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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mena Apr 10. 2024

삼체 (류츠신) 1-3부 리뷰 *원작 스포일러 포함*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소설 <삼체> 1부 - 3부까지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즘 전세계 넷플릭스에서 핫한 sf 드라마 [삼체]를 작년 원작 소설로 처음 접했다. 언어와 국제학을 전공한 '뼈문과'인 나에게 11차원이니, 중력파 안테나니 뭐니 하는 개념은 너무나도 낯선 이야기다. 어디까지가 현존하는 물리학 법칙인지, 어디서부터가 작가 류츠신의 상상에서 비롯된 개념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초반에는 과학적인 설명을 따라가며 읽으려 하다가, 학창 시절 읽었던 사람은 한명인데 이름은 한 열세 개쯤 돼서 색깔펜으로 동일 인물을 표시하며 읽어야 했던 러시아 소설들이 생각났다. 그러다 이야기가 진전될 수록 어차피 여기서부터는 순수 과학이라기보다 작가의 상상이 발휘된 문학의 영역임을 받아들이고 그냥 글의 흐름에 나를 맡겼다. 책장을 덮었을 때, 스케일이 커도 너무 큰 나머지 우주의 끝까지 가버린 이 소설에서 사실 작가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주 단순한 한마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다들 어릴 적 한번쯤은 읽어봤을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책이 있다. 신에게서 벌을 받아 인간 세계에 머물며 사람이 무엇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답을 알아내야 하는 천사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총 세 번 미소를 짓는데, 그때가 바로 그가 인간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이다. 너무나도 서구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경험을 통한 내면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동양 철학의 면모가 느껴지기도 하는 이 이야기가 왜 <삼체>를 읽으면서 생각났을까. 


<삼체>는 인류의 문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버전의 첫 화에서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린 문화대혁명 당시의 지식인 공개처형은 중국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문서를 태우고 학자를 묻는다'는 뜻의 분서갱유가 선례로 존재한다. 현대 중국 사회 역시 지식과 정보의 공유, 다양한 의견 표출이 보장되는 사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자 그토록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엄청난 규모의 왕조의 요람이 된 거대한 중국 대륙은 21세기 들어 다시 한번 국제 사회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고대로부터 다른 문화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로 고도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중국은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서의 위용과 정보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인당 소득으로 대표되는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 정보의 자유화, 정치의 민주화 측면에 있어서는 선진국이라 불리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대 중국의 모순적인 성장 양태는 어쩌면 삼체 문명과 닮아있다. 


세 물체간의 중력의 작용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된 '삼체' 문제이다. 소설에서는 태양이 세 개 존재하는 삼체 세계가 존재한다. 이 행성에서는 안정된 기간인 항세기와 극한의 기후가 닥쳐와 문명이 다시 영점으로 돌아가는 난세기가 반복된다. 생존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시도해가며 수많은 리셋을 거쳐 명맥을 유지해온 삼체 세계는 중국 문명의 흥망성쇠와 닮아있다. 소설에서와 같이 외생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중국 땅에 존재해온 수많은 문명과 문화는 꽃피우고 또 사그라지기를 반복해 왔다. 놀라운 점은, 삼체 세계가 그 모든 극한의 환경을 지나면서도 생존해 왔듯, 중국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출발하면,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어마무시한 스케일의 우주와 과학 기술적 상상력은 이 모든 이야기의 지표면일 뿐이고,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문명의 생존과 의의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약 200여개의 현대 국가들와 80억 인구의 생존과 번영, 그들의 역사는 우리가 가진 모든것이며 우리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수준의 존재이다.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칼 세이건이 말했듯 '창백한 푸른 점'이다. 조금만 더 멀리 떨어져서 보면 푸른지 붉은지 알 수도 없는 작은 점이었다가, 점점 더 멀어질 수록 너무나도 작고 보잘것 없는 하나의 먼지가 되었다가, 작은 먼지 구름의 일부였다가, 아예 보이지 않는 암흑이 되어버린다. 


오은영 선생님이 말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첫 수학 시험 성적을 기억하는 사람 있냐고. 그때는 그렇게 중요한 것만 같던 일이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의 사소한 일이 되므로 성적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명심하고, 그것으로 아이를 재단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고작 일 이십년만 지나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이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의 일이 된다. 사막을 달려 전 유라시아를 호령하던 칭기즈칸도, 알렉산더 대왕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어받은 엘리자베스 여왕도 모두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살면서 누구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싸우고, 인생에 찾아오는 모든 단계의 성공과 실패에 기뻐하고 좌절할 의미가 무엇인가. 


