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문 닫았다구요?
나는 어릴적부터 스스로를 야행성 동물이라 지칭해왔다. 새벽 한시 정도는 넘겨줘야 비로소 뇌가 깨어나고, 세상이 조용해져 집중해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 긴 하루를 견디고 야간 자율학습이나 학원에서 풀려나면 몸은 피곤해도 어둡고 조용한 밤과 새벽 사이의 시간을 즐기느라 다음날 등교할 생각은 잊고 새벽 세시, 네시까지 라디오를 들으며 소설을 읽거나 일기를 썼다. 대학에 가자 더 좋았다. 고등학교때처럼 8시에 등교하지 않아도 되고, 정말 피곤하면 하루 정도는 수업을 소위 '째도' 된다니. 모두가 수업이 끝나는 6시 이후가 모든 재밌는 일들이 시작되는 시간이었으며, 친구들과 함께 술기운에 붉은 볼을 하고 추운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도 일종의 낭만이었다. 하지만 직장인이 되자 다시 7시도 더 전에 일어나야 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남들은 미라클모닝이니 뭐니를 하며 새벽 5시에 일어나 어학 공부도 하고 운동을 한 후에 출근을 한다는데, 그건 도저히 어떻게 하는건지. 회사에 최대한 가까운 곳에 살면서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비싼 돈을 주고 산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린 커피를 혈관에 주입해가면서야 겨우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8시 정각에 시작하는 스탠드업 미팅에서는 이미 그날이 두번째 커피를 마시면서 붕어눈을 하고 동료들의 업무 브리핑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다가 밤만 되면 왜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공부를 하고 싶고, 온라인 강의를 듣고 싶고, 피아노를 치고 싶어지는지. 밖에서 놀다 보면 왜 12시가 넘어야 제일 재밌어지는 건지! 그래서 오후에 퇴근하고 낮잠을 잔 뒤 밤에 소설을 쓰곤 했다던 작가 카프카가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자 롤모델이었다.
성인이 되고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러는 사이 나도, 그리고 세상도 바뀌었다. 정해진 하나의 답은 없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이제는 더이상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눈뜨기 힘들어하는 것이 젊은이의 미덕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항상 내가 게으른 게 아니라 그저 아침형 인간이 아닐 뿐이라고 주장하며, 그래도 지각을 하지 않고 할 일은 다 하는게 얼마나 대단하냐고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살았는데, 이제는 이런 야행성 인간의 변론이 잘 먹히지 않는 것 같다. 사회적으로도,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그렇다. 이제는 적절한 수면 패턴의 중요성을 알고, 내가 고요한 새벽 시간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내 몸은 어두운 밤에 깨어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한다. 늙으면 아침잠이 없어진다는데, 그런 말을 할 정도의 나이는 아님에도 확실히 밤에 깨어있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할만 해진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수면에 대한 나의 생각이 바뀐 데에는, 일년 내내 해가 부족할 수가 없는 열대의 파나마에 살다가 태양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스웨덴에 와서 사는 것이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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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겨울은 밤이 길다. 1년 중 가장 어두운 시기에는 오후 3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해는 구경도 할 수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밖을 봐도 여전히 어둡고, 그나마 해가 떠있는 점심 시간을 놓치면 다음날 오전까지 태양은 커녕 하늘이 무슨 색인지도 모르는 채 몇날 며칠을 보내게 된다. 해가 떠있는 시간이라도 날씨가 흐리면 한달 내내 회색 아니면 검은색 하늘만 볼 수도 있다. 고정된 일정이 있어 학교나 직장에 나가 밝은 공간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좀 낫지만, 우울증에 걸리기 딱 좋은 계절이다. 어릴 적의 나라면 이 길고 긴 밤을 세상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어쩌면 그 긴 긴 밤을 지나며 책을 한 권 써냈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나에게 이 무지막지하게 긴 밤은 지겹고 두려운 대상이다. 15시간쯤 되는 밤을 견디기 위해 최대한 어두운 방에 혼자 있는 대신, 밖에 나가 사람을 만나고 아늑한 장소를 찾으려 해봤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게 있었으니...
