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서의 축구의 의미, 그리고 이를 대하는 자세
이번주에 드디어 스웨덴 남부에도 첫눈이 왔다. 보통 스웨덴이라고 하면 끝도 없이 긴 겨울, 그리고 새하얗게 눈이 내린 풍경을 상상할 지 모르지만 사실 스웨덴 남부 지역은 그렇게 춥지 않다. 위도는 높아도 난류 덕분에 겨울에도 영하 5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이 많지 않다. 그렇다보니 위도 덕분에 여름과 겨울의 일조량 차이는 엄청나지만, 생각보다 온도 차이는 그렇게 심하지 않은 환경이 조성된다. 11월 말인 지금, 며칠간은 눈보라가 치며 오후에도 영하의 추위를 기록하다가 다시 영상 5도 가량을 회복해, 패딩 점퍼를 살지 말지를 고민하게 하는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
첫눈이 온 이 시기에 뜬금없이, 카타르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경기장의 선수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경기장이 전혀 춥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창밖엔 흰 눈이 펄펄 날리고 있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2월이 다 된 겨울에 월드컵을 개막한다는 점도 낯설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웨덴에서 월드컵을 지나게 된 것 역시 낯선 경험이다.
우선, 스웨덴은 2022년 월드컵 진출에 실패했다. 현재 스웨덴의 피파 랭킹은 25위로, 일본, 폴란드 등과 비슷한 수준이다. 재밌는 점은 스웨덴 여자 축구는 세계 최고 팀인 미국을 바짝 추격하는 2위라는 점이다. 터프한 바이킹의 후예인 여성들이 샛노란 스웨덴 축구 유니폼을 입고 샛노란 금발 머리를 뒤로 바짝 당겨 묶은 채 거세게 승리를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 카타르시스조차 느껴진다. 세계 2위 수준의 강국이다보니, 당연히 2023년 호주 & 뉴질랜드 여성 월드컵 진출 티켓은 일찌감치 획득했다.
스웨덴에는 대략 2,900개의 축구팀/조합, 그리고 30만명이 넘는 선수가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프로팀만 따지면 대략 1부리그(Superettan) 에서 5부리그 (Division 3)에 해당하는 수준별로 15-20개의 팀이 등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인구 1천만의 나라에서, 대략 100개의 팀이 프로로서 뛰고 있다는 뜻이다. 축구에 관해 잘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규모라는 건 예상할 수 있다. (스웨덴에서 인기가 많은 스포츠 중 하나인 아이스하키의 경우 지역별로 1-2개의 팀이 있어, 총 40개 가량의 팀이 등록되어 있다. 마침 지금이 하키 시즌이다!) 이토록 축구를 즐기는 인구가 많은, 게다가 축구를 사랑해 마지않는 유럽의 이웃들에게 둘러싸인 국가에서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많은 이들이 입에 쓴맛을 느끼며 이웃나라 덴마크를 포함한 다른 국가들이 공을 차는 모습을 보고 부들대고 있지는 않을까?
물론 축구를 사랑하는 팬들의 마음이야 다르겠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꽤나 잠잠하다. 폴란드에 2:0으로 패배하여 본선 진출 실패가 결정났을 때에도 그랬고, 월드컵이 진행중인 지금도 그렇다. *그러고보니 작년 폴란드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골을 넣은 선수 Lewandowski의 이름이 펍 퀴즈에 아나그램 문제로 등장했던 기억이 난다.) 축구가 종교와도 다름없던 아르헨티나, 그리고 오늘 한국과 매치를 하는 우루과이에서 살았을 때의 경험과 너무 달라 놀랍다. 두 국가는 축구 실력 자체도 뛰어나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남달라 월드컵 및 코파아메리카 등에서 어떤 결과를 내느냐에 따라 집에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마저 있는 곳이다. 경기 내에서의 실책, 인터뷰에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주요 일간지 대문에 대서특필되고,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모든 펍이 꽉꽉 들어찬다. 어딜 가든 축구 얘기 뿐이고, 온 건물과 동네 전체가 탄성과 환호로 가득차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보카 주니어스 등의 유명 축구팀이 원정 경기를 하러 오는 날이면 이러다 무슨 일이 나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메우고 서로를 무등 태워 행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경험 후에 스웨덴에 와서 월드컵을 겪게 되니, 똑같이 축구 리그가 활성화 되어있고 축구에 대한 사랑이 큰 나라임에도 이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를 느끼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스웨덴에서도 지역 대표팀간의 매치가 열리면 승패에 따라 지나치게 흥분한 열성 팬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잠실 주경기장과 비슷한 경기장 근처에 살면 시즌 동안에는 주말마다 각 팀의 축구 응원가를 섭렵할 수 있게 된다. 경기가 끝나고 쏟아져 나오는 흥분한 인파는 덤이다. 그러나 그들이 보행자 전용 도로에서 딱 세 줄로 줄을 서서 트램 혹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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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열정적인 축구 문화도, 한국의 치맥 등의 배달 음식과 함께 하는 관전 문화도, 스웨덴의 질서와 안정을 중시하는 문화도 각기 장점이 있다. 물론 지역이나 문화에 따라 관람 문화를 한가지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이곳에도 술에 취해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훌리건은 있고, 남미에도 축구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질서 정연하게 관람하는 관객들이 있다. 똑같이 스포츠를 사랑하더라도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지만 나는 다양한 대륙에 살아본 결과, 인간은 서로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문화권에 살면서 그곳에 가장 잘 녹아들 수 있는 형태로 발현되는 것일 뿐, 중남미에도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내향적인 사람이 많고, 스웨덴에도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인싸'들이 분명 있다. 내년, 스웨덴 여성 축구팀이 활약을 펼칠 여성 월드컵 대회가 열릴 때 얌전하게만 보였던 스웨덴 인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될 지도 모를 일이다. 강력한 우승 후보인 스웨덴의 경기력, 그리고 이를 대하는 스웨덴 사람들이 자세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무척 기대된다.
커버 이미지 출처: https://www.svenskfotboll.se/nyheter/landslag/2022/04/dam-swe-i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