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함의 모습

소로와 류시화의 만남

by 이제은
자연의 법칙과 조화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가 알아낸 사례 속에만 한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일치하는 수많은 자연의 법칙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이 훨씬 더 경이롭게 느껴진다. 특정한 자연의 법칙은, 여행객이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산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우리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산은 절대적으로 하나의 형태를 보이지만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무한개의 모습을 가진다. -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중에서



오랜 친구와 처음으로 크게 부딪힌 날, 나는 하루 종일 화가 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나한테!!!'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잘못은 내가 아니라 본인이 해놓고.'

'이건 말이 안 돼. 그냥 말이 안 되는 상황이야.'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의 화는 도무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청소기를 밀며 우연히 거울 앞을 지나가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씩씩거리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칠게 숨을 내쉬며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 내 모습은 증기만 뿜어대지 않을 뿐이지 영락없는 증기 기관차 같았다.


나는 청소를 하다 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분하게 만들었지?

내 마음을 이토록 쓰라리게, 아프게 만들었지?"


소리 없는 질문에 소리 없이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보는 친구의 화난 얼굴은 매우 낯설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낯선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감정 없는 눈빛.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였다. 너무 꽉 쥐어서 하얗게 된 그의 손가락들만으로도 나는 그도 매우 격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바탕 휘몰아치는 거센 태풍처럼 우리들의 대화는 서로를 자비 없이 몰아쳤다. 거센 바람에 묻어놓았던 묵은 감정들과 지난 일들도 거세게 일어나 태풍에 소나기를 더했다. 꽁꽁 잘 묻어놓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마음에 있는 모든 창문들이 거칠게 열어젖혀진 듯했다. 내 입에서는 분명 무슨 말들이 나오고 있었지만 더 이상 머리를 거치지 않고 마음에서 곧바로 흘러나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대화가 끝이 난 후였다. 우리는 말없이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익숙한 집에 들어온 뒤에야 다시금 잠시나마 잠잠해졌던 감정들이 거칠게 증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나를 속상하게 만든 친구가 미웠다. 서운하고 억울했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해줬는데... 내 마음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는 친구가 너무나도 야속했다.


한참 동안 그 순간 내 안에 감정들이 흘러넘치도록 내버려 두었다. 더 이상 제지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제지하려고 해도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온몸에 힘이 쑥 빠져나 버린 듯했다. 몸을 끌다시피 걸음을 옮겨 거실 요가 매트에 앉았다. 요가 매트에 앉으니 습관적으로 향초에 불을 붙였다. 세 개의 작은 심지에 조그마한 불길들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곧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레몬그라스 유칼립투스 향이 가득 났다. 나는 말없이 타오르는 조그마한 촛불들을 바라보았다. 가장 밝게 타오르는 오렌지 빛깔의 산 밑으로 시린 파랑이 숨어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넘실거리는 오렌지와 파랑 속에 벌겋게 달아오른 심지가 보였다. 어느덧 심지들 아래로 작은 웅덩이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작은 웅덩이들이 만나 더 큰 웅덩이를 이루었다.


그 웅덩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월든의 구절이 떠올랐다.


만약 모든 호수의 수심이 얕다면 어떨까? 그러면 인간의 마음에도 어떤 영향을 주지 않을까? 나는 월든의 호수가 수심이 깊고 물이 맑아서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맙게 생각하는 쪽이다. 인간이 무한한 존재를 믿는 동안, 앞으로도 바닥이 없는 무한한 깊이의 호수는 계속 존재할 테니까. -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중에서


문득 내 마음속에도 호수가 있다면 그 호수의 수심은 얼마나 깊을까 궁금해졌다. 사실 얼마나 얕을까 걱정이 되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왠지 소로의 말대로 만약 모든 호수의 수심이 얕다면 인간의 마음에도 분명 어떤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되었다.


나 스스로가 순수함을 되찾고 나면 이웃의 순수함도 느낄 수 있다.
-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중에서


내 마음이 순수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면 상대방이 아무리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순수(純粹)하다란 무슨 뜻일까?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고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다*. 태풍에 만신창이가 된 내 마음속 호수는 분명 순수하지 아니했다. 온갖 묵은 감정들과 지난 일들까지 그 수면 위로 떠올라 한데 뒤섞여 있었다. 무엇보다 친구를 미워하는 못된 마음이 그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나를 속상하게 만들고 서운하고 억울하게 까지 만든 그 친구를 탓하는 마음이.



향초의 효과인지 마음이 한결 진정됨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고 떠올려보았다. 내 안에 있는 호수의 모습을 천천히 그려보았다. 탁하고 어지러워진 내 마음처럼 호수의 수면 또한 매우 탁하고 어지러워져 있었다. 그렇기에 호수의 수심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나는 일단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가지런히 정돈하기 시작했다. 이미 한번 흘러넘쳤던 감정들은 이번에는 조용히 샛 물처럼 지나갔다. 감정들이 지나가고 남은 자리에는 갖가지 감정들에 가리어졌던 사실(팩트)들이 자연히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 항상 놓여있던, 내가 찾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진실들을 발견했다. 그 진실들은 내가 떼를 써서 부정하고 외면한다고 해서 결코 사라지는 그런 존재들이 아니었다. 어쩌면 소로가 전하고자 했던 말은 우리가 우리 안의 호수를 제대로 바라본다면 우리가 자칫 놓쳤던 진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녔을까? 그러므로 호수는 우리의 마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다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진실을 말하되 올바른 단어와 적절한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이다. 특히 진지한 문제에 대해 말할 때는 듣는 이의 감성과 감정을 상하게 하는 단어나 구절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 <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류시화 >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찾은 그 진실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내가 누군가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만큼 그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수 도 있으며 나 또한 상처를 줄 수 도 있다는 것. 또한 처음이기 때문에 나도, 그 사람도 각자 아픔에 제대로 대응하는 방법을 몰라 서툴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오해들이 생겨났다는 것.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용기를 내어 먼저 손을 내미는 것. 내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던 만큼 상대방도 아프고 괴로웠을 수 도 있다는 것을 보고 인정할 수 있는 것. 솔직하게 내 마음을 전달하며 오해를 풀되 올바른 단어와 적절한 문장을 사용하는 것. 그리고 상대방의 감성과 감정을 상하게 하는 단어나 구절을 사용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이란 것을 나는 깨달았다.



소로와 류시화의 조언을 믿고 나는 다음날 용기를 내어 먼저 친구에게 찾아가 사과를 했다.


"내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너에게 상처 주었던 일들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해. 너를 속상하게 하려고 한 것이 정말 아니었어. 네가 말해주고 나니 그때서야 보이더라. 네가 상처 받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나는 나만 속상하고 나만 상처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었어. 오랜 시간 알고 지냈다고 당연히 너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 자만이었나 봐. 너는 나의 소중한 친구고 나는 지금부터라도 너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 너를 더 잘 이해하고 싶어.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다시 싸우게 된다면 그때는 더 잘 풀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어. 너도 내 마음과 같다면 용기를 내주겠니?"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가장 투명하게 내비치고 나니 비로소 나는 내 마음속 호수의 고요한 수면이 한없이 맑아진 것을 느꼈다. 짧은 순간 친구의 표정이 살포시 밝아지는 것을 보았다.

푸른 희망이 작게 떨리며 잔잔한 호수 위로 퍼져나감을 느꼈다.





커버 이미지 출처: Image by FelixMittermeier from Pixabay

*네이버 사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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