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르미 Jul 29. 2021

딸을 위해 다시 쓰는 엄지공주 #6.

다 이루었다. 엄지공주가 이렇게 긴 줄 전에는 몰랐다.

  소녀는 이제 안다. 아주 멀리 여행한다고 해서 이름을 찾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렇지만 제비의 등 위에서 보이는 풍경은 제법 괜찮았다. 


  땅에 발을 딛고 살던 작은 소녀에게는 작은 언덕도 마치 안나푸르나 같았다. 빗방울은 물폭탄이었고, 눈송이 하나하나가 눈사태 같았다. 작은 어려움도 크게 느껴졌고, 힘든 겨울을 지나며 더 심해졌다.     


  그러나 이제 하늘에서 내려다보자 모든 것을 제 모습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크던 것들이 이제 오히려 작게 보였다. 멀리서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여름과 가을을 지나, 겨울의 벽을 넘어 오랜 비행 끝에 둘은 마침내 다시 따뜻한 나라에 도착했다.      


  하늘은 푸르고 높았다. 태양은 훨씬 더 환하게 빛났다. 푸른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신전이 있었다. 세월이 지나 바래긴 했지만, 우뚝 솟은 기둥은 소녀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 기둥 위에 제비들이 여러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소녀를 데리고 온 제비의 집이었다.      


  각각의 집들에는 새끼 제비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부모 제비들은 밖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새끼들이 배고프다고 하면 날아가 사냥을 해 오곤 했다. 소녀는 그 모습이 어딘지 처량해 보였다.     


  제비는 소녀를 기둥 아래에 있는 꽃밭에 내려 주었다. 자세히 보니 꽃들마다 작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모두 날개가 있었고 투명하게 빛나는 사람들이었다. 꽃밭 한가운데 있는 크고 흰 꽃에는 작은 왕관을 쓴 남자가 있었다.     


  소녀만큼이나 왕관을 쓴 남자도 아름다웠다. 소녀처럼 꽃에서 태어난 사람, 그중에서도 왕이었기 때문이다.  

  

  왕은 소녀에게 다가왔다. 왕은 지금까지 만났던 두꺼비나 풍뎅이, 두더지와는 달랐다. 소녀를 무시하거나 마음대로 하려고 하지 않았다. 왕은 정중하게 소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런데 이름을 대려던 소녀는 문득 깨달았다. 아직 자기 진짜 이름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왕은 부드럽게 웃으며, 소녀를 이끌었다. 그리고 정원에 핀 꽃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주었다.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따뜻한 나라에서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소녀는 낯익은 꽃을 보았다. 꽃에는 무지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소녀의 머리카락도, 얼굴빛도, 입은 옷도, 전부 그 꽃을 닮아 있었다.     


  “저기, 저 꽃은 이름이 뭔가요?”     


  소녀가 태어난 꽃밭에서는 그 이름을 아는 이가 없었다.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취한 꽃들은 하루 만에 피고 지는 꽃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 따뜻한 나라에서는 꽃이 지지 않았다. 그리고 왕은 하루 만에 지는 꽃들과 풀들, 벌레들의 이름까지 다 알고 있었다.

     

  “아이리스라고 해요.”     


  왕이 꽃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 이름이 소녀의 이름이 되었다. 진짜 이름을 찾은 소녀의 어깨에 날개가 돋아났다. 왕은 소녀, 아이리스에게 청혼했다.     


  그때 아이리스는 두꺼비와 풍뎅이, 들쥐와 두더지가 어떻게 지내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들도 자기 진짜 이름을 찾는다면 더 행복해질 것 같았다.     


  아이리스는 이름을 찾아준 왕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왕비가 되는 것은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 대신 왕에게 여행에서 만난 친구들 얘기를 들려주었다.     


  왕은 아이리스가 친구들을 데리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아이리스는 왕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제 아이리스는 다시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 그들이 아이리스를 따라 왕에게 올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아이리스는 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이야기는 이제 끝나지만, 진짜 이름을 찾기 위한 모두의 여행은 이제 다시 시작이다.      


  딸아. 어느 날 밤, 은빛 날개를 빛내며 아이리스가 너의 창가를 두드릴지도 모른단다.      


  네가 진짜 이름을 찾고, 가장 너답게 살기를 기도한다.      

  지혜로운 제비 같은 친구를 만나기를.      

  네 모습 그대로를 용납해주고 기다려주는 왕 같은 사람을 만나기를. 

  네가 그의 인격을 존중해줄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두꺼비나 풍뎅이, 들쥐 같은 친구들을 주의 깊고 용기 있게 도와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기를.     


  행복한 여행이 되기를. 그리고 언젠가 아이리스의 은빛 날개가 너의 어깨에도 돋아나기를.


  <완>

매거진의 이전글 딸을 위해 다시 쓰는 엄지공주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