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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군가의 일기장 Jan 24. 2023

나의숲 2화

소설

타박타박- 촉촉이 젖은 밤 10시 12분. 포장된 산책길 옆에 이슬 머금 나뭇잎과 풀들이 일렬로 서있다. 마치 어제 비가 내린 듯이 흙바닥은 이불처럼 푹신 거렸다. 현경은 몇 미터 간격으로 나란히 비추고 있는 가로등 아래를 달리며 유산소운동을 하였다.


현경_ 아... 후..(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현경은 휴대폰을 꺼내 오늘의 할 일 리스트를 확인했. 텅 비어있는 달력에 유일하게 적힌 것은  '5km 달리기'이다. 하나만 쓰인 항목에 체크하며 나무의자에 앉아 숨을 고렸다.

'고등학생 때는 달력이 너덜 해질 만큼 글자들이 빼곡했었는데 아직은 첫 수업도 시작하지 않아서 무엇으로 채워질지 모르겠어, 언젠가 종이달력처럼 지금 할 일 리스트도 허름해지는 날이 오겠지'

그리고 그때의 달력은 분명 나를 닮아있을 것이다. 수능을 준비하는 비슷한 수험생의 모습이 아니라 오늘 할 일을 하나하나 신중히 골라서 일정만 봐도 나를 떠올릴 수 있는 그런 달력. 어느새 어른에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현경은 괜히 뿌듯해졌다.

 피톤치드를 뿜어서 그런 것인가. 잠시 앉아 있는 순간에도 마음이 편안해졌. 돌담 위에 놓여있는 대학 산책로는 침엽수와 벚꽃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아래에는 작은 도랑이 흐르고 있었다. 밤하늘이라는 이불속에 숨어있는 아이처럼 현경은 몸을 기대어 팔다리를 뻗었다. 숨을 마시고 내쉬며 노곤하게 반쯤 잠에 들려는 찰나 발아래로 작은 나뭇가지와 먼지들이 굴러오고 가운 온도를 녹이 포근한 바람이 오랜 친구를 만난 듯이 몸을 감쌌. 다소 이질적인 느낌에 천천히 눈을 떠보니 나뭇잎들이 우주공간에 있듯 공중에 머물러있었다. 현경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중력이라는 것이 사라진 듯 모든 물체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공기가 향하는 곳을 쳐다보니  나지막하게 흰색 덩어리가 보였다. 큰 나무의  부서질듯한 잔가지에 앉아있는 흰색 강아지(?). 안개처럼 가벼운지 밝은 표정으로 태연하게 앉아 현경을 쳐다보고있었다

현경은 알 수 없는 형체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낭떠러지 앞의 난간으로 갔다.

'저게.. 뭐지..?'

실눈을 뜨며 쳐다 본 멀리있는 흰색 물체는 몽실몽실한 게 구름을 떼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물에 넣으면 사르르 녹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입에는 작은 종이조각 같은 걸 물고 있었다. 바람은 서서히 흰색 물체에서 현경에게 불어왔고 그 공기에서는 어디서 맡아본 듯한 익숙한 향을 내며 강아지의 똘망한 눈에서는 오랜 반가움과 아련함이 느껴졌다. 입에 물고 있던 종이조각은 먼지들과 함께 나비처럼 날아와 두 손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무 위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현경이 덩그러니 서있는 산책길에는 다시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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