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의 서곡22

남겨진 흔적의 온도

by 은서의 숨겨진 책



아침은 어제보다 더 조용했다.

조용함은 늘 무언의 합의처럼 찾아온다. 아무 일도 묻지 말자는 합의, 이미 벌어진 일들을 이름 붙이지 말자는 약속. 이 집은 그런 약속을 잘 지킨다. 그래서 더 불길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가 얼마나 얕은 숨으로 밤을 건넜는지 알 수 있었다. 베개가 낯설게 축축했고, 손목의 밴드는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 느슨함은 밴드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내 기준, 내 거리, 내 ‘괜찮음’의 정의까지—모두 한 칸씩 밀려 있었다.


아래층에서 관리인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물을 끓이는 소리,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 인간의 소음이 집의 숨결을 잠시 가려주었다. 나는 그 가림막에 기대어 계단을 내려갔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어젯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순경이 두고 간 비닐장갑 하나, 사진을 찍고 옮기느라 밀려난 컵, 그리고—내가 가장 보지 않으려 했던 자리. 빈 상자가 놓였던 자리. 상자는 사라졌는데, 자리는 남아 있었다. 자리는 언제나 물건보다 오래 산다. 사라진 것보다 남은 공백이 더 오래 사람을 붙잡는다.


지훈은 이미 거실에 와 있었다. 내가 내려오자 그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오래 머무는 시선은 관심이라기보다 확인일 때가 많다. 살아 있는지, 아직 같은 편인지, 밤사이 무너지지는 않았는지.


“밤새 별일은 없으셨죠.”

지훈이 말했다.


안부처럼 들리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그 문장 안에는 ‘별일이 있어야 정상’이라는 전제가 얇게 깔려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건 언제나 가장 쉬운 거짓말이다. 말이 적을수록, 들킬 여지도 줄어든다고 믿게 되니까.


부엌에서 관리인이 말했다.

“오늘은 아침에 마을에 내려가겠습니다. 파출소에서도 인원을 한 명 더 붙여 준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나왔을 때, 집 안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그 흔들림을 몸으로 먼저 느꼈고, 심장이 한 박 늦게 따라왔다. 집이 싫어하는 결정이 하나 더 쌓였다. 싫어하는 것들이 쌓이면, 이 집은 대개 반응한다. 그것이 폭력이든, 친절이든, 이 집은 반응을 잊지 않는다.


나는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인 수첩을 집어 들었다. 어젯밤에는 없던 물건이었다. 분명히 방에 두고 내려왔던 내 수첩. 표지의 모서리가 살짝 접혀 있었다. 급할 때,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접는 각도 그대로였다.


“이 수첩…”

내가 말하자 지훈의 시선이 수첩으로 옮겨왔다.


“어제 여기 위에 있었습니까?”

그가 물었다.


“아니요. 분명 방에 두고 내려왔어요.”


말의 끝은 자연스럽게 의심으로 흘렀다. 누가 가져왔을까, 왜 여기 있을까. 질문은 늘 한 방향으로 모인다. 집 안쪽으로. 집은 손이 없는데도, 늘 물건의 자리를 바꾸는 법을 알고 있었다. 사람의 시선을 옮기는 법을 알고 있었다.


나는 수첩을 열었다. 메모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 종이는 어제의 것과 비슷한 질감이었다. 얇고, 지나치게 단정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여기 있었던 것처럼, 내가 지금에서야 발견하게끔 준비되어 있던 것처럼.


글씨는 더 친숙했다. 친숙함은 불쾌함을 데려온다. 불쾌함은 경계심을 무너뜨린다. 이 집은 그런 순서를 잘 안다.


‘당신은 항상 말을 줄이기 전에 숨을 고릅니다.’


문장은 단정했고, 그 단정함이 더 무서웠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내가 말하기 전에 숨을 고르는 건 오래된 버릇이었다. 실수하지 않으려는 습관, 들키지 않으려는 준비. 그 준비가 내 목 안쪽에 늘 붙어 있었다는 걸, 나는 이 문장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지훈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종이를 보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때로 가장 솔직한 반응이다. 모를 때의 침묵이 아니라, 알지만 말하지 않기로 한 침묵.


“이 메모는…”

내가 낮게 말했다.

“어제와 같은 사람이 쓴 것 같죠.”


지훈은 대답 대신 종이를 아주 조심스럽게 접었다. 접는 방식이—내 방식과 같았다. 그 사실이 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내 습관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 누군가의 손에 올라가 있는 느낌. 그것은 도둑맞은 것보다 더 모욕적이었다.