작가는 이러한 사고의 끝에 오기 쉬운 허무주의를 거부한다. 그리고 청신 (드라마에서는 진 청)이라는 평범한 캐릭터를 내세워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제시한다. 





모든 문명의 제 1 공리는 생존이다. 



생존. 거칠고 무딘 단어다. 하지만 생존은 비단 남을 죽여야 살아남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아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라는 책이 있다. 자연 세계에서의 종의 생존이 적자생존, 즉 가장 적합한 자의 생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종 내에서, 또 다른 종과 협력하는 '다정한' 종이 살아남아왔다는 수많은 예시를 보여주며 진화론에 새로운 관점을 더했다. <삼체>의 '청신'이 바로 그 다정한 종이다. 그녀는 마음이 약한 나머지 스스로도 후회하고 자책할 인류의 운명에 대한 결정을 몇 번이나 내린다. 도저히 다른 문명을 파괴하라는 저주의 메시지를 보낼 수 없어서, 인류 문명 간의 또 다른 전쟁을 발발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그토록 막강한 힘을 가지고도 고개를 젓는다. 얼마 뒤 자신이 선의로 내린 결정이 실은 인류의 운명에 종말을 불러왔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도 후회한다. 하지만 결국 생존하는 것은 깨달음에 도달한 면벽자 뤄지도, 전진 또 전진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웨이드도 아닌, 그토록 유약하고 다정한 그녀다. 그녀의 다정함이 윈톈밍을 통해 삼체 세계로, 또 더 머나 먼 우주로 퍼져 나갔다. 


그러니 류츠신의 세계에서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은 -유치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사랑이 아니었을까. 








여기까지가 내가 길고 긴 삼부작 소설 <삼체>를 읽으며 느낀 주제 의식이다. 이야기의 굵은 줄기 외에 흥미로운 알레고리가 여럿 있었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해보려 한다. 



1. 생존과 위협

처음에는 냉정한 초인적 존재로만 비춰지던 삼체 문명과 지자 (sophon)가 이야기가 진행되고 스케일이 커질 수록 '선녀'처럼 느껴진다. 삼체는 그나마 상대 가능한 수준의 문명이었다면, 저 멀리에 있는 차원 조종이 가능한 존재들은 태양계 전체를 그저 청소할 수 있는 초월적 존재다. 유사한 수준의 문명의 공격에도 살아남기 힘든 어린 아이 문명인 인류가 그토록 높은 수준의 존재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흥미로운 것은,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와 같은 악의가 '암흑의 숲' 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왜일까? 바로 재 간 수준의 차이가 차원의 차이만큼 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옷에서 벌레를 떼어내서 나뭇잎에 내려주려다가 실수로 벌레를 뭉개버리는 데 있어 악의는 없다. 새 집에 이사했을 때 쥐가 나오면 청소 업체를 부른다. 이때 개별적 쥐 개체에 대한 그 어떤 원한도 없다. 그저 그들이 상징하는 위생 문제와 차후에 발생할 수 있는 건강 문제가 그들에 대한 우리의 동정심에 우선하기에 그들의 존재를 '청소'할 뿐이다. 인류가 그토록 열심히 기술을 개발하고 숙고해서 보낸 이름도 웅장한 '저주의 주문'은 사실 모기 한마리가 저 먼 태양계에서 낸 왜앵 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저 손을 휘둘러 소리가 나는 곳에서 벌레를 잡았을 뿐이고, 그 방법이 3차원 세계를 2차원으로 납작하게 눌러버리는, 모기의 입장에서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폭력적으로 혁신적인 방법일 뿐이다. 모기가 같이 좀 살자며 한달에 피를 두 방울만 나눠주면 어떻겠냐고 인류와 같이 높은 수준의 소통을 해온다면 공존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안전 보장 성명). 아니면 자꾸 이렇게 우리 동족을 죽이면 네 집에 집중적으로 알을 까겠다고 위협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소통이 가능하지 않기에 우리는 그들과 -최소한 미시적인 수준에서는- 공존하지 않는다. 생존은 모든 문명의 기본 존재 목적이고, 위협은 그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2. 그림 속 그림

