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림과 진화

<21 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발 하라리>

by 이제은


대학생 시절의 나는 많이 굶주려 있었던 것 같다.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체 그 무언가를 찾아야만 한다는 일종의 강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불안해하고 초조한 밤들을 지새웠었다. 내 앞에 놓인 시간들이 멈추지 않고 시곗바늘처럼 흘러가는 것이 불안해했다. 내 주변 사람들과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 사람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왠지 나만 자꾸 뒤처져 있는 듯한 생각에 이렇게 안일하게 있으면 안 될 것 같이 초조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전철역 안을 바삐 걸어가는데 저 멀리 책들을 쌓아놓고 파는 것이 보였다. 심지어 할인가에 판다는 표지판도 쓰여있었다. 엄마와 함께 걸어가던 나는 발길을 멈추고 재빨리 책들을 스캔했다. 나는 그중에 데일 카네기의 책 5권을 골라 초고속 스피드로 결제를 한 뒤 양손 가득 책들을 들고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다소 걱정스러우신 눈빛으로 나와 책들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셨지만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아마도 내가 신이나 혼자 웃으며 재잘재잘 떠들어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들의 제목은 이러했다. 인간관계론, 자기 관리론, 성공 대화론, 인생론, 그리고 명상록. 나는 방학 동안 이 다섯 권의 책들을 독파하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다. 내가 지불한 돈에 대한 책임 반, 내 의지를 시험하는 호기심 반으로. 그날부터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30페이지씩 읽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독서도 시험을 준비하듯 잔뜩 힘이 들어가 철저하게 했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자기 계발에 매우 굶주려 있었고 학업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허탈함, 불안, 초조함 등을 어떻게든 소화시켜야만 했다. 나는 독서를 통해 극복하기를 바랐다. 데일 카네기가 나에게 해답을 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렇게 시험공부하듯 책들을 읽던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심심해져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모님 서재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내 기억에 집에는 항상 책들이 많이 있었다. 내 키의 1.5배와 내 팔 길이의 두배나 되는 책꽂이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빽빽이 꽂혀있었다. 가족들이 읽는 책들부터 시작해 가족 앨범과 오래된 CD와 DVD 들도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언니와 동생과 내가 어렸을 적 받은 상장들과 우리들의 어렸을 적 사진들도 아기자기한 프레임들에 담겨 책장 곳곳에서 나를 반겨주었다. 나는 추억이 담긴 그 물건들을 한 번씩 소중히 쓰다듬어 준 뒤 다시 시선을 책들로 돌렸다. 천천히 책들을 훑어보았다. 부모님께서 읽으시는 책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다소 어려운 제목들과 꽤 두꺼운 두께를 자랑하는 책들도 여러 권 보였다. 쉽게 책을 고르지 못하던 찰나 그나마 예전에 한두번 들어본 적 있는 법정 스님께서 쓰신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그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하려는데 그 순간 서재로 걸어 들어오신 아빠가 나를 보며 타이르듯 말씀하셨다. 지금 그 책을 읽는 것은 아직 이르며 책을 읽는 것에도 때가 있단다 말씀하셨다.


그때는 아빠의 말씀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어려운 내용이 책인가 보구나. 나중에 나이가 좀 더 들고 난 뒤 읽어야하나보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조금 알게 되었다. 인생엔 어떠한 기간들이 있다는 것을. 마냥 학생이던 내가 사회 초년생이 되자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새로운 것들을 느끼게 되었다. 학생으로서 당연히 누리던 많은 권리와 혜택들이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나는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지 크게 깨달았다. 학생이라서, 학생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해받았던 부분들이 사라지고 직장인이라서, 직장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부분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어떤 날들은 그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부분들이 마냥 서럽게 느껴졌고 심지어 불공평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꼭 나만 이렇게 아등바등 버티며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져 매우 속상했다. 그래서 그 속상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정크푸드 (열량은 높지만 영양가는 낮은 즉석식과 즉석식품)를 먹거나 밤늦게까지 티브이와 핸드폰을 했었다. 왠지 그러고 나면 허했던 마음 한구석이 어떻게든 다음날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은 충전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세상의 많은 사람들 모두 그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꿋꿋이, 묵묵히 짊어지고 해내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서러움이 어느 정도 진정되는 듯했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서러움을 삼키는 방법을 배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시험공부하듯 열심히 읽었던 데일 카네기의 책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열심히만 읽었던 그 책의 내용들이 어느새 내 삶에 융화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를 대하는 나의 자세에서도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나는 내게서 그 책들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신기하면서도 희한했다. 그 당시에는 몰랐었는데 그저 읽고 지나가버린 줄 알았던 책들이 머릿속에, 가슴속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맞닥 드린 다양한 문제들의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지금 내게 필요한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약 지금 내게 어떤 책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면 다양한 책들과 글들을 읽어보며 탐험해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좋아하는 책을 읽는 것도, 미처 몰랐던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모두 큰 행복이다. 책은 내가 어디에 있던지 새로운 세계로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멋진 친구이다. 세 살이 되어가는 조카도 책을 참 좋아한다. 아마도 언니와 형부가 실감 나고 재미있게 책들을 읽어주었기 때문이고 또한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진 재미난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의 조카처럼 나 또한 어렸을 적 동화책들과 위인전등을 읽으며 책 속의 신비로운 세상과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겪는 이야기들을 통해 많은 것들을 간접적으로 보고 느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삶과 꿈, 시련과 극복, 사랑과 용기에 대해 배우며 자랐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의 기준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책을 언제 읽느냐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책은 '나'라는 사람의 가치관을 쌓는 벽돌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아빠가 내게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어떤 책을 언제 읽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과 무의식이 변화한다는 것을.


서른이 되고 나자 조금은 생각하는 힘이 생긴 듯 하나 아직도 내 작은 세상이 편한 것을 보면 더 노력해야 할 듯하다. 꾸준한 독서를 통해 생각의 근육을 기르고 능동적이고 자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훗날 내 조카가 나처럼 굶주려하고 방황하며 어떤 해답을 찾길 원한다면 나는 아빠가 그랬듯, 조카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우주와 삶의 의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은가. 가장 좋은 출발점은 먼저 고통을 관찰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다. 답은 결코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나라의 문화나 미지의 생물, 머나먼 우주의 행성을 이해하기 위해 기꺼이 노력할 마음이 있다면,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그만큼의 노력을 들이는 것 또한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자신과 세계에 관한 진실을 안다면 아무것도 당신을 비참하게 만들 수 없다.

-<21 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발 하라리> 중에서



진정한 진화란 무엇일까?


깨달음 -> 일깨움 -> 깨어남 -> 깨달음


내가 어떤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일깨워준다. 그러면 그 누군가가 깨어나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일깨워준다. 이것은 마치 수면 위로 점차 크게 퍼져나가는 파동과도 같다. 결코 작아지지 않고 멈추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조용히, 널리 퍼져나간다.


우리가 태어나 살아가는 여행의 목적은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 아닐까. 연약한 인간이라는 존재인 우리가 이 세상에 짧게 머무르는 시간 동안 해야 하는 일은 더 많이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고, 나누고 깨달음을 얻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배우고 경험하고 깨달은 것을 기꺼이 남들과, 세상과 함께 나누면서 같이 앞으로 나아감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진화가 아닐까?





커버 이미지: Photo by Ben White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