“수연 씨.”

지훈이 말했다.

“이건 집 안에 두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 집은… 그런 걸 오래 기억합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되물었다.


그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다려 주는 표정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기다림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확신은 상대에게 선택지를 남기지 않는다. 확신은 ‘이해’가 아니라 ‘납득’을 요구한다.


“기억이 아니라, 사람에게 붙습니다.”

지훈이 이어 말했다.

“한 번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말은 공손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붙잡음이 들어 있었다. ‘사람에게’라는 단어가 내 귀 안쪽에서 오래 울렸다. 내가 그 “사람”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지훈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관리인이 끼어들었다.

“또 쪽지입니까? 전부 모아서 경찰에 전달하겠습니다.”


“잠깐만요.”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내 안에서 단단함이 생겨나는 게 이상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늘 얇아지고, 얇아진 만큼 남에게 기대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수첩의 다른 페이지들을 넘겼다. 낙서처럼 보이는 문장들이 있었다. 그런데 잉크의 압과 번짐이 달랐다. 오래된 페이지들. 내가 비워두었다고 믿었던 곳들. 그 빈 공간이, 어느새 누군가의 문장으로 채워져 있었다.


‘당신은 밤에 커튼을 세 번 확인합니다.’

‘익숙한 소리가 나면 먼저 다가갑니다.’

‘손목을 만지작거리는 건 불안을 숨길 때입니다.’


나는 페이지를 덮었다. 덮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손끝이 종이에 긁혔다. 따끔함이 올라왔다. 따끔함은 현실을 붙잡는 데 유용하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꿈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이건…”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제가 저를 설명해 둔 것 같아요.”


지훈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는 곧바로 그 흔들림을 지웠다. 감정이 아니라 판단을 남기는 얼굴. 그런 얼굴은 오래 살아남는다. 대신, 오래 남는다.


“아닙니다.”

지훈이 짧게 말했다.

“누군가가 수연 씨를 꽤 오랫동안 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 문장도 위로처럼 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안에서 다른 냄새를 맡았다. ‘오랫동안’이라는 시간. 그리고 ‘보고 있었다’는 방향. 관찰. 개입. 그런 단어들이 기분 나쁘게 피부 가까이에 붙었다.


관리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더 문제 아닙니까? 누가 수연 씨를 그렇게—”


나는 듣지 않았다. 귀가 닫힌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더 큰 소리가 자라났다. ‘이 집은 기억을 훔친다.’ 훔친다는 건 그대로 가져가는 게 아니다. 변형하고 섞고, 주인을 헷갈리게 만든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주인이 스스로 자기 것이라 믿게 만든다. 그게 가장 완벽한 도둑질이다.


마을에 내려가자는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관리인은 집 주변을 더 살피겠다고 했고, 지훈은 내가 혼자 있지 않게 하겠다고 했다.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은 보호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묶음이다. 나는 그 묶음을 거부하지 못했다. 아니, 거부하지 않았다. 거부하는 게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후, 햇빛이 복도를 길게 눕혔다. 금빛 균열은 빛을 먹고 더 또렷해졌다. 이제는 벽 하나에만 있지 않았다. 문틀의 모서리, 계단 난간의 이음새, 틈이 있는 곳마다 금빛이 얇게 스쳤다. 집이 틈을 늘리고 있었다. 틈이 늘어날수록, 사람도 늘어진다. 마음의 경계가 느슨해진다.


나는 복도를 걸으며 일부러 발걸음을 셌다. 하나, 둘, 셋. 셋에서 멈추는 건 내 습관이었다. 멈추는 순간, 뒤에서 지훈의 발걸음도 멈췄다. 맞춰진 타이밍. 우연치고는 너무 정확했다.


“수연 씨.”

지훈이 말했다.

“그 글씨를 처음 본 건 아닐 겁니다.”


나는 멈춘 채 고개만 돌렸다.


“다만, 어디서였는지는 아직 떠올리지 못하시는 거겠죠.”

그는 질문처럼 말하지 않았다. 판단이었다. ‘아닐 겁니다’라는 문장은 부드럽지만, 끝에 남는 건 단정함이다. 단정함은 기억을 강요한다. 나는 내 기억이 내 것이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


“왜 그렇게 확신하세요?”

내가 물었다.


지훈은 대답을 길게 하지 않았다. 길게 말하지 않는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수연 씨는 잊어버린 걸 ‘없는 일’로 만들지는 못하십니다.”