스웨덴에는 24시간 운영하는 카페가 없다. 당연하다. 스웨덴의 러시아워는 5시다. 스웨덴의 회식은 아무리 늦어도 8시면 끝난다. 스웨덴의 스타벅스라 불리는 에스프레소 하우스 조차 7시 아니면 8시면 문을 닫는다. 가장 늦게까지 연다는 도서관이나 대학 건물도 10시면 문을 닫는다. 밤새서 과제를 하는 학생들이 가끔 있기야 하겠지만, 우선 밤을 새는 게 일반적인 문화가 아니고, 야간 근무를 하는 특정 직종이 아닌 이상 직장인이 6시 이후에 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한국처럼 퇴근 후 영어 학원에 갔다가 카페에 들러 친구를 만나거나 혼자 공부를 하는 등의 일과는 상상하기 어렵다. 저녁 6시 이후에는 길거리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다. 레스토랑이나 펍이야 새벽까지도 영업을 하지만 매일 밤 술을 마시러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스웨덴의 저녁 시간은 일반적으로 모두가 집에서 가족과 (혹은 혼자서) 보내는 시간으로 암묵적 합의가 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가게 몇 군데가 문을 일찍 닫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시의 밤거리는 사실 얼마나 많은 가게가 문을 열었는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에 -이동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트래픽을 형성하는 지에 따라 그 미관과 매력, 그리고 때로는 안전 여부가 결정된다. 스웨덴에서 밤거리에서 볼 수 있는 불빛은 거리의 가로등, 그리고 남의 가정집에서 친절하게도 창가에 켜둔 램프 등이 전부다. 대도시에서도 오후 6시 정도가 지나면 러시아워가 끝나고 도로가 제법 한산하다. 예테보리 정도의 대도시는 그래도 시내 중심부에서 나름 활기찬 거리를 찾을 수 있지만, 퇴근 후 저녁을 사먹은 후 커피 한잔을 하고 쇼핑을 하는 등의 활동을 즐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에 대해 불평 아닌 불평을 스웨덴 친구들에게 했더니,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너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 안 가봤냐며 묻는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놀러가면 아예 문을 닫은 가게 천지에, 공항이나 보건센터 등의 필수 시설도 단축 근무를 하는 경우가 많아 곤욕스러웠다며 혀를 내두른다. 알고 보니 스웨덴은 유럽 국가들 중에는 저녁과 주말, 그리고 연휴 기간에도 상점과 공공기관이 정상 영업을 하는 비율이 높은 편이라고 한다. 7/11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당연하게도 24시간 영업을 하는 편의점이 매 블럭마다 있는 서울에서 태어나 살다보니 기준이 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밤이 이렇게 긴데, 밤에 문 여는 가게가 술집 말고 이렇게 없어서야 쓰겠냐고 여전히 툴툴거리니, 약간 이해를 못하는 눈치다. 저녁엔 집에서 가족들과 요리를 해먹고, 아늑한 시간을 보내는 게 당연한데, 왜 그렇게 밖을 싸돌아다닐 핑계를 찾느냐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늦은 저녁이나 주말, 혹은 휴일에 내가 어떤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같은 사회 구성원 중 누군가가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 경찰, 응급대원 등 필수적으로 교대 근무를 하는 이들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만, 누군가의 드문 편의를 위해 노동자가 밤낮 없이 일을 하는것이 마냥 좋거나 효율적이거나 공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노동 시간에 대한 논의를 조금 더 확장하자면, 내가 공공기관에서 한달이 아니라 일주일만에 결과를 얻고 싶다면, 나 역시도 데드라인을 맞추기 위해 초과 근무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내가 급한 일로 당장 메일 답신을 받고 싶다면, 나도 언젠가는 업무 시간이 아닐 때에도 업무용 메일을 열어야 한다. 새벽에 내린 눈이 나의 아침 출근길을 방해하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새벽에 추운 공기를 헤치고 나와 길을 청소해야 한다. 물론 스웨덴에서도 야간 근무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모든 사람들이 의료나 치안 등의 필수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특근에 대한 확실한 보수가 상정되어 있기에, 그래서 남들이 일하지 않는 시즌이나 시간에 일하는 사람들이 '떼돈'을 번다는 -다소 과장된- 의식도 있을 정도다. 일례로, 스웨덴의 '야간 근무' 수당이 적용되는 시간은 오후 8시다. 일반적인 직장인에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라, 레스토랑이나 바 등의 근무지에서 적용되는 원칙이다. 새벽 1시가 넘어가면 거기에 또 추가 수당이 붙는다. 요식업계의 프라임 타임이 저녁-밤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 '불편한 시간' 법이 다소 신기하게도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인지, 스웨덴에서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경우가 많다. 간단한 요리를 해 저녁을 먹기도 하고, 커피와 간단한 간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fika' 역시 카페가 아니라 누군가의 집에서 하는 것이 드물지 않다. 그래서인지 가정집이 아니라 학생들의 자취방이라도 웬만한 감성 카페 못지 않은 세련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집이 많다. 나에게 있어 집은 굉장히 개인적인 공간이고, 따라서 웬만큼 친하지 않으면 집에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걸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스웨덴에 살면서는 가본 카페보다 친구의 집이 훨씬 많다. 한국에서는 연말 파티를 위해 호텔 혹은 파티룸을 빌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더니 나를 무슨 굉장한 부자 혹은 사치스러운 사람인줄 알았다던 친구들도 있었다. 스웨덴에서는 이 모든게 서로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의자가 모자라면 이웃집에서 빌려오고, 집에 컵이 20개 정도는 있는게 보통이다. 이제는 안다. 어둡고 조용한 밤거리를 걸으며 스웨덴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들 있나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은, 집이었다.
여전히,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훌쩍 코트를 걸치고 나가 커피를 마실 카페가 있었으면 하고, 길거리를 걸을 때 부드러운 조명을 밝힌 소품이나 옷가게를 구경하고 싶다. 하지만 그 모든 편의와 아늑함은 다른 누군가의 추가 노동에서 나온다는 걸 안다. '불편한 시간'에 일해서 돈을 더 벌기를 선호하는 개인도 분명히 있겠지만, 그 어떤 시간에도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받는 게 당연한 누군가의 권리인 사회가 사람의 삶의 질에 더 적은 관심을 갖는 사회라는 것은 분명하다. 완벽한 사회는 없다. 밤거리를 환히 밝힌 서울, 그리고 모두가 조용히 자신의 굴에 돌아가 숨는 듯한 스웨덴 중 어느 쪽이 옳거나 더 좋은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더 효율적이고도 공평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편의에는 그에 따르는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커버 이미지: 예테보리 시내 중심부인 Vasa의 어느 날. 6시도 안되었는데 풍경은 한밤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