세기의, 아니 전 우주적 사랑꾼 윈톈밍은 그가 다시 청신을 만날 수 있었던 단 한번의 기회를 통해 그녀에게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하지만 삼체 세계의 감시 하에서 직접적인 정보 전달이 불가했기에 이야기를 만들어 비유를 통해 기술을 전수한다. 우리가 읽는 <삼체> 속 윈톈밍의 동화 속 이야기, 그리고 바늘귀가 그린 인물들이 갇힌 그림은 한 단계식 차원이 낮아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마치 삼체인들이 탈수를 통해 몸을 납작하게 만들어 3차원에서 2차원적인 존재로 생존하는 모습과 닮아 있다. 지자가 11차원까지 펼침을 진행했다가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3차원의 인간 형태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과, 마지막 권에서 3차원의 태양계가 2차원으로 접히는 모습 역시 이 구조를 따른다. <존 말코비기 되기> 라는 영화가 두드린 '제 4의 벽'과 영화 <인터스텔라> 속 쿠퍼의 책장 속 간절한 외침은 또다른 그림 속 그림이다. 




3. 문명의 비유

작가는 이야기를 통한 비유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윈톈밍의 동화 속 비누를 이용한 공간 곡률은 굽어진 공간을 펴서 광속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술을 의미하는데, 이거 어째 옛 중국에 존재했다던 축지법이 생각난다. 굽어진 공간을 편다는 점과 땅을 접는다는 점이 방향 면에서는 반대지만, 움직이는 존재의 속력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변화를 준다는 발상의 전환이 맞닿아 있다. 


또한 삼체 문명이라는 소설의 제목이 된 문명이 보면 볼수록 그렇게 대단치는 않은 존재로 격하되는데, 이것은 서구 문명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수준의 기술력 차이로 인해 승패가 결정된 싸움으로 보이던 문명간의 대결이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뒤집어진다. 서로 완전히 다른 존재인 것처럼 보이던 두 문명은 협력하기도 하고, 서로에게서 기술과 책략을 배우며 교류하다가, 이야기의 끝에서 그들의 한 조각이 각각 '살아'남아 존재를 이어간다. 중국 '뽕'이 상당한 이 소설 속에서 과학 및 정치계 주요 인사는 모두 중국인이다. 그간 미국 sf 영화들이 보여줬던 미국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지만, 그 모든 것을 겪고 난 인류가 중국 출신이라는 점이 역시 엄청난 대륙의 기상을 보여준다.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을 고려할 때, 이름이 한 번이라도 등장하는 인물이 모두 중국, 미국 및 유럽권, 러시아, 그리고 한국과 일본 등의 아시아 국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프리카, 동남아 및 중앙아시아, 라틴아메리카는 그냥 존재하지 않는 대륙에 가깝다. 그냥 한국인도 아니고 무려 북한군이 등장하지만 저 드넓은 '제 3세계'는 그의 미래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거대한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국 외에 특별히 서구 문명을 높이 사고 있지 않다는 점의 느껴지는 지점이 바로 삼체 문명에 대한 독자의 태도 변화,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운명이다. 그토록 수준 높은 기술력과 윤리 원칙을 보유한 이들이 결국에는 지구인보다도 계략에 능해지고 도 기술적인 우위 역시 확언할 수 없게 되며, 애시당초 그들이 지구를 침략하기로 한 이유가 지구인들의 기술 발전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점이 그들을 극 초반의 신적 위치에서 끌어내린다. 부상하는 중국을 현실적이고도 윤리적인 이유로 경계하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의 모습이 비쳐보이는 것은 우연일까. 








이토록 긴 책을 읽고 나면 나중에는 구체적인 줄거리가 기억나지 않기도 하고, 인물의 이름이나 관계도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목적은 기억에 있지 않다. 내게 있어 능동적인 독서는,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내 나름대로 해석해서 그 깨달음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책장을 덮으며 이 책을 기억할 수 있는 한 문장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접혀진 책장의 차원을 다시 펼쳐서 제 3부의 첫장을 펼쳤더니, 거기에 답이 있었다. 



모든 지적 존재의 문명은 결국 그들이 가진 생각의 크기만큼 발전한다


류츠신의 다정함이 이기는 세상에서는 지적 통찰과 이를 통한 윤리의 발전, 그리고 희생을 통한 공존이 지적 존재의 문명의 궁극의 도달점이다. 그런 세상이라면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봐도 좋을 것 같다.





P.S. 사실 나는 고2 첫 수학 성적을 기억한다.



(이미지 출처: '우주' https://en.wikipedia.org/wiki/Unive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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