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너머의 숨
밤은 낮보다 정직했다.
낮에는 집이 무엇이든 “그럴듯하게” 숨길 수 있다. 빛이 많을수록 사소한 것들이 정리되어 보이니까. 그러나 밤은 정리해 주지 않는다. 밤은 남겨둔다. 남겨진 것들 사이로 숨소리가 자란다.
그날 저녁, 관리인은 결국 마을로 내려갔다.
파출소에서 사람이 붙는다는 말은 있었지만, 붙는다는 말은 언제나 제시간에 오지 않는다. 관리인은 “금방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다짐처럼 단단했지만, 산속의 길은 다짐을 쉽게 풀어헤친다. 자동차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멀어지자, 집 안의 공기가 곧장 제 자리를 찾았다.
조용함은 다시, 무언의 합의처럼 돌아왔다.
아무 일도 묻지 말자는 합의. 이미 벌어진 일을 이름 붙이지 말자는 약속. 나는 그 약속이 싫었다. 싫어서 더 숨을 조심하게 됐다. 숨을 조심한다는 건, 숨이 들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거실의 시계는 초침이 분명히 움직이는데도 시간이 늘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소파 끝에 앉아 손목의 밴드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하루 종일 그랬다. 손목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수첩의 문장이 내 손등에 붙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나를 만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내 습관을 확인하는 듯한 감각.
지훈은 1층에 없었다.
오후부터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부엌에서도, 복도에서도, 계단에서도—그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집 안에서 사라질 때, 나는 그 사람이 나쁜 일을 하러 간다고 생각하기보다, 집이 그를 “어딘가로” 옮겨 놓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건 합리적이지 않은 믿음이었지만, 이 집에서는 믿음이 먼저 살아남는다.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산의 밤은 도시의 밤과 다르게, 빛을 흡수하는 쪽으로 존재했다. 외등이 켜져도 어둠은 물러서지 않고, 빛을 얇게 눌러 붙여 놓는다. 마당의 나무들이 흔들릴 때마다 잎사귀끼리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종이를 천천히 넘기는 소리 같았다.
종이.
나는 반사적으로 수첩을 보았다.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수첩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대로라는 사실이 오히려 이상했다. 이 집은 “그대로” 두는 법이 없다. 그대로 두었다고 느끼게 만들더라도, 반드시 어딘가 한 모서리를 바꿔 둔다. 내가 그걸 알아차리길 바라면서.
나는 수첩을 열지 않았다.
열면 또 무언가가 추가되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가장 무서운 부분은, ‘추가되었는지 아닌지’ 내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열어 본 순간부터 내 기억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집은 언제나 그렇게 시작한다. 확인하려는 마음을 미끼로 쓰고, 확인한 다음엔 “확인한 사람이 책임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부엌으로 갔다.
물을 끓이려고 했다. 손을 움직이고 싶었다. 손이 움직이면 마음도 잠시 따라오니까. 주전자가 가스레인지 위에 올라갔고, 불꽃이 켜졌다. 파란 불은 얌전하게 흔들렸다. 그 얌전함이 오히려 불안했다. 집 안의 모든 것들이 너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 이 집은 보통 그 정상 속에 작은 틈을 숨겨 둔다.
물이 끓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처음엔 알림음이 아닌 줄 알았다.
어딘가에서 종이끈을 당기는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면이 켜지고, 진동이 손바닥을 때리자 현실이 됐다. 나는 조심스럽게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발신자: 지훈
내가 숨을 멈춘 게 아니라, 숨이 멈췄다.
어떤 순간엔 숨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내 의지로 하는 게 아니라,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숨을 멈추게 하고, 그 멈춘 숨을 보며 반응을 확인하는 듯한 순간.
지훈은 지금 이 집 어딘가에 있을 텐데.
걸어서 한 층만 내려오면 될 텐데. 왜 전화지?
