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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은 Mar 23. 2023

봄으로 물들어가는 오늘처럼

어느 수요일 나른한 오후, 먼지가 내려앉는 창틀처럼 할 일은 없고 졸음과 지루함에 시들거리다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서둘러 산책을 나갔다. 추위를 가르며 쏟아지는 태양빛의 따스함이 두 볼을 간질거렸고 작년보다 서둘러 피어나는 작은 꽃봉오리들처럼 나의 세상을 봄으로 물들였다.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싱그러운 바람을 따라 걷다 보니 상기된 얼굴로 비탈길을 조심스레 달려 내려가는 작은 꼬마 아이와 그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걸어가는 아이의 엄마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다시 길을 따라 걷는데 이번엔 위쪽에서 어린 남자아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게 도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깜짝 놀라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자신의 키보다 두 배나 큰 나무 위에 올라가 내려올 방법을 모르는지 어쩔 줄 몰라 보이는 남자아이가 나뭇가지들위에 앉아있었다. 다람쥐도 아니고 참새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저 나무 위에 올라갔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혹시 내가 도와주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소년의 친구가 나무 밑으로 다가갔다. 소년은 친구를 보자 갑자기 용기가 솟아났는지 긴 꼬리원숭이처럼 능숙하게 나뭇가지들을 붙잡고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나는 숨죽여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 작은 소년이 마지막 나뭇가지를 놓아주며 마침내 땅으로 무사히 착지하는 순간 참고 있었던 숨을 후우 내뱉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그 소년을, 자신의 힘으로 끝가지 해낸 그 소년을, 마음속으로 열심히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옮기자 이번에는 저 멀리 새하얀 불도그가 봄볕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눈사람같이 하얀 불도그 옆벤치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갈색 단발머리 여자가 음악을 들으며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처럼 그 눈사람같이 하얀 불도그가 신기했는지 그 둘을 향해 다가가 말도 걸고 불도그를 쓰다듬기도 했다. 낯선 사람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얌전히 있는 불도그가 신기하다 생각하며 맞은편 초등학교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담한 초등학교 담장길에는 샛노란 개나리들이 옹기종기 피어있었다. 때마침 참새들의 정겨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는데 봄이 왔음을 기뻐하는 듯한 그 선율이 마치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선율이 내 안을 가득 채우고 환히 밝히자 걱정과 근심으로 움츠러들었던 내 안의 모든 것들이 마치 봄에 태어나는 빛나는 생명들처럼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듯했다.


이렇게 생명은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굉장한 것임을 어떻게 나는 살아 숨 쉬면서도 까마득히 잊고 지냈었던 것일까? 내가 보고, 듣고, 들이마시고, 취하고, 행하는 모든 것들이 이 경이로운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삶의 진정한 의미는 살아 숨 쉬는 순간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소화시키며 내 안의 에너지를 밝고 긍정적으로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시작으로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밝고 긍정적으로 만드는 것! 마치 봄으로 물들어가는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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