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헤르만 헤세>을 읽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으며 특별히 마음에 와닿은 구절들을 모아보았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무언가를 보고 미워하는 거지. 우리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p227
“그의 말이 참으로 옳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 말을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 나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그것을 따르기에 나 자신이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충고를 남에게 해 줄 수는 없었다. “ -p235
“세계에 무언가를 주겠다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그 생각이 내 마음을 깊이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는 이 체험에서 얻은 열매였다. 나는 자주 미래의 영상들을 가지고 유희했더랬다. 어쩌면 시인 혹은 예언자 혹은 화가 혹은 어떻게든 나를 위해 예비되었을 역할들을 꿈꾸곤 했다.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짓기 위해, 설교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어떤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진실한 직분이란 단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사람들은 결국 시인 혹은 광인이, 예언가 혹은 범죄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나 관심 가져야 할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 내는 일이었다.” -p258
“오려고 하는 것은 갑자기 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겪게 되겠지요.” -p318
문득 이 구절들을 옮겨 적으며 최근에 읽은 그의 또 다른 책 ‘싯다르타’가 떠올랐다.
“세상은 쓰디쓴 맛이었다. 인생은 번뇌였다. 하나의 목표가, 단 하나의 목표가, 싯다르타 앞에 세워졌다. 그것은 해탈(解脫)이었다. 갈증에서, 욕망에서, 꿈에서, 기쁨과 슬픔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 자아(自我)를 벗어나는 것, 텅 빈 마음에서 안식을 찾는 것, 자아를 벗어난 사유(思惟) 가운데서 기적을 만나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였다. 자아 일체가 초극되고 소멸되었을 때에, 가슴속의 모든 욕구와 충동이 침묵할 때에, 비로소 가장 궁극의 것, 이미 자아가 아닌 본질 속의 가장 심부의 것, 위대한 비밀이 깨어날 것임에 틀림없었다. “ -p27
“이렇게 오랫동안 정원 입구에 서 있은 후 싯다르타는 깨닫게 되었다. 자신을 이 장소에까지 몰고 온 그 갈망은 어리석은 것이었음을. 자기로서는 아들을 도와줄 수 없으며, 아들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는 마음속 깊이, 하나의 상처처럼 도망친 아들에 대한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상처는 자신을 아프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며, 상처가 꽃이 되어 찬연하게 빛나게 될 것임을 느꼈다. “ -204
“내게 유일한 관심사는 세계를 사랑하는 것, 세계를 경멸하지 않는 것, 세계와 나를 미워하지 않고, 세계와 나, 그리고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과 경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네.” -p236
그러자 이번엔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의 ‘나도 틀릴 수도 있습니다’의 구절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고통이 자기 안에서 출발한다는 통찰력을 갖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머리로는 알아도, 진심으로 받아들이려면 아주 겸손해야 합니다.” -p134
“잘 들어보세요.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무작정 믿지 않아야 합니다.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현재 상황을 온전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 우주가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 운행된다는 근본적 진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진실이 뭐냐고요?
당신이 알아야 할 때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생략)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까지 불안해하는 대신, 결국 모든 것이 순리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사는 데 익숙해진다면 더 높은 차원의 자유와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래를 통제하고 예견하려는 헛된 시도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럴 용기가 있다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p158
”평온은 폭넓은 지혜를 담은 감정입니다. 흔히 알아차림이 부르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으로, 부드럽고 총명하며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모든 일이 순리대로 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 -p198
이렇게 적어보니 헤르만 헤세와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의 삶에 대한 철학은 굉장히 닮은 부분들이 있는 듯하다. 나는 궁금하여 그들의 배경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헤르만 헤세
1877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신교의 목사였고 어머니는 신학자로 인도에서 다년간 활동한 신학자 헤르만 군데르트의 딸이었다. 헤세의 작품들은 그의 외조부의 인도학과 또한 그 자신의 인도 여행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그는 속박된 신학교 생활을 견디지 못해 신학교를 뛰쳐나오고 자살 시도까지 하며 시인의 길을 선택했다. 평화주의자였던 헤세는 전쟁을 반대하였고 그 때문에 조국인 독일에서 매국노,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그 일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칼 구스타프 융을 만나 ‘데미안’의 등장인물들을 만들어내었다고 한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 《수레바퀴 밑에서》(1906), 《데미안》(1919), 《싯다르타》(1922) 등이 있다. 《유리알유희》로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비욘나티코 린데블라드
1961년 스웨덴에서 태어났다. 대학 졸업 후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하며 스물여섯 살에 임원으로 지명되었지만 홀연히 그 자리를 포기하고 사직서를 냈다. 그 후 태국 밀림의 숲 속 사원에 귀의해 ‘나티코’, 즉 ‘지혜가 자라는 자’라는 법명을 받고 파란 눈의 스님이 되어 17년간 수행했다. 승려로서 지킬 엄격한 계율조차 편안해지는 경지에 이르자 마흔여섯의 나이에 사원을 떠나기로 하고 승복을 벗었다. 환 속 후에는 사람들에게 혼란스러운 일상 속에서도 마음의 고요를 지키며 살아가는 법을 전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에 대한 유쾌하고 깊은 통찰력으로 스웨덴인들에게 널리 사랑받던 그는 2018년 루게릭병을 진단받았다. 급격히 몸의 기능을 잃어가면서도 사람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계속해서 전했던 그는 2022년 1월,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떠난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는 나티코의 이야기와 가르침을 담은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다. (출처: yes24)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그들의 작품들 속의 철학들이 더욱 명료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내심을 갖고 나의 내면을 탐구하고 통찰하며 끊임없이 평온의 상태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은 나의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가 느끼는 감정들도 변할 수 있다. 우리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은 우리를 자극하지 않는다. 그 점을 기억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의 뿌리, 즉 생각을 찾아내어 잘 들여다보고 관찰해야 한다.
우리 마음 안에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는 생각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더 이상 그 생각들과 감정들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내가 원하는 생각들과 감정들로 나를 가득 채울 수 있다. 나는 아마 이것이 바로 헤르만 헤세가 말한 각성된 인간의 단 한 가지 의무,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가 자신의 길을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마지막까지 걸으며 우리에게 알려주었듯이 명상은 우리에게 아주 훌륭하고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헤르만 헤세와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는 평탄치만 않았던 자신들의 삶 속에서 고통과 시련을 사랑과 희망으로 승화시켰다. 그것이 쉬지 않고 흘러가는 바쁜 일상 속에서 불안함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가 그들의 글을 읽으며 용기와 희망을 얻고 지혜와 겸손함을 배울 수 있는 이유이다. 또한 나 스스로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모두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위에 옮겨 적은 많은 주옥같은 구절들 중에서도 특히 내 마음을 울렸던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나온 구절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내가 내 스스로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또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임으로.
“상처는 자신을 아프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며, 상처가 꽃이 되어 찬연하게 빛나게 될 것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