나는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선택은 아주 쉬웠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쉬운 선택이 항상 가능한 선택은 아니다. 이 집에서는, 하지 않은 행동이 더 큰 빚이 되기도 한다. ‘왜 받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이, ‘왜 들여다보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이 된다.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부르고, 결국 나는 스스로를 해명하느라 더 깊게 갇힌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얇았다.
나는 내 목소리가 이렇게 얇다는 걸 몰랐다. 낮엔 두꺼운 말들로 숨길 수 있었는데, 밤은 숨김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지훈의 숨이 들렸다.
말보다 먼저 숨이 들렸다. 짧고, 조심스럽고, 일정한 숨. 숨은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숨을 듣는 걸 싫어한다. 숨을 듣는 순간, 나는 상대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사람이라는 걸 아는 순간, 나는 그 사람을 믿을 준비를 하게 되니까.
“수연 씨.”
그가 내 이름을 말했다.
그 이름은 낮보다 더 오래 내 귓속에 남았다. 이름이 불릴 때마다 나는 ‘불린 사람’이 된다. 불린 사람은 응답해야 한다. 응답하는 순간 관계가 생긴다. 관계가 생기는 순간, 금빛 균열은 더 밝아진다.
“지훈 씨… 어디 계세요?”
내가 묻자, 그는 잠깐 침묵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길지 않아서 더 이상했다. 마치 대답이 이미 준비되어 있는데, 그 대답을 “지금 말해도 되는지” 누군가에게 허락받는 것처럼 보였다.
“1층에 있습니다.”
“그럼 왜—”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그는 내 말을 끊지 않았다.
내가 말을 끝내기 전에, 내 말 끝을 알고 있다는 듯이 다음 문장을 덧붙였다. 그게 그를 무섭게 만들었다. 친절한 사람은 말을 기다린다. 하지만 이 집에선 기다림이 친절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여유가 된다.
“무슨 소리요?”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다.
담담함은 내가 가진 마지막 방어였다. 이 집은 내 방어를 하나씩 뜯어내고 있다. 그러나 아직 전부는 아니다. 아직 나는 나를 완전히 내어 주지 않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숨소리요.”
그 순간, 나는 정말로 숨소리를 들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지훈 씨의 숨과 겹치지 않는, 아주 얇은 숨.
마치 누군가가 전화기 바로 옆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조용히 입을 벌린 채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내 손끝이 차갑게 굳었다.
전화기는 뜨거운 기계인데, 내 손은 얼음처럼 식었다. 온도가 서로 싸우는 느낌이었다. 싸움은 언제나 소리 없이 시작한다. 그러다 어느 쪽이 이기는지 모르는 사이에, 나는 이미 한쪽 편이 된다.
“지훈 씨… 지금 누구랑 같이 계세요?”
나는 그렇게 묻고 나서야, ‘같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같이라는 단어는, 이 집이 좋아하는 단어였다. 두 사람이 한 편이 되는 순간, 세 번째가 반드시 생기기 때문이다. 그 세 번째는 사람일 수도 있고, 집일 수도 있고, 어쩌면—이 집이 훔쳐온 기억일 수도 있다.
지훈은 아주 조용히 말했다.
“아닙니다. 혼자입니다.”
“그런데…”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 습관이 왜 이렇게 빨리 튀어나오는지 싫었다. 낮엔 그 습관을 숨길 수 있었는데, 밤에는 숨기기가 어려웠다. 지훈이 방금 말한 것처럼, 나는 마침표를 늦게 찍는 사람이다. 그 늦은 마침표 사이로 누군가 들어올 수 있다. 이 집은 언제나 그 사이를 노린다.
전화기 너머의 숨소리는 다시 들렸다.
이번엔 더 분명했다.
짧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는 숨.
그 숨은 지훈의 숨과 리듬이 달랐다.
