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 삶을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부터 오해하기 시작한다.
나는 한때 과거를 정리하면 현재가 맑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억을 배열하고, 원인을 추적하고, 사건을 설명하면
내 안의 혼란도 자연스럽게 질서를 찾을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자주 되돌아갔다.
그날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침묵했는지,
왜 도망쳤는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과거를 오래 들여다볼수록
그때의 나는 점점 낯선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를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심판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약했는지,
왜 그렇게 미숙했는지.
이해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판결문에 가까웠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는 과거를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수정하려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미 끝난 장면을
현재의 기준으로 다시 재단하고
더 나은 선택을 했어야 한다고 되짚는다.
그러나 과거의 나는
그때 가진 감정과 그때 가진 두려움 안에서
이미 최선을 다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사람은 항상
그 순간의 자신으로밖에 살 수 없다.
미래의 통찰을 빌려 과거를 판단하는 일은
결국 자기 자신을 반복해서 부정하는 일이다.
나는 오랫동안
“더 나은 나”가 되면
이전의 나를 용서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성숙해지고, 단단해지고,
흔들리지 않게 되면
과거의 실수쯤은 웃어넘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성숙은
과거를 삭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과거를 안고도 서 있는 능력에 가까웠다.
우리는 흔히
강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강해진다는 것은
아무것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흔들려도 자신을 버리지 않는 상태다.
실패한 날에도
나는 여전히 나이고,
부끄러운 선택을 했던 순간에도
나는 나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나는 오래 걸렸다.
인간은 종종
자신을 조건부로 사랑한다.
잘했을 때만,
인정받았을 때만,
흔들리지 않았을 때만.
하지만 조건은
늘 늘어난다.
오늘의 기준을 넘으면
내일은 더 높은 기준이 기다린다.
결국 나는
언제나 미달인 상태로 남는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질문을 바꿔 보았다.
“왜 그랬을까?” 대신
“그때 나는 무엇이 두려웠을까?”
그 질문은
비난보다 부드럽고
설명보다 깊었다.
두려움은 사람을 비겁하게 만들기도 하고
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두려움이 없었다면
나는 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선택은 잘못이었을지 몰라도
두려움은 진짜였다.
그 진짜를 인정하는 순간
과거의 나는 조금 덜 미워졌다.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끊어내려 한다.
실수한 나, 질투한 나, 도망친 나.
그러나 잘라낸다고 사라지는 것은 없다.
잘려나간 부분은
그림자가 되어 따라온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덜어내는 일이 아니라
통합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인생은 점점 나아지는 직선이 아니라
점점 넓어지는 원에 가깝다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동시에 그 안에 존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
통찰은
무언가를 새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비로소 받아들이는 순간에 가깝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완벽해져야만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람은 이해되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부분까지 포함해서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소중하다.
나는 오늘도
내 안의 모순을 없애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 모순을 이유로
나를 지워버리지는 않으려 한다.
어쩌면 성장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을 덜 미워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변화라면
아주 느리게 와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