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어제 어디 부딪혔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딪힌 기억은 없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즈음에는 오른쪽 다리를 조금씩 절뚝거리고 있었다. 누가 볼세라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현관문을 닫고 난 후에야 생각했다. '아, 괜히 서둘러 올라왔네.-_-;;' 누가 좀 보면 또 어떤가 싶었지만 왠지 절뚝거리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딱히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물건들을 정리하고 거실 요가매트에 철푸덕 쓰러지든 앉았다. 그제야 오른쪽 무릎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딱히 멍든 자국은 없었지만 손가락으로 이곳저곳 눌러보니 통증이 느껴졌다. 몇 분간 아무 생각 없이 무릎을 누르고 있는데 문득 매일 밤 자기 전 고양이와 소 자세 (cat and cow)와 아기 자세 (child's pose)를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났다.
왼쪽부터 고양이 자세, 소 자세, 멜팅 하트 자세, 그리고 아기 자세
하루 종일 앉아서 일하기 때문에 내게 허리 스트레칭은 옵션이 아니라 필수였다. 대학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장시간 앉아있으면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평소 올바른 자세로 생활하라던 부모님 말씀을 잘 안 들어서 그렇게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장시간 앉아서 생활하면서 제대로 된 운동을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던 것일까? 날마다 찾아오는 허리 통증이 갑자기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느 날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보았다. 엑스레이도 찍어보았다. 엑스레이에서 본 내 척추는 살짝 S자로 휘어져 있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심각하지 않은 척추측만증이라며 허리를 중심으로 근력 운동을 매일 꾸준히 하면 나아질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앞으로는 매일매일 꾸준히 운동해야지!' 마음먹었다.
그 후로 처음 몇 달간은 매일 꾸준히 스트레칭도 하고 요가도 했다. 허리도 마음도 확실히 좋아짐을 느꼈다. 장시간 앉아있어도 전만큼 허리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참 다행이었다. 그렇게 통증이 사라지는 듯싶었다. 예전에는 통증이 무서워서 매일 밤 꾸준히 운동을 했었는데 통증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으니 자만심과 게으름이 스멀스멀 나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오늘만 쉬자. 어제도 괜찮았는데, 내일도 분명 괜찮을 거야.' 처음에는 양심에 찔려서 하루를 거르면 다음날은 꼭 운동을 했지만 그것마저도 이틀이 되고 삼일이 되고 일주일이 되었다.
습관은 참 무섭다. 습관이라는 탑을 쌓을 때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지만 그 탑이 천천히 무너지는 것은 참 쉬운 일이었다. 더 무서운 일은 나는 이때 이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저 통증이 나아졌다는 사실에만 우쭐해있었다. 자신과의 약속은 까마득히 잊어버렸고 그나마 있던 허리 주변의 근육들이 소리 없이 예전처럼 약해지는 것도 모른 체 장시간 앉아서 생활하고 밤에는 누워서 늦게까지 핸드폰을 했었다.
그렇게 대학원을 졸업하고 레시던시를 마치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8시간 이상을 앉아서 환자를 보게 되자 한 달 만에 다시 허리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을 끝내고 집에 오면 허리가 아프니 자꾸 누워있게 되었다. 누워있는 순간에는 통증이 좀 나아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다음날 다시 8시간 앉아서 일을 하고 오면 또다시 통증이 반복되었다. 어떤 날은 전날에 비해 더 심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덜 심하기도 했다. 불현듯 몇 년 전 찍었던 엑스레이 속의 S 자 척추 모양이 떠올랐다. 두려워졌다. 이렇게 방치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밤마다 요가를 시작했다. 요가라기보다는 간단한 스트레칭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위의 자세들과 함께 다른 자세들도 함께 한다. 아마존에서 요가 자세 포스터를 사서 벽에 붙여놓고 거울을 보며 따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첫 번째 줄 왼쪽 끝부터 워리어 자세 I과 II, 그리고 두 번째 줄 오른쪽 끝 트라이앵글 자세를 하고 있다.
첫 번째 줄 왼쪽 코브라 자세와 업워드 페이싱 도그 자세, 그리고 두 번째 줄 왼쪽 낙타 자세를 하고 있다.
놀랍게도 밤마다 꾸준히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하니 마법같이 통증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자만심 대신 감사함으로, 게으름 대신에 자신감으로 몸과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몸의 긴장이 풀리니 자연스럽게 마음의 긴장도 함께 풀리는 듯했다. 더구나 이번에는 동생 J와 함께 하니 재미도 있고 의욕도 생겼다. 혹시라도 둘 중 한 명이 하기 싫어해도 다른 한 명이 일단 앉아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하면 희한하게도 항상 다른 한 명도 함께 스트레칭을 했다. 이래서 운동은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것이 오래 꾸준히 할 수 있는 비법인 듯하다. 서로를 이끌어주고 자극과 격려를 해줄 수 있기 때문에 말이다. 나와 동생은 아빠가 가르쳐주셨던 목 운동도 함께 하기 시작했다.