지훈의 숨은 사람이 조절하는 숨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가능한 일정하게 만드는 숨. 그러나 다른 숨은 조절되지 않았다. 조절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있었다. 그냥 존재했다. 존재가 가장 무섭다. 이유가 없는 존재는, 이 집에 딱 어울린다.
“수연 씨.”
지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낮아진 목소리는 위로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낮아짐은 때로 ‘위로’가 아니라 ‘지시’다. 나는 그 차이를 아직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지금, 문을 확인해 주십시오.”
내 몸이 반사적으로 굳었다.
문.
문은 두 번 열리지 않는다.
열지 않는 선택도 하나의 선택이다.
“어떤 문을요?”
“부엌 쪽, 뒷문입니다.”
나는 전화기를 귀에 붙인 채 부엌의 뒷문을 바라봤다.
뒷문은 잠겨 있었다. 잠금장치도 그대로였다. 손잡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잠겨 있다’는 사실이, ‘열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되지는 않는다. 이 집에서 잠금은 안전의 증거가 아니라, 누군가가 ‘열릴 준비’를 해 두었다는 표시처럼 느껴진다.
“잠겨 있어요.”
내가 말하자, 지훈이 잠깐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숨이 들렸고, 동시에—다른 숨이 들렸다.
이번엔 전화기 너머가 아니라, 내 바로 뒤에서 들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돌리면 보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보게 되면, 그걸 ‘봤다’는 기억이 내 것이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집은 내가 본 것을 내 기억으로 남기지 않을 수도 있다. 대신 “내가 본 것”을 누군가의 기억으로 바꿔 버릴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내가 무엇을 본 사람인지도 잊게 된다.
나는 조용히 말하며 손을 문손잡이 쪽으로 옮겼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금속의 차가움이 손바닥에 붙었다. 차가움은 현실을 붙잡는 데 유용했다. 그러나 이번엔 차가움이 너무 선명했다. 마치 누군가가 바로 전에 잡았다가 손을 뗀 것처럼.
“수연 씨, 손잡이를… 돌리지 마십시오.”
지훈 씨가 말했다.
그 말은 늦었다.
아니, 내가 늦게 들었다고 느낀 건지도 모른다. 이 집은 소리의 순서를 바꾸는 법도 알고 있다. 순서가 바뀌면 사람은 자기 행동을 의심한다. 자기 행동을 의심하는 순간 사람은, 더 쉽게 지시에 기대게 된다.
“왜요?”
“지금은, 그 문이 수연 씨 편이 아닙니다.”
그 문장은 이상했다.
문이 편을 가질 수 있는가?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바로 부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집은 이미 내게 편을 강요해 왔기 때문이다. ‘같은 편’이라는 말이 혀 안쪽에서 다시 굴러갔다. 나는 그것을 씹지 못하고 삼켰다. 삼키면 내 안에 남는다. 내 안에 남으면 내 것이 된다. 이것이 가장 완벽한 도둑질이다.
“지훈 씨는 지금 어디에 계세요?”
나는 다시 물었다.
대답을 듣고 싶어서라기보다, 내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고 싶어서였다. 이 집 안에서 사람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은, 내 심장을 단단하게 만드는 몇 안 되는 방법이었다. 사람의 위치가 확정되면, 집의 공포는 아주 잠깐 늦춰진다.
“거실… 아니, 복도입니다.”
그의 대답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그가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도 정확히 확신하지 못해서인 것처럼 들렸다. 그가 확신하지 못하면, 나는 더 확신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그 흔들림은 나를 안심시키기보다 끌어당겼다.
완벽한 사람은 무섭다.
흔들리는 사람은… 위험하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닿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손이 닿는 위험은, 멀리 있는 공포보다 더 현실적이다. 현실적인 건 종종 더 달콤하다. 그 달콤함이야말로 가장 큰 함정이다.
전화기 너머에서 다시 숨이 들렸다.
이번엔 아주 가까웠다.
