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무엇을 고치면 나아질 수 있는지.
질문은 지적인 행위처럼 보이지만,
사실 질문에는 두 종류가 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던지는 질문과
스스로를 가두기 위해 반복하는 질문.
나는 오랫동안 후자에 가까운 질문을 붙들고 있었다.
사람은 이해하면 견딜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고통을 만나면 곧장 원인을 찾으려 한다.
이유가 있으면 통제할 수 있을 것 같고,
통제할 수 있으면 다시는 아프지 않을 것 같아서.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모든 고통이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어떤 감정은 원인을 밝혀도 사라지지 않고,
어떤 상처는 이해하는 순간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렸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
무능하거나 나약한 상태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서도
억지로 의미를 만들어 붙였다.
마치 빈 상자에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만
그 상자가 존재할 자격을 얻는 것처럼.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의미는
대부분 오래 버티지 못했다.
논리적으로는 맞아 보였지만
몸은 납득하지 않았고,
마음은 계속 다른 방향으로 울렸다.
그때 깨달았다.
문제는 이해의 부족이 아니라
허용의 부재였다는 것을.
우리는 감정이 생기면 곧바로
“그래도 이러면 안 되지”라는 말을 붙인다.
슬퍼도 이유가 있어야 하고,
화가 나도 정당해야 하고,
포기하고 싶어도 합리적이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감정은
존재하기 전에 심사를 받는다.
통과하면 남고,
통과하지 못하면 밀려난다.
하지만 밀려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피로로, 무기력으로,
혹은 이유 없는 짜증으로.
나는 어느 날,
아무 설명 없이 우울한 오후를 보냈다.
특별히 나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앞날이 갑자기 어두워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고
그 상태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 이유를 끝까지 파헤쳤을 것이다.
과거를 들추고,
관계를 복기하고,
나 자신을 심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나는 그 상태를
“그렇구나” 하고 두었다.
해결하지도, 정리하지도,
좋은 말로 덮지도 않았다.
신기하게도
그 우울은 예전보다 훨씬 조용했다.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나를 끌고 바닥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
마치 인정받은 손님처럼
잠시 머물다 스스로 나갈 준비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때 알았다.
감정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대우의 문제라는 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같은 감정도 폭력이 될 수 있고
휴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삶도 비슷하다.
우리는 자꾸 삶을
설계하고 관리하고 최적화하려 한다.
잘 살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그 안에는 종종 두려움이 숨어 있다.
예측하지 못하는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마음.
그러나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대부분 계획 밖에서 일어난다.
우연히 만난 사람,
뜻밖의 실패,
준비되지 않은 선택.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낸다.
완벽한 준비 덕분이 아니라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버틸 수 있는 능력 덕분에.
나는 이제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보다
“지금 이 상태도 허용해도 된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더 자주 건넨다.
그 말은 희망적이지도,
용감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나를 가장 오래 지탱해 준다.
삶은 언제나
이해보다 먼저 지나간다.
모든 것을 납득한 뒤에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납득하지 못한 채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배우는 과정에 가깝다.
나는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
앞으로 무엇이 나를 흔들지,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지 확신도 없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모르는 상태로도
사람은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자신을 버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정도의 믿음이면
오늘을 건너기에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