목을 좌우 아래위로 각각 5초씩 부드럽게 유지해주며 근육이 늘어나는 것을 느낀다. 어깨 움츠리기와 목 돌리기로 마무리한다. 출처: www.betterpt.com
매일 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스트레칭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면 신기하게도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아무리 피곤했던 하루라도 짧게라도 스트레칭을 하고 나면 다음날 몸상태가 한결 좋아져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껏 나는 살면서 많은 순간들을 '왜 나는 이렇게 허약하게 태어났을까?' 한탄했었다. 허리뿐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보다 더 낮은 고통 저항력 (low pain tolerance)을 가졌다. 예를 들면 누가 살짝 꼬집거나 툭 치는 것에도 아픔을 느낀다. 그런 나의 반응이 상대방을 민망하게 만든 적들도 많다. 나는 그런 내가 이해가 되질 않았고 너무 쉽게 아픔을 느끼는 나 스스로를 좋아하기가 힘들었다. 비단 이런 아픔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허기와 추위에도 매우 약하다. 그래서 항상 초콜릿과 겉옷을 챙겨 다닌다. 다시 말하지만 나도 이런 내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고 나의 약한 면들을 외면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외면하고 살고 싶었다.
하지만 외면한다고 나의 약한 면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나아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외면할수록 방치했던 나의 허리 건강처럼 더 약해짐을 느꼈다. 건강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욕심이란 것은 끝이 없다. 속으로 수도 없이 생각했다.
'이왕이면 허리도 더 튼튼해서 장시간 앉아있어도 아프지 않았으면...'
'이왕이면 허기와 추위도 잘 견디는 체질이었으면...'
'이왕이면... 이왕이면...'
근데 '이왕이면" 해도 사실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본질은 같다. 나는 나다. 그냥 이렇게 생긴 사람이다. 내가 노력해서 나아지고 향상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 반면 타고난 체질을 바꿀 수는 없다. 부인할 수 없다. 그저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어롱더롱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에게는 허약한 체질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것들이 될 수 있다. "불평하고 외면한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줄어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일단 실컷 불평하고 외면해보라고 말해줄 것이다. 그렇게 한바탕 쏟아낸 뒤에 속이 좀 시원해지고 마음이 좀 가라앉거든 그때는 자신의 그 부분을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말해줄 것이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위를 둘러보면 알겠지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다들 누구나 하나쯤은 부족한 부분을 갖고 있다. 단지 그게 드러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진정 지혜롭고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하고 불완전한 부분들과 마주하는 용기를 갖고 있지 않을까? 그들은 자신이 외면할수록 그 부분들이 더 거세게 스스로를 움켜잡고 놔주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계속 불완전함에 이끌려 진흙 늪 속으로 함께 빨려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두 손으로 움켜잡고 있는 불완전함을 놓아줄 것이지 말이다.
No pain, No gain
고통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소한의 고통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최소한의 고통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용기를 내어 나의 부족하고 불완전한 부분들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고통의 시작이자 끝이 아닐까?
고통이란 무엇일까. 내겐 허약한 체질이 고통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고통일까? 얼마나 아프고 힘들어야 '고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고통이 내게는 고통처럼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반대로 내 고통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처럼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들 삶에 고통은 객관적이지 않다. 매우 주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나의 고통을 모두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각자 경험해온 삶의 모양과 생김새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생김새가 모두 제각각이듯. 우린 우리가 경험한 한정된 범위를 토대로 나를 포함한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다. 그 범위가 좁을수록 이해의 폭은 더 좁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그 범위가 넓을수록 이해의 폭은 더 넓어질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포함해 함께 살아가는 내 주위 사람들, 직장 동료와 이웃들, 에 대해 관심을 갖고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을 배우며 천천히 이해의 폭을 넓혀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만큼 중요한 일은 나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 아는 만큼 내가 보일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나 스스로를 위해서도 아니고 자아도취에 빠지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먼저 나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명확히 알게 되면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해력도 자연히 올라간다. 상승한다. 넓어진다.
사람은 다 비슷비슷하다. 눈뜨면 삼시 세 끼가 걱정이고 사랑하는 가족의 안전과 행복이 중요하고 잠잘 때 아무 걱정 없이 두 발 뻗고 편하게 자길 원하는 것. 결국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이해해야 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거울을 들여다봄과 같다. 거울에 비친 나는 한 명이다. 완전하고 불완전한 부분들 모두 나라는 한 사람의 일부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또한 거울이 나를 비추지만 내 주변도 함께 비춘다. 마치 내게 말하는 것 같다. 잊지 말라고. 나와 나를 감싸고 있는 세상은 함께라는 것을. 그러니 이왕이면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으며 함께 어롱더롱 어울려 살아가야 함을.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들 삶의 고통을 아름다운 무지개로 승화시킬 수 있는 용기와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Dave Contreras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