지훈이 숨을 쉬는 소리와—어떤 다른 숨이, 같은 리듬으로 맞춰졌다. 마치 누군가가 지훈의 숨을 따라 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귀를 떼고 싶었지만, 떼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끊지 못했다.
전화를 끊는 순간, 나는 혼자가 된다. 그리고 지훈이 말했듯이, 이 집에서는 혼자만 흔들리는 사람은 없지만—혼자만 남겨지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지훈 씨.”
내 목소리가 아주 작아졌다.
작아진 목소리는 보호가 아니라, 항복에 가까웠다. 나는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옆에서 숨 쉬는 사람, 정말 없어요?”
지훈 씨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수연 씨, 그 소리를 지금도 듣고 계십니까?”
“네.”
“그럼… 수연 씨 쪽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기 너머의 숨이 멈췄다.
멈추는 쪽이 쉬운 숨.
아까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문장처럼.
숨이 멈추면, 모든 것이 잠깐 정지한다.
숨이 멈춘 순간, 나는 더 크게 들었다. 바깥의 어둠, 나무들의 마찰, 집의 낡은 나무 바닥이 가라앉는 소리. 그리고—내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내 숨이 이렇게 큰 줄 몰랐다.
내 숨은 이 집에서 너무 큰 소리였다. 이 집은 내 숨을 먹고 사는 것 같았다. 내 불안이 진동이 되어 벽을 타고 올라가고, 금빛 균열이 그 진동을 반짝임으로 바꾸는 것 같았다.
“지훈 씨, 저… 지금…”
내가 말하려는 순간, 전화기 너머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숨도 아니고, 말도 아니고—마치 혀가 입천장을 스치는 듯한 소리.
사람이 말하기 전에 내는 준비 소리.
그런데 그 소리는 지훈 씨가 내는 소리와 다르게, 너무 가까웠다.
그리고 그 다음, 분명히 들렸다.
세 번째 숨.
이번엔 “둘”이 아니라 “셋”이었다.
지훈의 숨이 있고, 내 숨이 있고, 그 사이에 끼어드는 숨.
그 숨은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면서도, 동시에 내 귓바퀴 안쪽에서 울렸다. 위치가 하나로 고정되지 않았다. 이 집이 좋아하는 방식이다. 위치가 고정되지 않으면, 사람은 무엇을 탓해야 할지 몰라진다. 무엇을 탓해야 할지 모르면, 결국 자기 자신을 탓하게 된다.
“수연 씨.”
지훈이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그가 이렇게 자주 내 이름을 부르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면 사람은 자신이 ‘불리는 대상’이라는 걸 기억한다. 대상이 되면 스스로를 지키기 어려워진다. 대상은 보통, 누군가의 손 안에서 움직이니까.
“지금, 제 방으로 오실 수 있습니까?”
나는 그 말에 즉각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방.
그의 방.
그 말이 가진 의미가 너무 분명해서.
그런데 동시에, 이상하게도 몸이 먼저 반응하려고 했다.
위험을 아는 몸이, 안전을 선택하는 대신 더 큰 위험으로 도망치려는 느낌. 도망은 종종, 더 깊은 곳으로 달아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왜요?”
내가 묻자, 지훈이 아주 짧게 말했다.
“수연 씨가 혼자 계시면, 그 숨이 더 가까워집니다.”
그 말은 협박이 아니었다.
설명처럼 들렸다.
그게 더 무서웠다. 설명은 사실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어둠이 더 짙어지는 게 아니라, 어둠이 “안쪽으로” 들어온다. 나는 내 눈꺼풀 안쪽에서 금빛을 봤다. 금빛 균열이 벽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번지는 것처럼. 틈이 집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도 있다는 증거처럼.
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지훈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두 겹으로 겹쳐졌다.
마치 누군가가 지훈 씨의 말투를 따라 하며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짧은 순간이야말로, 도망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긴 순간은 ‘착각’으로 처리할 수 있지만, 짧은 순간은 ‘실수’로 기억된다. 이 집은 늘 실수를 남긴다. 내가 나중에 부정하지 못하도록.
