질까 봐, 너무 욕심내면 미워 보일까 봐.

그래서 마음의 문장을 일부 삭제하고 제출한다.

그 삭제가 반복되면 어느 순간,

내가 나에게 제출하는 문장은 내 마음의 원문과 점점 멀어진다.


그때부터 사람은 이상한 방식으로 괴로워진다.

겉으로는 별일 없는데,

안으로는 계속 “어딘가 틀렸다”는 감각이 남는다.

그 감각은 대개 사건이 아니라 문장 때문이다.

내가 나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낸 문장이

내 몸속에서 이물질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가끔은 “잘 살겠다”보다 “덜 속이겠다”가 더 현실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잘 산다는 말은 너무 크고, 너무 추상적이라 쉽게 나를 다시 평가의 자리로 데려가지만

덜 속이겠다는 말은 오늘 당장 할 수 있다.

오늘 내가 정말 싫었던 것을 싫었다고 인정하기.

오늘 내가 부러웠던 것을 부러웠다고 말해 보기.

오늘 내가 외로웠던 것을 외로웠다고 써 보기.


이 작은 정직들이 쌓이면,

인생은 어느 순간부터 “선택”이 아니라 “회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얼마나 돌아올 수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성장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어떤 날에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야말로 성장일 수 있다.

처음부터 있던 마음, 처음부터 싫었던 것, 처음부터 원했던 것.

그런 것들을 너무 오래 무시해 왔다면,

그것들을 다시 듣는 일은 전진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요즘

인생이란 거창한 결단의 합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번역과 수정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번역의 품질을 결정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태도다.

내 마음을 함부로 편집하지 않으려는 태도.

남의 마음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오역하며 산다.

문제는 오역 자체가 아니라,

오역한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편하고, 효율적이고, 무난해 보이지만

어느 날 문득 나를 비워버린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가 나를 제대로 번역하고 있는지 점검한다.

완벽한 번역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원문을 지우지 않는 삶.


그 정도면,

하루가 조금은 덜 거짓말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