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의 서곡24

너무 평온한 것의 공포

by 은서의 숨겨진 책



아침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이 집의 아침은 늘 그렇듯, 어젯밤의 일들을 전부 없던 것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찾아왔다. 정리된 식탁, 흠집 없는 유리잔, 햇빛이 잘 드는 창. 모든 것이 정확히 제자리에 있었고, 그래서 더 의심스러웠다. 무언가가 지워진 흔적은 언제나 ‘완벽함’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나는 계단을 내려오며 발소리를 의식했다. 소리를 크게 내면 집이 반응할까 봐, 너무 조용히 움직이면 내가 사라질까 봐—그 사이 어딘가의 속도로. 복도의 공기는 어제보다 한 톤 밝았고, 벽면의 금빛 균열은 낮은 빛 속에서 잠잠했다. 밤에 보던 날카로움은 접힌 채, 마치 스스로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주방에 들어서자 현우가 있었다.

셔츠 소매를 단정히 걷어 올리고,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물이 끓는 소리는 정확했고, 그의 동작은 늘 그랬듯 과하지 않았다. 모든 게 너무 안정적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 미소를 지었다. 질문도, 확인도 없는 미소. ‘아무 일도 없었다’는 전제가 그 미소에 깔려 있었다.


“잘 잤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보다 빠르게 몸이 반응했다. 이 집에서는 말이 늦는다. 감각이 먼저 오고, 언어는 항상 뒤처진다. 컵에 커피가 채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왜 나는 이 평온 앞에서 안도하지 못할까. 왜 이 사람이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이 이렇게 불안할까.


현우는 늘 이렇게 평온했다.

갈등을 정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애초에 갈등을 만들지 않는 사람처럼. 그는 감정을 접어 두는 데 능숙했고, 접힌 감정의 두께를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그게 그의 장점이었고, 내가 사랑했다고 믿었던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은—그 평온이 나를 조용히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컵을 들고 창가에 섰다. 산은 어제의 비를 기억하지 않는 얼굴로 서 있었다. 모든 것이 회복된 풍경. 회복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잔인하다. 상처가 있었음을 증명할 방법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게 보였다. 눈 밑의 그림자가 아주 조금 짙어졌을 뿐인데, 그 작은 변화가 나를 배신자처럼 보이게 했다.


어젯밤의 대화가 떠올랐다. 말로 끝나지 않은 문장들, 침묵으로 이어진 문장들. 지훈의 목소리는 아직도 귀 안쪽에 남아 있었다. 그는 기억을 정확히 건드리는 사람이었다. 내가 잊었다고 생각한 말버릇, 내가 혼자 있을 때만 쓰던 표현들. 그가 그것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위험했다. 친밀함은 언제나 불쾌함과 같은 문으로 들어온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이 사람 앞에서는 죄책감이 나를 흥분시키지?

문장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스스로를 놀라게 했다. 흥분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쉽게 떠오르다니. 그것은 욕망이 아니라 긴장이었다. 금지된 감정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떨림. 선을 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선의 존재를 또렷하게 만드는, 그 역설적인 상태.


현우가 뒤에서 말했다.

“오늘은 햇빛이 좋네.”


아무 의미 없는 문장. 그래서 더 정확한 문장. 그는 늘 이런 식으로 현재에 머물렀다. 어제를 묻지 않고, 내일을 재촉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태도. 하지만 나는 지금 그 태도가 숨 막혔다. 그의 평온은 나에게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죄를 고백할 틈도, 변명할 틈도 없이—이미 용서된 사람처럼 만들어버렸다.


나는 돌아서서 그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균열이 없었다. 적어도 내가 볼 수 있는 곳에는.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 집의 금빛 균열은,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감정만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 현우처럼 완벽하게 감정을 봉인한 사람에게는 반응하지 않는—나 같은 사람만을 선택하는.


그 생각은 나를 오싹하게 했다.


“오늘 뭐 할 계획이야?”

그의 질문은 부드러웠다. 너무 부드러워서, 칼날처럼 느껴졌다. 계획. 나는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 집에서는 계획이 자주 무너진다. 아니, 계획이라는 개념 자체가 균열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존댓말이 입에 붙어 나왔다. 거리를 만들기 위한 습관. 그는 눈치채지 못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정말로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더 문제였다.


식탁 위에 햇빛이 길게 늘어졌다. 빛은 균열을 피해서 지나갔다. 의도적인 것처럼. 나는 그 장면을 보며 확신했다. 이 집은 숨긴다. 그리고 선택한다.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잠재울지. 어젯밤의 숨소리, 전화기 너머의 낯선 기척, 복도 끝에서 느꼈던 시선—그 모든 것이 낮에는 증발한다.


하지만 증발한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형태를 바꿔,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을 뿐이다.


나는 컵을 내려놓았다. 커피는 아직 따뜻했다. 이 온기가 불길했다. 모든 것이 정상이라는 신호처럼 느껴져서. 현우의 평온, 집의 침묵, 산의 무심함. 이 조합 속에서—나만이 어긋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어긋남이 싫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죄책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어제와는 다른 색이었다. 두려움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생동감이 섞여 있었다. 살아 있다는 감각. 위험한 방향으로 기울어진 생동감.


나는 알았다.

이 평온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너무 평온한 것은, 언제나 무너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가 오면—

나는 과연 어디에 서 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