“수연 씨.”
두 겹의 목소리가 겹쳐진 채, 내 이름이 다시 불렸다.
그리고 끊겼다.
전화가 끊긴 게 아니라, 끊어졌다.
자연스럽게 종료되는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줄을 자른 것처럼, 갑자기. 화면엔 통화 종료가 떴고, 손바닥엔 진동이 한 번 더 남았다. 마지막 진동은 마치 “지금부터가 시작이다”라고 알려 주는 신호 같았다.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부엌의 뒷문 앞에서.
문손잡이에 손을 얹지도, 떼지도 못한 채로.
내 뒤에서, 아주 얇게—숨이 들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돌리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내가 돌아보는 동안 무언가가 자리를 옮길 것 같았다. 돌아보기 전에 이미 사라져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내가 본 건 무엇이 되는가. 내가 본 것이 사라지면, 내 기억도 사라지는가. 아니면 내 기억만 남아서, 나를 미치게 만드는가.
거실 쪽은 어두웠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어두웠다. 불빛은 벽에 닿기 전에 어딘가에 흡수된 것 같았다. 금빛 균열이 그 흡수된 빛을 대신 반짝이고 있었다. 균열이 점점 더 “길”처럼 보였다. 틈이 아니라 길. 누군가를 데려가는 길.
나는 거실로 한 걸음 나갔다.
발밑에서 바닥이 아주 작게 울렸다. 집이 내 걸음을 기억하는 소리였다.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셋에서 멈추는 습관이 떠올랐다. 하나, 둘—셋.
셋에서 멈추는 순간, 복도 끝에서 아주 조용한 소리가 났다.
문이 “완전히” 열리는 소리도, “완전히” 닫히는 소리도 아니었다.
문이 숨을 쉬는 소리.
문이 스스로 틈을 만들었다가, 다시 틈을 닫는 소리.
나는 숨을 들이마시지 못했다.
들여마시면 내 숨이 너무 크게 들릴까 봐.
내 숨이 이 집의 귀에 붙을까 봐.
그때, 복도 끝에서 누군가가 아주 낮게 말했다.
“수연 씨.”
지훈의 목소리였다.
분명히 그 목소리였다.
그런데 나는, 그 목소리가 한 사람의 목에서 나온 소리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실루엣이 조금씩 드러났다.
그는 천천히 걸어왔다. 빠르지 않았다. 급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이쪽으로 올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또는—내가 “오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난 발이 카펫의 끝에 걸렸다. 카펫 끝. 틈.
사소한 걸림 하나가 몸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마음의 균형도 함께 흔들린다. 이 집은 그런 연쇄를 잘 안다.
지훈이 내 앞에 멈췄다.
너무 가까이 오지 않았다.
손이 닿지 않게, 그러나 닿을 수 있을 만큼만.
“전화… 방금…”
내가 말을 꺼내자, 그는 아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들었습니다.”
“뭘요?”
내가 묻는 순간, 내 목소리가 떨렸다.
떨림은 들키는 것보다 더 치명적이다. 떨림은 내가 이미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준다. 상대가 나를 잡을 수 있게 한다.
지훈은 낮게 말했다.
“제 숨 말고… 다른 숨.”
그는 내 손을 보았다.
문손잡이를 잡으려다 멈춘 내 손. 손가락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그는 그걸 보고 아주 짧게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내 습관을 확인하듯이. 내 몸의 반응을 기록하듯이.
그 순간, 나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이 지금 나를 보호하는 걸까.’
‘아니면… 이 사람이 나를 더 정확히 읽기 위해 이 집과 같은 방식으로 나를 흔드는 걸까.’
두 생각은 서로 반대여야 했다.
그런데 이 집에서는 반대가 반대가 아니다.