그가 말했다.

“그런 분은… 결국 흔적을 따라가게 됩니다.”


흔적. 그 단어가 금빛처럼 번졌다. 나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생각을 맑게 했다. 문을 열기 전에, 나는 손을 놓았다. 예전에 들려왔던 문장. ‘문은 두 번 열리지 않는다.’ 문을 열지 않는 선택도, 하나의 선택이다. 나는 그 선택을 붙잡고 싶었다. 아직은.


지훈이 옆으로 다가왔다. 너무 가깝지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 그 거리감이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정확한 거리는 의도를 숨긴다. 의도가 숨겨진 곳에 사람은 가장 쉽게 발을 디딘다.


“수연 씨는…”

지훈이 말을 시작했다가, 잠깐 멈췄다.

“기억을 믿기보다는,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먼저 확인하시는 분입니다.”


내 몸이 아주 작게 굳었다. 그 말은 설명이 아니라 규정이었다. 그리고 규정은 관계를 만든다. 사람을 ‘그런 사람’으로 고정시킨다. 고정되는 순간, 나는 다른 선택을 하기 어려워진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내가 물었다.


지훈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는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집에서는… 혼자만 흔들리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 문장은 위로였다. 동시에 도망 불가의 선언처럼 들렸다. ‘혼자만’이라는 말은 이미 ‘우리’를 전제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그의 문장은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 나는 다시 수첩을 열었다. 맨 마지막 페이지에—내가 분명히 비워 두었던 페이지에—새 문장이 있었다. 잉크는 아직 마르지 않은 듯 번들거렸다. 집이 방금 썼다고 믿게 만들 만큼 선명했다.


‘당신은 결국, 익숙한 쪽을 고릅니다.’


익숙한 쪽. 내 머릿속에는 두 얼굴이 겹쳤다. 현우의 얼굴은 늘 ‘정상’의 얼굴이었다. 평온하고, 다정하고, 흔들리지 않는 얼굴. 지훈의 얼굴은 ‘틈’의 얼굴이었다. 불안과 확신이 동시에 있는 얼굴. 틈이 사람을 끌어당길 때, 사람은 그 틈을 이유로 삼는다. 나는 그 이유가 생기는 것이 무서웠다.


그날 밤, 우리는 다시 1층에 앉아 있었다. 불은 켜져 있었고, 집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마치 우리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놓치는 게 아니라, 이미 잡혀 있는 것 같았다.


지훈이 물컵을 내 쪽으로 밀었다. 손이 닿지 않게, 그러나 닿을 수 있을 만큼만. 그 거리의 세심함이 더 위험했다. 닿지 않음은 늘 상상을 남긴다. 상상은 현실보다 빨리 사람을 망가뜨린다.


“오늘은…”

지훈이 말했다.

“수연 씨 말버릇이 더 분명했습니다.”


나는 컵을 들지 못한 채 그를 바라봤다.


“어떤 버릇이요?”

내가 물었다.


지훈은 잠깐 웃었다. 웃음은 방어처럼 보였지만, 그의 눈은 방어가 아니었다. 눈은 여전히 계산의 자리였다.


“끝을 흐리시는 버릇입니다.”

“마침표를 늦게 찍으시죠.”


그 말은 관찰이었다. 관찰은 친밀함처럼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소유의 첫 단계다. ‘나는 당신을 읽고 있다’는 선언. 그 선언을 내가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나 혼자만의 사람이 아니다.


복도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종이가 스치는 소리.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제는 안다. 보지 않아도, 이 집은 나를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집이 훔치는 건 기억만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인식하는 방식—그 경계까지다.


그리고 그 경계가 흐려질수록, 나는 더 자주 확인하게 된다.

내가 누구 편인지.

내가 누구를 익숙하다고 부르는지.


집은 조용히 숨을 쉬었다.

숨은 언제나 들이마시기보다, 멈추는 쪽이 쉽다.


그때, 지훈이 아주 낮게 말했다.


“수연 씨.”

“숨은… 멈추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은 배려처럼 들렸다. 동시에, 내 몸의 습관을 이미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둔 사람의 말처럼 들렸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숨은 들어왔지만, 마음은 들어오지 않았다.


내 마음은 아직 복도에 있었다.

금빛이 번져가는 틈 앞에.


그리고 나는 알았다.

남겨진 흔적은, 누군가의 장난으로 남지 않는다.

흔적은 결국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조금씩, 아주 조용히—

같은 편이라는 단어를 입 안에서 굴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