반대는 종종 같은 모양을 하고, 다른 이름을 달고 다닌다.
지훈이 아주 낮게 말했다.
“수연 씨, 지금부터… 혼자 확인하지 마십시오.”
그 말은 부탁처럼 들렸다.
그러나 부탁은 보통 상대에게 선택지를 준다.
그의 말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선택지가 없는 부탁은 사실상 규칙이다. 규칙은 관계를 만든다. 규칙이 생기면, 누군가는 규칙을 지키는 쪽이 되고, 누군가는 지키지 못하는 쪽이 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편이 갈린다.
나는 지훈의 눈을 보았다.
그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는 눈은 안심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공포를 준다. 나를 포함한 무엇인가가 이미 결정되어 있고, 나는 그 결정된 길 위에서 발만 옮기고 있다는 느낌.
그때, 멀리서 또 숨이 들렸다.
복도 깊은 곳, 금빛 균열이 길처럼 늘어진 쪽에서.
이번엔 전화기 너머가 아니었다.
집 안이었다.
분명히 집 안의 공기 속이었다.
지훈이 아주 작게, 거의 들리지 않게 말했다.
“들리시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하면, 이 공포를 인정하게 되니까.
인정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니까.
그러나 이미 넘어가 있었다.
숨은 이미 내 귀에 닿았고, 내 피부에 닿았고, 내 마음의 경계에 닿아 있었다.
지훈이 내 쪽으로 반 걸음 다가왔다.
손이 닿지 않게, 그러나 닿을 수 있을 만큼만.
그 거리는 여전히 위험했다.
그 위험이 이상하게도… ‘익숙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걸 느꼈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아주 작게 속으로 말했다.
‘이건 내가 고르는 게 아니야.’
‘이 집이 밀어 넣는 거야.’
그런데 속으로 말하는 순간, 더 무서운 생각이 이어졌다.
‘그럼… 내가 밀리는 방향이, 정말 우연일까.’
지훈이 낮게 말했다.
“수연 씨.”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집은 그 조용함에 맞춰 숨을 멈췄다.
멈추는 쪽이 쉬운 숨.
그러나 멈춘 숨은 결국, 한 번 크게 들이마시게 만든다.
“지금, 제 쪽으로 오십시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이 집은 오래 버티는 사람을 싫어한다. 오래 버티는 사람은 스스로의 경계를 지키기 때문이다.
금빛 균열이 복도 벽에서 한 번 더 번뜩였다.
번뜩임은 신호 같았다.
‘여기까지’라는 신호.
‘이제부터’라는 신호.
나는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숨은 들어왔지만 마음은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은 여전히 전화기 너머에 남아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세 번째 숨이 웃고 있는 듯한 그 지점에.
그리고 나는 알았다.
오늘 밤, 이 집이 훔치려는 건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누가 누구를 믿는지.
누가 누구를 “확인”하게 되는지.
그 경계의 방향이다.
그 경계가 한 번만 기울어도, 사람은 다음부터는 스스로 기울어진 쪽을 ‘익숙함’이라고 부르게 된다.
나는 그게 무서웠다.
무서워서—움직였다.
지훈 쪽으로.
아주 조용히.
마치 내가 선택한 것처럼.
그날 밤, 나는 지훈의 저택을 떠났다.
정확히 말하면, 몸은 나왔지만 감각은 그대로 남겨두고 온 기분이었다. 문을 닫는 소리보다, 닫히지 않은 생각들이 더 오래 따라왔다.
차 안에서 라디오를 켜지 않았다. 소리가 들어오면 무언가가 확정될 것 같아서. 대신 창밖의 어둠이 흘러가게 두었다. 어둠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익숙했지만, 익숙함이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현관 앞에 섰을 때,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이 문을 열면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제자리에 돌아온 척을 하게 될까.
문을 열자 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나를 맞았다.
너무 완벽해서—의심할 틈조차 주지 않는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